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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록밴드 시나위의 신대철 씨를 인터뷰한다고 하자 주변 마니아들이 죄 난리였다. 따라가겠다, 어쩌겠다 하니 부담감도 높아졌다. '저분의 음악을 잘 모르는데, 나 같은 사람이 인터뷰하는 거 실례가 아닐까?'

인터뷰를 준비하며 열심히 음악을 듣고 공연 동영상도 보고 책도 읽으며 그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부담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현재 바른음원협동조합(이하 바음협) 이사장과 '플랫폼창동61'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신대철 씨를, 그가 종종 들른다는 용문면 덕촌리 제로제(SEEROSE) 커피하우스에서 만났다.

- 성함은 아는데 아는 바가 없어서 엄청 열심히 공부하고 왔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긴장했는데 '이이제이 팟캐스트'를 듣고 맘이 편해졌죠. 양평으로 이사 오신 지 7년 되셨는데, 오신 계기가 궁금해요.

뭐 글쎄요, 계기라고 하면… 큰애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인데, 사실 우리나라 일반적인 초등학교에서 하는 학교교육이라는 게 별로 찬성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닌 거 같아서요. 저도 고민하고 아내는 저보다 더 많이 고민을 하면서 조사해 보고 하다가 조현초등학교를 찾아냈어요. 그래서 급하게 이사를 오게 됐죠.

- 양평 살이는 만족스러우신지요.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전에는 한 번도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는데, 텃밭도 조금 가꾸고… 조그만 나무를 사다 심었는데 어느새 굉장히 자라더라고요. 나무들 자라가는 모습 보면 놀랍기도 하고. 그런저런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어 좋아요.

- 살면서 '이건 너무 좋아!', '이건 너무 힘들어!' 하는 게 있다면요.

환경적인 거죠. 숲도 우거져 있고 일어나면 공기가 좋잖아요. 숨 쉬는 거, 숨 쉴 때 상쾌하다 느끼는 거, 꽃 냄새나 꽃향기… 그런데 일은 서울에서 하다 보니 매일 왔다 갔다 해야 되니까, 이동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편하죠. 뭔가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포기해야 되는 그런 거죠.

- 락은 도시적인 느낌인데 텃밭을 가꾸신다니 손톱에 흙 때 끼지 않나요? 흙 때 낀 손으로 기타를 친 적은 없으세요?(웃음)

아니요. 또 손 씻으면 괜찮아요. 매일 흙을 만지는 건 아니니까. 손톱에 흙이 껴도 더럽다 생각은 안 해요.

- 자녀들을 위해 양평까지 오실 정도면 참 좋은 아빠다 싶은데요. 자녀에 대한 애정이 음악을 향한 열정을 이긴 건가요.

글쎄요. 애들한테 더 좋은 환경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흙을 밟고 자라면 좋겠다. 도시에선 흙을 밟을 기회가 없으니까.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흙을 밟아 볼 기회가 거의 없었죠.

도시가 사실은 굉장히 삭막하잖아요.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거 자체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고. 아스팔트를 항상 밟는 것보다 흙을 좀 걸어 보는 게 인간적이고 사는 데 나중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실 다 그런 생각이 있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못 하는 거죠.

- 올해가 시나위 데뷔 30년이죠. 30년은 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숫자잖아요. 한 분야 장인 반열에 오르신 건데, 개인적이 감회가 있으시다면요.

글쎄요. 저는 몇 년 기념하고 그런 거에 감흥이 없어요. 내일에는 영원히 내일이 와요. 그렇잖아요. 올해도 30주년이 돼서 기념 음반이나 이런 걸 좀 해볼까, 그런 고민을 좀 했어요.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저는 별로 생각을 안 했는데 제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해야 되는 건가. 그런데 다들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보면 서로 요구 조건들이 있잖아요. 그걸 다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어려운 걸 굳이 내가 해야 하나. 지금은 계획이 없어요.

