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돼지 파문"

최근 한동안 교육부의 한 기획관의 발언으로 나라 전체가 들끓었습니다. '민중은 개, 돼지다.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1%가 되고자 노력 중이다. 구의역에서 죽은 젊은이를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할 수 있느냐, 그것은 위선이다.'라는 것이 발언의 요지입니다. 처음에는 농담이 아니라고 당당하던 그가 국민이, 아니 민중이 들끓고, 국회에까지 불려가자 취중 실언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렀음에도 결국은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사고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민중은 개. 돼지가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신분제가 고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1%와 99%로 사회가 구분되어서도 안 되고, 그 1%가 되고자 과도한 경쟁이 이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불쌍하게 죽은 젊은이를 보고 자기 자식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 정말 개, 돼지입니다(개, 돼지님 미안합니다. 문맥상 할 수 없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나 기획관의 발언은 틀림이 없습니다. 실제로 국민은 선거철에나 존중을 받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무시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무시당하는 민중을 개, 돼지라고 표현한 것이 과연 틀린 표현이었을까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의 사람들이 자신이 개, 돼지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사실 우리 사회에는 개, 돼지만도 못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애견과 관련된 여러 사업들을 바라볼 때면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물론 더 많은 유기견들이나 길거리 동물들도 있습니다만).

오래 전 영국 여왕이 방문했을 때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녀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교통통제를 보고 "한국 국민들은 이해심이 많은가 봅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이나 장관과 같은 사람들이 움직일 때는 교통순경이 깔리고 교통통제가 이루어집니다. 바뀌지 않는 신호등을 보고 교통경찰들에게 항의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꼭두각시처럼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 국민들은, 아니 민중은 사실상 개, 돼지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위대한 국무총리께서 기차를 타시기 위해 역 플랫폼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신 것이 보도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보도되어 문제를 삼을만큼 우리 사회가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 기회관의 민중은 개, 돼지라는 말은 그가 실제로 보고 경험하는 매우 실증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말 역시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한 것이고, 공직자로서 그는 사회의 질서를 공고히 한다는 측면에서 능히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신분제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 1등석이나 비즈니스석 승객이 줄을 안 서는 것에 항의하는 이코노미석 승객은 없습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도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백화점이나 은행을 가도 VVIP 고객은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발레파킹은 기본이고, 고급 커피를 공짜로 대접 받고, 그 외에도  VVIP에게만 제공되는 혜택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는 사람의 눈에 일반 고객들이 개, 돼지처럼 보이는 것도 나무랄 수 없을 것입니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니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까지 일반 고객들을 대하는 태도가 허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기획관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서 신분제는 더더욱 공고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분제는 일종의 암묵적인 사회질서가 되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것은 질서를 지키는 애국적인 행위라고 말해도 그다지 지나치지 않은 것이 실제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단 고위 공직자들이나 상류층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 개 돼지에 해당하는 민중들도 역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합니다. 일반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청조망을 설치하는 일 역시 똑같은 현상입니다. 자기 집 근처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일반 학생들의 학교에 장애인 센터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이처럼 신분제가 공고해지고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신분간의 통로가 막혔다는 사실입니다. 70년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대학생들이 가르치던 여학생과 결혼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을 다니는 가난한 대학생과 부자집 여학생이 연애를 다 하고, 심지어 결혼까지 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때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속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금수저, 흑수저 이야기는 단순히 약자들의 넋두리가 아니라 실제 우리 사회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 기획관이 참 억울할 것 같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정말 억울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가 그렇고,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단지 그것을 말로 표현했다고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받는 것은 지나치다 못해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1%가 되고 싶었던 자신이 파면 당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실언 때문이 아니라 그가 1%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진짜 1%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국민이 분노로 들끓고 여론이 뭇매를 가해도 잠시 자중하며 물러서는 척 제스처만 취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파면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파면을 당한 이유는 그가 진짜 1%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 기획관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파면을 당했지만 1%가 되려는 그의 열정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문명의 정상성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 기획관의 발언과 오늘날 그의 발언대로인 우리의 현실은 비단 한국만의 병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이 사는 사회는 언제나 신분제가 있었고 1% 혹은 그 비슷한 정도의 특권을 가진 권력 계층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탈의 대상이 되거나 손쉽게 희생양이 되는 구조였습니다. 그것은 부족사회로부터 군주제도, 봉건제도, 민주주의, 공산주의 체제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세상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그것을 '문명의 정상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바로 그 '문명의 정상성'에 대한 대안으로서 세상에 주어진 것입니다. 으뜸이 되려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하는 제자들의 사회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한 혁명적인 힘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이며, 세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소금의 맛을 잃고 빛을 잃어버렸다면 그 교회는 하등의 존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사람대접을 분에 넘치게 받아 누리는 곳이 교회라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물었던 '지금은 정말 교회를 떠나야 할 때(원제:보고 싶은 교회)'라는 제 글을 읽고, 어떤 분이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번호를 매겨가며 다섯 개의 반박문을 제시했는데 그중 두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3. 교회를 떠나면 교회밖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굽신거리나요? 마치 공산주의 국가를 찬동하는 것 같은 글을 쓴 것에 창피함을 느끼십시오. 교회 밖에서도 냄새나는 걸인분들도, 천대받는 무리들도 분에 넘치는 사람대접을 받지는 못합니다.

