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백석대학교 김진규 교수가 <백석신학저널>에 실었던 논문을 제목을 바꾸어 기고한 글임을 밝힌다. 히브리어 원문은 폰트가 깨지는 문제로 한글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원출처: 김진규, "이사야 53:4-5은 치병을 위한 대속을 포함하는가?", <백석신학저널> 제22권 (2012.6.1.), 349~361. - 편집자 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4-5)

이사야 53:4-5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가장 잘 예언하고 있는 구약 본문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찔림"과 "상함"은 우리의 "반역"(페솨; "허물," 개역개정)과 "죄악"(아본)을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질고"(홀리)와 "고통"(마크오브; "슬픔," 개역개정)에서의 대속을 포함하고 있는가? 4절에 사용된 "질고"와 "고통"은 영적인 질병, 즉 죄를 지칭하는 비유적인 의미인가? 아니면 육신적인 질병을 지칭하는가? 그리고 5절에 사용된 "나음"(라파)은 어떤 나음을 의미하는가? 영적인 치유인가, 육신적인 치유인가? 아니면 또 다른 차원의 치유도 포함하는 개념인가?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문의 해석에 문제가 된 것은 칼빈이 본문에 나오는 치유를 영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면서이다.1) 과연 본문이 계시하고 있는 치유는 오직 영적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도 포함하고 있는가? 본 소고는 이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사야 52:13-53:12에 나오는 '고난의 종'과 '우리'에 대한 해석

여기에 나오는 3인칭 단수의 "내 종"(아브디) 혹은 "그"(후)와 1인칭 복수의 "우리"(아나흐누)가 누구를 지칭하는가가 본문 해석의 열쇠이다. 이사야 40-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왜냐하면 이사야 40-53장에 나오는 종에 대한 지칭 대상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를, 어떤 경우에는 고레스를 지칭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어떤 경우에는 3인칭 단수의 고난의 종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종에 대한 지칭 대상을 분류한다면 한 개인, 혹은 한 집단, 이상적인 인물, 시기마다 다른 역사적인 해석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2) 고난의 종의 지칭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본 논문의 연구를 넘어간다.

이사야 40:1-52:12에 나오는 고난의 종을 본문에 나오는 고난의 종에게 일괄되게 적용할 수가 없다. 이유는 전술한 대로 이들 본문 안에서 고난의 종에 대한 지칭 대상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내 종"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 자체가 요구하는 조건에 충실히 일치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1) "내 종"은 3인칭 단수 "그"라는 대명사로 받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3인칭 단수가 집단적인 의미로 쓰일 수도 있지만, 현 본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1인칭 복수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가 집단적 의미로 사용된다면 수의 혼동을 피할 수가 없다.

(2) 그는 매우 비천한 출신이어야 하고, 또 사람들의 멸시와 버림을 당한 사람이다(53:2-3).

(3) 그는 대속적인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다. 그의 고난은 특히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속적인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53:4-6, 8, 10, 11, 12). 또 그의 고난은 치유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는 고난이어야 한다. 이런 대속적 고난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무죄한 사람이어야 한다.3)

(4)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허용하심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5) 또 그의 고난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고난이다(53:12;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이러한 조건을 온전히 만족시킬 만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4)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였던 세례 요한이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가? 그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을 당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가? 이스라엘 민족은 먼저 첫 번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를 집단적인 의미로 택한다고 할지라도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고난당한 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고난당하였지,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레스는 어떤가? 고레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무죄한 자가 아니다. 그도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을 당할 수가 없다.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우리"의 지칭 대상을 결정하는 것도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검토해야 올바른 해석에 도달하리라고 본다. 이사야 52:13-53:12에 "우리"가 사용된 구절을 검토해 보자.

(1) 메시지의 전달자(이사야)가 "우리"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5)

(2) "우리"라는 공동체는 고난의 종을 보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또한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53:2-3).

(3) 고난의 종은 "우리"를 위한 대속적 고난을 당하지만, "우리"는 오해하기를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줄로 알고 있다(53:4).6) 고난의 종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속적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평화와 치유를 위해서도 고난을 당한다(53:5).7)

(4)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고난의 종에게 담당시키셨다. 고로 그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다(53:6). Young에 의하면, 여기 "우리"는 이사야 자신을 포함해서 그가 말하는 대상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았다.8)

(5) "우리"는 곧 "내 백성"이라고 정체가 밝혀진다(53:8). 여기서 고난의 종은 "내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 때문에 대속적 고난을 당하였다.9)

위의 구절들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면, "우리"는 이사야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민족적 백성의 차원을 넘어 이사야 자신과 같이 선택된 언약 백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0)

이사야 53:4-5에 등장하는 치병과 관련된 표현들

본 논문을 위해서 이사야 52:13-53:12 전체를 주석한 후에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지면상 그리고 논문의 목적을 살려 이사야 53:4-5에 나오는 치병과 관련된 구절을 중심으로 다루겠다. 사실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위에서 다룬 '고난의 종'과 '우리'에 대한 지칭 대상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다루었다.