- 사실 시나위의 상징은 신대철 선생님인데요. 공연을 보면 늘 조연의 자리에서 묵묵히 연주하시잖아요.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어요?

어렸을 때 음악을 접하고 음악을 배우고 기타 연습했던 시절, 그때 저의 히어로라고 생각했던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들의 모습을 동경하다 보니 기타를 치게 됐거든요. 실제 노래를 해 보려고 한 적도 있는데 잘 안 되더라구요. 자신도 없고. 역시 뭐 하나를 얻으려면 뭐 하나를 버려야 하더라고요.

기타리스트로서 확고한 입지를 만들고, 그런 게 저는 좋았던 거 같아요.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주자' 이러면 '반주자'로 생각하는데 다르거든요. 최근 콩쿨에서 상 받은 조성진 그 사람한데 감히 노래 반주해 달라 그러지는 않을 거잖아요.

물론 반주가가 하찮은 건 아니고요. 그것 또한 훌륭하고 어려운 거고 중요한 건데, 솔리스트도 솔리스트 나름의 길이 있고요. 연주자가 꼭 반주자이진 않아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 보통은 락 연주자들이 다양한 퍼포먼스를 하던데 신대철 선생님은 단아하게(?) 연주하시던데요. 오직 연주로만 승부를 걸겠다? 아니면 이 정도 비주얼이면 다른 거 필요없다 이런 건가요.

능력이 안 돼서 그래요. 진짜 연주하기도 바빠요. 쇼적인 게 스타가 되는 주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잖아요. 그냥 연주를 제대로 하는 것도 사실 하기 힘든데 퍼포먼스, 무대 매너까지 하는 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더라고요.

- 저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하지 않고 연주만 하시는 거 좋았어요.

액션을 짜서 하는 건 못하고요. 연주에 심취해서 흥이 나서 나도 모르게 어떤 액션이 나오는 거야 할 수 있겠죠. 그건 자연스러운 거고. 연주자로서 음악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니까요.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좋다고 봐요. 안무를 짜듯이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관객에서 볼거리를 주는 거니까. 다 그만한 노력을 하는 거니까요.

- 사실 개인적으로 락을 크게 선호했던 게 아니라, 선생님은 제게 유명인 중의 한 명이었는데요. 그러다 2013년 12월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을 위한 공연 기사를 보고 그때부터 제게로 와 꽃이 되셨어요.(웃음) 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어느 날 기타리스트만 출연하는 공연 제의를 받았어요. 기타리스트만 출연하니까 재밌겠다 하고 한 거죠. 이전에 콜트 기타 사건은 알았지만 그 공연을 주최한 콜텍문화재단과의 연관성은 몰랐어요. 공연을 며칠 앞두고 페이스북에 공연 홍보를 했는데, 이 공연은 아닌 거 같다며 댓글이 올라오고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무슨 말이지?' 하고 들어가 보니까 이게 거기였구나를 알게 됐죠. 계약도 했고 포스터도 나왔고 공연은 코앞이고. 저로선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었죠. 그때부터 댓글이 초토화되고 굉장히 욕을 많이 먹었어요. 사실 공연 섭외가 올 때 다 뒷조사를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거기서 공연한다는 게 미안했고, 좀 더 자세히 챙겨 보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죠.

그래서 해고 노동자들을 만나서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이번 공연은 욕을 먹더라도 할 수 없이 해야겠다. 하지만 이후 당신들을 위한 공연을 하겠습니다"라고 사죄를 드렸죠. 이후 공연을 하고 좀 시간이 지난 다음 홍대 극장을 빌려 콜트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을 했죠. 이후에 그쪽에서 초청해 주셔서 또 한번 공연을 했죠.

- 제가 그때 반했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면 안 했을 거예요. 진짜. 그런 실수 아닌 실수를 하게 돼서 그분들을 알게 되고 그분들을 위한 의미 있는 공연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어 그것도 나름 좋은 인연이 된 것 같고.

- 잘 마무리가 되었네요.