4. 아마 글을 쓴분도 가난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난을 창피해 하십시오. 가난이 정의의 무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냄새나는 걸인분들도, 천대받는 무리들도 분에 넘치는 사람대접을 받는 교회는 현실적으로 극히 드물 겁니다.

이런 표현을 해서 송구스럽지만 이분은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과 그러한 사고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 안에 이분과 같은 사고를 가진 분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분들은 댓글에서 보듯이 조금만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도, 아니 가난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용공'이니 '빨갱이'니 해가며 '좌빨'이라는 정죄를 공식처럼 습관적으로 내립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문명의 정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창피함을 느끼라는, 긍휼이란 찾아볼 수 없는 이분의 주장에서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이런 분들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분들의 말대로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신분제도는 사회의 신분제도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공고하고 철저합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신학교를 가야하고, 장로가 되기 위해 가식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아예 자신의 생각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교단의 증경총회장이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에서 일하던 30 초반의 전도사가 하던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들은 나이가 많은 장로라도 유치원생 취급을 해야 한다면서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화장실에 함께 들어가지 말 것, 같이 목욕하지 말 것, 같이 운동하지 말 것, 이 세 가지를 신신당부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의 신분제도는 사회의 신분제도보다 더 엄격합니다. 거룩하기까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에게 욕하면 죽는다는 말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부록입니다. 한 마디로 목사나 목사가 되려는 자들은 성도를 개, 돼지 취급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가 그러니 장로인들 다르겠습니까? 장로석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이요, 무게를 잡고 권위를 내세우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 저는 오래도록 성가대를 지휘하였습니다. 전도사 시절에도 성가대를 지휘하였는데, 칸타타를 할 때마다 찾아오는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찾아와 그동안 연습하느라 수고했다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는 칸타타의 노래가 몇 개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노래를 줄여 시간을 단축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나의 이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줄일 수가 없다고 하면, 교회 성도들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줄여도 모른다고 하며 막무가내로 작품을 단축하라고 요구하곤 했습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그분이 자신이 장로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과시하는 것입니다.