이제 위에서 밝힌 지칭 대상을 근거로 본문에 나오는 치병과 관계된 표현을 다루고자 한다. 본문에는 치병과 관계된 표현이 3가지가 등장한다. 4절에 나오는 "질고"(홀리)와 "고통"(마크오브)이라는 말과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우바하부라토 니르파라누)라는 표현이다.

"질고"(홀리; 4절)라는 말의 번역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이사야 53:3-4에 나오는 "홀리"라는 말을 "grief"(슬픔; KJV, RSV, ESV, ASV, NASB)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번역에는 상당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BDB의 정의를 따르더라도 보증받지 못할 번역이다. BDB는 이의 의미를 "질병"(sickness)으로 번역하고 있다.11)

R. K. Harrison에 의하면 여기에 사용된 "홀리"라는 말은 "여러 정도의 질병들을 위한 일반적인 용어"(왕상 17:17; 전 6:2)이고 "잡다한 병"(신 28:59)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12) 이사야 38:9에는 히스기야가 앓은 질병을 가리킬 때, 이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었고, 이사야 1:5에는 "온 머리는 병들었고"(콜 로쉬 라홀리)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이 두 경우를 보면 문자적인 질병을 의미한다. 이사야 53:3에도 "홀리"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한글 개역개정판에는 4절과 같이 모두 "질고"(홀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문자적인 질병을 의미한다.

해리슨은 이의 문자적인 의미인 "질병"이란 뜻에 기초해서 고난의 종이 이스라엘을 위한 구속 사역의 일환으로 이와 같은 질병을 짊어지게 되는 것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이 고난의 종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힘으로써, 그의 대속사역이 죄악된 인간의 상태뿐만 아니라 질병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3) 마태복음 8장 1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치병사역의 맥락에서,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14)

그리스도의 치병 사역의 근거는 그 자신이 우리의 ‘질병’을 지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치병 사역은 그의 대속적 치병에 근거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해리슨 이전에 델리취도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델리취는 본 절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한 중보가 우리의 죄를 속할 때의 중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15) 즉 그리스도의 대속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고난의 종은 우리의 고난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우리가 져야 할 고난을 지셨다. 그는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우리의 질고와 고통을 가져가셨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몸에 이를 지셨다.16) 이는 분명히 질병 치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통"(마크오브; 4절)이란 말의 번역

BDB는 "마크오브"를 육체적, 정신적 고통(physical, mental pain)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17) T. E. Fretheim에 의하면 이 단어에 대한 번역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고통"(pain)이란 뜻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고, 때로는 좀 더 추상적인 "고난"(suffering)이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상처"(wound) 혹은 "질병"(diseases)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는 문맥이 고통을 야기한 요소를 명시하는 경우이다.18) NRSV는 이에 맞추어 "마크오브"를 "diseases"(질병들)로 번역하고 있으나, 대부분 다른 영역본들(KJV, ASV, ESV, RSV, NIV, NJB, NASB)은 "sorrows"(슬픔들)로 번역하고 있다. 후자의 번역은 BDB나 NIDOTTE 등 권위 있는 사전들이 전혀 보증하지 않는 번역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사야 53:4에 사용된 "마크오브"는 “고통”(pain)이라는 번역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보이고, 아니면 (NRSV가 번역하고 있듯이) "질병"(diseases)이라는 의미로 번역해도 무난하다고 생각한다.19)

여기서 이사야는 "마크오브"를 "홀리"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우리의 질병뿐만 아니라 질병과 함께 수반되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까지 함께 대속하실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질병은 질병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함께 따르기 때문에 이 양자를 함께 대속할 때, 그리스도의 질병에 대한 대속 사역은 온전한 대속이 될 수 있다.

델리취가 위에서 잘 관측했듯이, 이사야 53:4에서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죄에 대한 문제(이는 5절에서 다룸)가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고통(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병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20) 이 해석은 다음 구절을 이해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우바하부라토 니르파라누; 5절)의 해석21)

이사야 53:5는 고난의 종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속적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가장 명백히 밝힌 구절 중에 하나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22)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23)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개역개정판).

본 절은 고난의 종이 죽음에 이르도록 파괴를 경험하며 죽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반역죄와 죄악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24)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반역과 죄악을 위한 대속적 고난임을 명백히 예언한 말씀이다.25) 그리스도가 징계를 받은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대속적 징계임을 또한 밝히고 있다.