네, 잘 마무리된 것 같아요. 안심이 된다 그럴까.(웃음) 나중에 해직 노동자 단식투쟁할 때도 찾아가고 그런 일도 있었고요. 민망하네요. 그런 얘기하려니.

- SNS에서 사회적 발언도 적극적으로 하시고, 사회참여도 많이 하시는 걸로 알아요. 주변에서 말리지 않나요? 득이 될 게 별로 없으실 텐데.

많이 말리죠. 주위에서는. 팬들도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오지랖이 아니냐. 그런데 말을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정권 최고 권력자가 되더라도 그들도 때 되면 다 물러나야 되잖아요. 잠시 갖고 있는 권력인데 자기 걸 남용하고 엉뚱한 짓 하는 걸 그때그때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건 그야말로 비겁하다 생각해요. 사실 반골 기질 때문에 그런 거죠.

- 근데 락은 뭐랄까 뭔가 불만족스러워야 저항 정신, 이런 것들이 포텐 터질 것 같은데 시골살이는 그 감정들을 순화시키는 힘이 있잖아요. 개인적인 삶이 좀 불만족스럽고 그래야 쏟아 낼 게 많을 것 같은데 사는 공간이 김을 빼지는 않나요.

그거하고 무슨 상관 있나요. 저보고 좌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 보수예요. 저 같은 사람이 보수라고 불려야 우리나라 좋은 나라예요.

- 아버지 신중현, 동생 신석철, 신윤철이 다 음악을 하는데요. 가족애를 넘어선 동지애가 있을 것 같아요. 가족들이 모이면 뭐 하시나요. 혹시 잼(즉흥연주)? 직업군이 같으니까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면 음악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연주 안 해요. 그런 거 안 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건 나의 직업일 뿐이에요. 너무나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음악 얘기를 할 리가 없죠. 뭐하는지 뻔히 아니까. 그거에 대한 프로세스를 너무 잘 아니까 서로가 궁금한 점이 없잖아요.

- 대가들이 모이면 뭐할까 상상이 안 되더라요. 고스톱도 치시나요.(웃음)

무대 위 삶과 무대 밑 삶은 달라요. 똑같은 거예요. 연기자가 악역을 연기했다고 진짜 나쁜 사람인 건 아니잖아요. 무대 위와 무대 밑 인생이 다르죠. 무대 밑에서도 똑같이 하는 건 미친 놈이죠.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가끔 구분 못 하는 사람도 있어요. 무대 밑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배고프면 밥먹고, 급할 땐 화장실 가고. 똑같아요. 욕구 충족을 위해 노력하고.

- 1996년 신중현 트리뷰트 공연 전에 하신 KBS 빅쇼 공연을 봤어요.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공연은 부담스럽다"고 하셨더라고요. 저는 그 공연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버지와 연주한다는 거 행복하지 않나요?

행복은 결과로서의 심리적 상태고요. 그걸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않죠.

- 그래도 돌아보면 행복하시죠.

결과가 행복하면 다 행복하게 느껴지죠, 항상. 그렇잖아요. 유명한 시상식에서 대상을 탔다 그럼 그때는 정말 행복하겠지만 그 과정까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었겠어요. 행복이라는 건 정말 결과로서 느끼는 감정이지 행복을 느끼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게 사실이거든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고 담배에 쩔고 머리 쥐어뜯고 이러다가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오면 행복하다 싶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시잖아요. 행복한 순간은 짧고, 고통은 길고. 그래도 행복감을 느꼈을 때 희열은 모든 걸 압도하니까요.

- 인터뷰집 <뛰는 개가 행복하다>(알마)에서 "음악이라는 게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야 하는 걸 하기도 한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말씀하신 걸 보았어요.

최근에 더 많이 느끼는 게 우리는 뭐 하나가 있으면 대세를 따르는 문화가 있다는 거에요. 대세를 안 따르고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약간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쟤는 왜 저래?' 하고 특별화하는 게 있잖아요. 애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어른 사이에서도 그렇고. 생각해 봐야 할 문제죠.