1%와 99%의 대조는 교회에서 가장 현저합니다. 1%에 속하는 목사들은 대통령의 권한 못지 않은 권력을 가집니다. 사회에서 한다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각종 불의를 저질러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횡령이나 성범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하나님을 들먹이고, 성경 말씀을 들먹이며 자신의 죄를 인정조차 하지 않고 능히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버티며 은퇴 시기가 오면, 은퇴를 안 하려고 교단을 탈퇴하거나 자신의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세습합니다. 사회에서도 지탄을 받는 일이 기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고. 이제는 그런 일이 일상이 되어 그다지 심각한 일조차 아닌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문명의 정상성은 사회가 아니라 교회에서 찾아야 하는 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 안에는 그 1%가 되려는 목회자 후보자들로 넘쳐나고, 아버지가 큰 교회 목사인 성골과, 그보다 조금 못한 진골, 그리고 아무런 연줄도 없는 육두품이라는 자조가 회자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십여 년 고시 공부를 하다 신대원에 입학한 같은 반 전도사가 신학생들의 성공에의 의지는 고시생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할 말이 너무도 많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시천주(侍天主)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다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지식산업사, 1998)에는 어느 동학교도 여인네의 신앙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참봉댁 며느리 은애의 이야기입니다.

논일을 하노라면, 실겅이네는 맨발로 자갈길을 걷느라고 발바닥이 온통 구덕살이 박히고, 손은 물에 젖어 퉁퉁 불었으며, 얼굴은 뙤약볕에 그을러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해질녘이면 시커멓게 주름이 졌다. 이런 상황에서 참봉댁 며느리 은애가 실겅이네 식구들을 불쌍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시집 올 때 친정 오라비가 챙겨 준 <용담유사>라는 동학 책을 새삼 꺼내 읽으면서부터였다.

은애는 밤낮으로 틈만 나면 주문을 외웠다.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주문을 외우는 동안에 은애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춘분이 몫의 일을 줄여 주고 힘든 일 궂은일을 스스로 해 나갔다. 은애가 뒤안으로 물을 길러 가자 춘분이가 황급히 붙잡는다.

"작은 마님, 안 되니더."
"괜찮다. 춘분이는 하루종일 물을 퍼 나르잖애."
"하제만 작은 마님은 힘든 일 못하시잖니껴."
"왜 못하네. 나도 힘든 일 배워야제."

은애는 억지로 물동이를 이고 갔다. 그 뒤로 '마님'이라 부르지 말고 '형님'이라 부르라 했다. 놀라는 춘분에게 "이 세상은 상전도 머슴도 없고 모두 형제간이네." 하였다. 여덟 폭 스란치마를 다섯 폭으로 줄여 통치마를 만들어 실겅이네처럼 검정물을 들여 입었다. 곳간에서 쌀을 퍼내 실겅이네 잡곡과 바꿔다 보리밥 조밥을 먹었다. 은애는 망설이지 않았다. 좁은 집안 울타리 안이지만 은애는 그렇게 스스로 하늘이 되어 갔다.

'시천주'는 동학의 근본사상으로 천주를 내재적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자는 놀라운 힘을 낼 수 있고, 인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시천주 사상입니다. 시천주 사상은 기독교 교리와도 매우 흡사합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 변화를 동학도가 된 참봉댁 며느리 은애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가요?
그리스도처럼 살고 있는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요?
점점 더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는지요?
그들의 긍휼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지요?

안타깝지만 그런 변화를 볼 수 없습니다. 참봉댁 며느리 은애는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라는 주문만을 외우고도 양반과 상놈이라는 그 시대의 엄연한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형제와 자매처럼 살았습니다. !%가 되려고, 더 높아지려고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문명의 정상성을 넘어섰습니다. 개, 돼지 같은 종놈들에게 사람대접을 하였습니다. 종들의 삶에서 아픔을 느끼고 자신도 그들의 삶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녀는 놀라운 힘을 내며 변화되었습니다. 그녀가 모시고 있는 천주님을 닮아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이 될까요? …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문명의 정상성'을 넘어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고 달라졌다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개, 돼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 돼지처럼 살아가는 이웃들을 보고 자신도 기꺼이 개, 돼지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1%에 속했다면 그것을 부담스러워하고, 99%에 속했다면 자신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문명의 정상성'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이 빛임을 온 천하에 드러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나 기획관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하게 하신 것은 아닐까요?

이제부터라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봉댁 며느리 은애처럼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님'들이 새로운 성령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계신 주님과 희망으로 작동하는 복음을 자신들의 변화된 삶으로 보여주었으면 정말, 정말 좋겠습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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