여기에 암시하고 있는 바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평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26) 그런데 그리스도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 깨어진 평화가 회복되었다.27) 그의 징계도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대속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은 것도 우리의 나음을 위한 대속적인 채찍 맞음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이 여기서 연구의 초점이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어는 "나음"(라파)이라는 말이다. 이 나음이 육신적인 나음인가, 아니면 영적인 나음을 의미하는가가 관건이다. 성경에서 "라파"라는 말을 문자적인 치유와 비유적/영적인 치유를 위해서 모두 사용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 “라파”는 문자적 치유와 영적인 치유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치유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선지서에서 선지자의 희망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전인적인 치유를 표현하고 있다.28)

M. L. Brown은 이사야 53:4-5가 "라파"를 전인적 치유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구절로 예를 들고 있다.29) 이사야 53:5의 히브리어 원문은 2가지 개념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30) J. A. Motyer도 이 구절에서 이사야가 메시야 시대의 표지인 충만함과 완전함을 회복하는 전인의 치유를 뜻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치유'(healing)를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31)

그런데 이를 영적인 치유로만 국한시킨 것은 문제가 있는 해석이다. 특히 성경의 점진적 계시를 따라, 이의 의미가 신약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서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한 것은 5절의 '치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마태복음 8장 17절은 이사야 53장 4절에 나오는 '질고'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태복음 8:14-17에서 다루는 주제는 영적인 질병(즉, 죄 문제)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질병들이다.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근거가 바로 그 자신이 이런 질병들을 짊어지신 대속적 사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병을 고치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다("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이를 종합하면, 이사야 53장 5절에 나오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표현을 우리의 영적인 질병(반역과 죄악)과 심리적인 질병(평화의 상실)과 아울러 우리의 육신적인 질병(질고와 고통)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최선의 해석일 것이다.

후자 2가지를 빼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죄만을 지셨다고 영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본문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평화의 회복과 육신의 질병의 치유를 배제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죄 문제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로 따라오는 평화의 상실과 질병의 문제까지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인 대속 사역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병 사역 때문에 현대 의술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현대의술은 하나님의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주신 귀한 선물이기에 사용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의술이 발달해도 아직 고치지 못하는 질병이 대부분이다. 현대 의술로 완치할 수 있는 질병은 2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 의술이 고치지 못하는 암과 같은 질병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유의 능력으로 고쳐진 수많은 사례가 있다.32) 하나의 중요한 예를 들면, 나겸일 목사의 간증을 참고하라.33)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은 영적, 정신적, 육신적 구속을 포괄하는 사역이었다

이사야 53:4-5에 나오는 치유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 데는 먼저 칼빈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그 다음에 많은 영역본들이 본문에 나오는 치유와 관계된 표현들을 영적/비유적인 의미로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질고"(홀리; 4절)라는 말과 "고통"(마크오브; 4절)이라는 말을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grief"와 "sorrows"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히브리어 사전의 정의에서도 보증될 수 없는 번역들이다. 4절의 질고와 고통은 문자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된 고통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실 마태복음 8장 17절이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3가지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찔림과 상함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둘째, 그리스도의 징계 받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의 채찍 맞음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었다.

본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질고"(홀리)와 "고통"(마크오브)을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적 치병 사역을 행하실 것을 가장 분명히 예언한 본문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5절에 사용된 "나음"(라파)은 우리의 영적인 치유(죄의 용서)와 관계적인 치유(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회복)와 육신적인 치유(질병에서의 치유)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본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은 이 3가지를 포괄하는 3중적인 대속이다. 본문에 나오는 치유의 메시지는 우리의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반드시 사용해야 할 그리스도의 대속적 치병 사역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복음은 영혼 구원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깨어진 관계 회복의 메시지요, 치병의 메시지이다.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각주

1) J. Calvin, Isaiah 33-66 (trans. W. Pringle; Calvin's Commentaries, vol. 8; Grand Rapids: Baker Books, 2005), 115.

2) R. K. Harrison, "Servant of the Lord," ISBE 4:421~423.

3) F. Delitzsch, Isaiah, (trans. J. Martin; C. F. Keil &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7; Peabody, Ma: Hendrickson, 1996), 507~510; E. J. Young, The Book of Isaiah, vol. 3: Chapters 40-66 (Grand Rapids: Eerdmans, 1993), 345~349.

4) Young, Isaiah, vol. 3, 348.