예전에 한 방송사에서 취재를 왔어요. 조용필 선배님이 후배들을 위해 뭔가를 하셨던 거 같아요. 그런데 취재 온 분이 조용필 선배가 후배들을 컨택해서 하려고 하면 그 후배들은 대중적인(그들이 어떤 음악을 하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만들어 보답해야 하지 않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길래 살짝 싸웠어요.

"왜 그래야 하나? 당신 진짜 웃기는 사람이다." 음악을 뭔가 선악의 구도로 몰고 가는 거죠. 선택의 문제인데. 그런데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가령 영화를 예를 들면 저예산 영화도 있지만 보통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면 제작비가 수십 억에서 백 억 넘어가는 것도 많죠. 펀딩받고 투자받아 만들면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스토리와 배우 캐스팅, 히트칠 만한 요소들에 대한 압박과 부담감을 가지게 되겠죠. 하지만 그것도 맞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겠죠. 수단으로 흥행 요소를 끼워넣는 건 감독 몫이겠지만.

음악도 다른 사람 자본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걸 위해서 투자 비용을 다 상계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지는 않아요. 실패한 음악이 많이 만들어지지만, 그거에 부담을 갖기 시작하면 자기 음악을 못 하잖아요.

정말 음악가로서 가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은 그런 욕심이 다 있는데. 그걸 못 하고 흥행이 될 만한 요소들로 가득한 음악으로만 가득 차면 의미 없는 음악들로만 가득 차잖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 출판계도 어려우니까 돈 안 되는 건 안 내던 때, 제가 일했던 출판사에선 사장님이 돈이 안 되는 책도 꼭 내야 하면 내셨어요.

문학에서는 그런 분들이 많은 거 같아요. 음악계에서도 예전에는 그런 분들이 있긴 있었어요. 투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장사 되는 음악을 만들라는 압박이 있죠. 장사 안 되는 음악은 퇴출시키는, 그런 분들이 음악계에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면 의미 있는 음악은 점점 사라지겠죠.

저기 뒤에 보시면 옛날 LP 있잖아요. 수십 년 전 사람들인데 아직까지 음반이 남아 있어요. 의미 있는 뮤지션들이거든요. 요즘 음악 사이클이 너무 빨라 가지고 이틀이면 사라지는 지금의 풍토에서는 저런 걸 만들기 어렵죠. 실제 그래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게. 어떤 자주성을 갖고, 의식을 갖고 음악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생각해요. 돈이 안 되도 세상에 내야 돼, 하는 제작자도 필요하고요. 그런 거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뮤지션들도 필요하죠. 상업적인 걸 배격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렇다고 그것이 대세니 그것만 해야 된다는 건 하는 건 잘못됐다는 거죠. 그것도 하면서 한쪽에서는 의미 있는 걸 만들어야죠.

- 음악 생태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 2014년 8월에 바음협을 만들고 이사장을 맡으셨어요.

굉장히 긴 이야긴데, 음악을 저장하는 매체가 몇 차례 변화가 있었잖아요. 음악을 최초로 저장하기 시작한 건 20세긴데 토마스 에디슨이 레코드를 발견하면서 20세기 이후 음악가들은 음반을 만들게 됐죠. 베토벤이나 그들의 음악을 직접 연주한 걸 못 듣잖아요. 악보가 남아 있지. 그런데 그게 1980~1990년대 씨디로 바뀌었죠. LP, 카세트, 테이프는 1990년대까지 이야기죠. 전세계적으로 음반이 호황이었죠.

그러다 1997년 외환 위기가 오면서 엄청난 시련이 닥쳤죠. 사람들이 어려워지면 취미 생활부터 줄이잖아요. 음반 업계부터 타격이 왔어요. 여러 사건이 맞물렸어요. 그때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 활성화를 위해 인터넷망 사업을 전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세계 최초로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리고. 모든 일에는 항상 명암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타격을 본 게 음반 업계에요. 씨디를 mp3로 변환하는 게 가능해졌죠.

변환한 후 자기만 가지면 상관없는데, 인터넷으로 뿌리죠. 음반 업계가 망했어요. 2000년대 초부터 더 이상 사람들이 음반가게 가서 음반 사는 일이 없어졌죠. 아직도 돈 주고 음악을 사냐?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고 피지컬 음원들이 퇴출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등장한 게 멜론 같은 인터넷에서 음악을 판매하는 사이트들이죠. 2004년 멜론이 나왔고, 그러면서 시장이 완전히 디지털화됐죠. 이미 그 당시에 피지컬 음반 시장 자체가 급격하게 퇴출됐죠.

멜론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내세운 논리가 불법 공유 사이트, 무료 다운로드가 성행하니 저가의 유료 사이트를 만들어서 무료로 이용하던 음지의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내겠다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음반 업계가 다 사인을 했죠. 그러면서 시장이 뒤집혔죠. 그러니까 전부 다 디지털 시장으로 옮겨 오는데 저가 시장이잖아요.

3000원 정도로 모든 음악을 다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처음에 3000원으로 무제한 스트리밍, 무제한 다운로드가 가능했죠. 음악이 지나치게 싼 물건이 되었죠. 그 순간부터 음악을 만들어 지속 가능한 삶이 불가능해졌어요. 그런 세월이 10여 년간 지속되었죠. 그러다 PC에서 모바일로 옮겨 왔죠.

이젠 스마트폰이 컴퓨터죠. 심지어 1969년에 나사가 달에 사람을 보냈을 때 사용했던 컴퓨터 능력의 총량보다 지금의 모바일폰이 더 뛰어나다고 하더라고요. 컴퓨터 단말기를 손에 쥐고 결제도 하고, 검색도 하고 음악도 들을 수 있죠. 너무 간편해지니까, 싼 음악이라는 게 매력적이니까 통신사의 부가서비스 정도가 된 거죠. 예전에는 독립 산업이었는데 지금은 종속 산업이 된 거죠. 가격이 싸니까 가치도 떨어지게 된 거죠.

그렇게 돼서 이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거냐. 대기업들이 하고 있는 그런 것들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지만, 달라지는 게 있냐. 바뀌지 않을 거다 생각하게 됐고. 뭔가 행동으로 나서서 그들이 하지 않는 어떤 걸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된 게 바음협이죠.

- 지금 진행 상황은요.

제가 지금 말씀 드릴 수 있는 게 있고 말씀 드릴 수 없는 게 있어요. 저희가 음악 플랫폼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 했는데, 생각보다 비용도 많이 든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요. 그건 아직 공개를 안 하고 있어요. 간절하게 찾다 보니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는 신기술을 알게 됐고, 이것을 잘 접목하면 새로운 어떤 유통시장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걸 비밀리에 저희가 하고 있는데 그게 뭐다, 말씀 드리긴 어렵고요. 어쨌든 그럼 주위에서 그러죠. "니네 뭐하고 있냐. 2년이 지났는데 왜 결과물이 없냐?" 사실 저희가 유통을 하고는 있어요. 바음협 이름으로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규모가 작아요. 음원 시장의 구조를 너무나 잘 알게 돼서 그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고.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생각에, 굉장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이신데, 바음협 이름으로 하시는 건지요.

바음협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방법에 대해선 진행 중인데, 아직 뭐다 하고 밝히긴 어려워요. 좀 기다려 주시면 내놓을 때 짠~ 하고 한꺼번에 내놓겠습니다. 완제품을 내놓기 전까지는 어설프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되게 급해요.

저도 겁 없이 덤볐지만 어플리케이션 만드는 데 보통 4~5년 걸리더라고요. 개발해서 내놓는 단계까지. 100개 중 3~4개가 나오더라고요. 중간에 엎어지는 것도 많고요. IT가 그런 거더라고요. 처음에 기획하는 단계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실제 개발은 얼마 안 걸리더라고요. 지금 특허를 가진 신기술이 하나 있어요. 그걸 실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깜짝 놀랄 만한 게 있어요.