5) 이사야 53장 1절에 나오는 "숴무아테누"를 주로 2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우리가 들은 메시지"로 보는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포한 메시지"라는 견해이다. RSV는 전자의 해석을 따라 번역("Who has believed what we have heard?")하고 있고, ESV는 후자를 따라 번역("Who has believed what they heard from us?")하고 있다. 루터와 영과 개역개정판 성경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 이것이 문맥과도 더 잘 어울린다. 영은 신약도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요 12:38; 롬 10:16). Young, Isaiah, vol. 3, 340.

6) Young, Isaiah, vol. 3, 345~346.

7) 여기에 암시하고 있는 바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평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속적 징계가 있어야 하다는 뜻이다. Young, Isaiah, vol. 3, 349.

8) Young, Isaiah, vol. 3, 350. 그러나 이 표현에서 "보편적 대속의 교리"("a doctrine of universal atonement")를 도출하는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9) Young, Isaiah, vol. 3, 352.

10) 신약의 완성된 관점에서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새 이스라엘 백성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갈 3:7). 그리스도의 대속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구속 사역이기 때문이다.

11) F. Brown, et al., "홀리", The New Brown-Driver-Briggs-Gesenius Hebrew and English Lexicon with an Appendix Containing the Biblical Aramaic (Peabody, MA: Hendrickson, 1979), 318. 단지 NIV, NJB는 "suffering"(고난)으로 번역하고 있고, NRSV는 "infirmity"(허약, 질병)로 번역하고 있다. NIV와 NJB의 번역도 원문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고, 단지 NRSV는 질병으로 번역될 수 있는 문을 열어 두었다.

12) R. K. Harrison, "khlh," NIDOTTE 2:140-143.

13) Ibid.

14) Young, Isaiah, vol. 3, 345. 영은 이사야 53:4의 질고가 죄 자체를 위한 비유적 표현이긴 하지만, 마태복음 8:17의 관점에서 이는 또한 죄의 결과 즉 질병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질병은 죄와 분리할 수 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15) Delitzsch, Isaiah, 508. 델리취는 여기서 마태복음 8:17을 인용하고 있다.

16) Ibid.

17) Brown, "홀리," 456 (#4341).

18) T. E. Fretheim, "k’b," NIDOTTE 2:575~576.

19) 한글의 경우에 수적인 개념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diseases를 '질병'이라고 번역해도 무난하다고 본다.

20) Delitzsch, Isaiah, 508.

21) Young에 의하면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비인칭적이기 때문에 원문의 의미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에게 치료가 있다"("and by his stripes there is healing to us.") 혹은 "치료가 우리에게 주어졌다"("healing was imparted to us.")는 뜻이다. Young, Isaiah, vol. 3, 349.

22) 여기에 "찔림"이란 말을 위해 사용된 원문(머홀랄)은 "죽음에 이르도록 찌르는 것"을 의미한다. Delitzsch, Isaiah, 509; Young, Isaiah, vol. 3, 347. 본 절에 나오는 개역개정판의 "허물"이란 번역은 좀 약한 번역이다. 원문(페솨)의 뜻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rebellion")을 주로 의미한다(NJB). 많은 영역본들은 "transgressions"([종교적인] 죄)로 번역하고 있다(KJV, ASB, NASB, RSV, NRSV, ESV, NIV). 여기서 죄는 인간에게 범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후자의 번역도 타당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Young, Isaiah, vol. 3, 347.

23) 여기에 "상함"이란 말의 원문(머두카)의 뜻은 "관계된 사람의 완전한 파괴"("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person involved")를 암시한다. Young, Isaiah, vol. 3, 347.

24) Ibid., 348.

25) Delitzsch, Isaiah, 509.

26) 여기에 사용된 "평화"라는 말은 단순한 우리의 "웰빙"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인간과 유지하고 있는 평화"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리라. Young, Isaiah, vol. 3, 348~349.

27) 여기에 수반된 아이디어는 "회복시키는 징계"("restoring chastisement")이다. Delitzsch, Isaiah, 510.

28) M. L. Brown, et al., "rp’," NIDOTTE 1162~1173(특히 1166쪽을 보라).

29) Ibid., 1166.

30) Ibid.

31) 이는 Brown의 글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Brown, "rp’," 1166.

32) 1996년 6월 24일에 발간된 TIME지에 '믿음과 치유'(Faith & Healing)란 기사가 실렸다. 이 글에 현대 의술에서 믿음과 치유, 기도와 치유가 과연 상관관계가 있는가를 실험한 내용이 실렸다. 그간 여러 실험 결과들을 소개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하버드 의과대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의 연구결과 병자를 위해서 기도한 그룹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치료의 효과 면에서 거의 3배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현대 의술이 믿음을 통한 치유의 능력을 입증한 셈이다.

33) 나겸일, <생명을 건 목회 이야기> (서울: 두란노, 2003), 13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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