- 최근 '음악과 라이프 스타일이 융합된 복합 문화 공간' 창동 플랫폼61에서 음악디렉터를 맡으셨던데, 몹시 바쁘시겠어요. 기타 칠 시간도 없으신 거 아닌가요.

크게 별다르게 하는 일은 없어요. 가만 앉아 있으면 돼요. 플랫폼61은 처음 기획 단계부터 같이 참여했고요. 창동에 아레나가 들어가요. 한 2만 석 들어가는 초대형 공연장이 생기는데, 창동 일대에 인구가 굉장히 많아요. 대도시가 하나 있는 거죠. 200~300만이 살고 있는 동넨데 문화시설이 없어요. 문화적으로 소외받던 지역인데 거기 마침 서울시가 가진 유휴지가 있던 거죠.

거기서 뭐를 좀 해보자 했던 게 아레나공연장이고, 문화적으로 소외됐던 지역에 갑자기 2만 명 들어가는 공연장이 생기면 생뚱맞잖아요. 완공 전에 뭔가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해서 첫 번째 만든 게 플랫폼61이에요. 창동역 바로 앞에 있고요. 최근에 공연을 많이 해요. 바음협 사무실도 그리로 이전해서 같은 공간에 있어요. 그 공간을 이용해 조합원 뮤지션들이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 같고요.

- 지역사회 운동에 참여하실 의향은 있으신지.

기회가 되면. 밖에서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제가 주말에 잠깐 집에 있어요. 주말에도 뭘 하면 숨을 잘 못 쉬겠더라고요. 좋은 기회가 있다면 한번.

- 음악인 신대철 말고 인간 신대철로서 이루고픈 꿈, 소소한 소망이 있다면.

개인적인 꿈이요? 글쎄요. 지금 하고 있는 게 개인적인 꿈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 이외 다른 건 잘 생각하면 있겠지만 지금은 바음협을 시작해서 음악 플랫폼 만드는 거 외엔 잘 생각나는 게 없어서.

아 저런 건 있어요. 음악가로서 정말 역사에 남을 만한 음반 한번 만들고 싶다. 교과서가 될 만한 음악 있잖아요. 그런 건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데. 능력이 될지는 모르지만 음악가라면 남겨야겠다. 클래식으로 남을 그런 것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정말 힘들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웃음) 나이가 들면 스타는 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아티스트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잖아요. 젊어서보다 음표 수는 줄어들지만 깊이 있는 뭔가를, 익은 음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그런 거 해 보고 싶어요.

- 장한나가 하버드 철학과에 갔을 때 인터뷰에서 사람이 깊어야 깊이 있는 음악이 나온다는 요지로 말했어요. 선생님도 연주는 경지에 오르셨으니 사람만 깊어지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고요. 지금도 연주를 하려고 노력해요. 계속하면 진보해요. 놓는 순간 퇴보하지 계속하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런 감성이 생기죠. 표현하다 보니 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계속 발견하게 돼요. 그게 쌓이고 쌓이면 내공이고 소울이고 그런 거겠죠.

옛날에 누가 피카소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해서 피카소가 금방 그려 주면서 가격을 비싸게 불렀데요. 금방 그렸는데 뭐가 이리 비싸냐고 물으니 그때 피카소가 내 그림은 30년이 들어가 있다고 했다잖아요. 음악 역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 인터뷰는 제로제 커피하우스에서 진행됐다. (사진 제공 <양평 시민의소리>)

*이 글은 <양평 시민의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이경희 객원기자

소싯적 의상디자이너, 출판기획편집자, NGO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경남 산청 시골 출신이라 서울서 늘 흙을 그리워했다. 5년 전 양평으로 이사해 놀멍쉴멍 글도 쓰고 책도 만들며 남편과 두 딸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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