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의 아이> /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 홍종락 옮김 / IVP 펴냄 / 544쪽 / 2만 5,000원

인생은 의외로 아름답다, 하우어워스식으로1)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C. S. 루이스의 삶을 다룬 <섀도우랜드>(Shadowlands, 1993)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피터라는 학생은 수업 시간에는 졸지만, 밤을 새워 가며 훔친 책을 읽는 특이한 인물이다. 피터의 이중생활을 눈치챈 루이스는 그의 기숙사 방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피터의 아버지가 교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루이스는 그에게 평소에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이 있냐고 물어본다. 피터는 아버지의 '명언'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We read to know we’re not alone).

홀로 있지 않음을 알고자 책을 읽는다면, 글을 쓰는 것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만큼 작가로서 이 과업을 충실히 해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미국에서 출간된 지 약 6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회고록 <한나의 아이>(Hannah’s Child)2)는 한 명의 인간이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아름답고 섬세하게 풀어낸 특별한 책이다.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든 한 신학자가 가식 없이 들려주는 자전적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낯설면서도 나를 잘 아는 듯한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자기 성찰과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애가 없다면 불가능할뿐더러, 스스로를 미화하려는 욕망과 제대로 한판 싸움을 벌여야만 한다. 이러한 미묘한 위험 속에서 잘못하면 자서전이 팩션 소설과 구분이 잘 안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서전을 읽고서 그 사람이 왠지 싫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신학자가 자서전을 쓴다면 어떨까? 정말 잘해 봐야 본전이 아닐까?

하우어워스만큼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신학자도 많지 않다. 그는 2001년 <타임> 매거진에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소개되었고, 스코틀랜드의 기포드 강연자로 선정된 몇 안 되는 북미 학자 중 한 명이며, 미국의 유명한 TV 프로그램인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청될 정도로 대중적 지명도도 있다.

국내에도 그가 썼거나 공저한 작품 중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IVP),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십계명>,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이상 복있는사람), <십자가 위의 예수>(새물결플러스), <교회 됨>(북코리아)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한나의 아이>는 그의 저서 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책은 하우어워스에게 비치는 화려한 조명을 뒤로하고, 텍사스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서 세계적 신학자가 된 지금까지 그가 겪어 왔던 기쁨과 슬픔, 성취와 좌절, 만남과 헤어짐을 솔직하고 생생하게 그려 냈다.

케임브리지의 신학자 세라 코클리는 <한나의 아이> 추천사를 쓰며 "이 매혹적인 회고록은 (중략)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전통을 당당하게 잇는다"라고 평했다. 하우어워스는 자신을 위대한 교부와 견줄 수 없다고 겸손히 말했지만, 그러한 과장된 칭찬이 싫지 않은 듯 코클리의 평을 대중에게 웃으며 소개한다.

코클리의 말이 한 귀로 흘려보내도 될 주례사 같은 추천사가 아닌 이유가, 이 책은 한 인간이 겪었던 실패와 성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이러한 인생의 굴곡을 신학적 성찰의 재료로 삼기에 <고백록>과 유사한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을 신학의 텍스트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신학에서 삶의 우선성

<한나의 아이>에는 많은 신학자가 언급하기 불편해하는 '삶'이라는 주제가 중심에 위치한다. 인생은 복잡하고 생동적이므로, 추상적 이론이나 경직된 교리 체계로 정형화하거나 재단하는 것에 저항한다. 그렇기에 신학은 기존 연구 결과를 잘 버무려서 매끈한 설명의 틀을 주조하는 학문으로 머물 수 없다.

오히려 신학은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의미 있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우는 끝없는 과정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학습하는 지속적 노력을 통해 삶에 더욱 충실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하우어워스의 말을 들어 보자.

"신학의 핵심이 어떻게 하나님인 동시에 인생의 복잡성이 될 수 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일부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발언'과 '인생의 복잡성'을 분리하려 시도했고, 그 결과 그들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정말 필요한지 불분명해진다. (중략) '하나님'을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만 좋은 일이다. 그 일에 필요한 훈련을 하다 보면 세상의 실상에 대해 자신에게 진실할 수밖에 없어지기 때문이다." (424~425쪽)

삶과 유리된 신학은 어쩔 수 없이 공허해지지만, 하나님에 대한 담론 없이 인생은 쉽게 허무해진다. 그런데 삶을 신학의 텍스트로 삼는 것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아무래도 삶에 우선성을 두는 이론을 형성하기가 방법론적으로 힘들고, 인생의 유동성과 복잡성을 담아낼 언어를 찾기도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삶이 우리를 기만하더라도 우리는 삶을 배신할 수 없다는 불평등한 구조 속에 살고 있기에, 신학이 추상화의 방어막 뒤에 안전하게 숨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점잖게 신학을 하려고 해도 신학자는 삶의 부조리함과 고통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무시하고 신학자에게 인생의 답을 찾아 줄 것을 기대하고, 때로는 답을 대량생산해 내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신앙이 드러내 주는 삶의 신비

<한나의 아이>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와 살면서 겪어야 했던 한 남자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아내로부터 받았던 '고통'과 가정을 유지하려는 '책임감'을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유의미한 맥락으로 삼고자 하우어워스는 끈질기게 노력하고 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건만, 오히려 하우어워스는 조울증에 시달리던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았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홀로 살아가던 전처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전화를 받게 되고,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녀가 (심장 질환으로) 텅 빈 집에서 죽은 지 여러 날 뒤에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그녀의 삶과 죽음이 던져 놓은 쉽지 않은 질문들 앞에서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통찰은 가슴 아플 정도로 예민해진다. 삶의 역설을 가식 없이 설명하려는 그의 언어는 자칫 와르르 깨질 것만 같이 투명해진다.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중략)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375쪽)

만약 하우어워스가 고통에 대한 신학적 이론, 즉 신정론(theodicy)을 통해 어떻게든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고, 이론을 가지고 하나님이든 자신이든 변호하려 했다면, 이 책의 매력은 급격히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조리함을 벗어날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도 인생을 담담하게 긍정함으로써, 현실의 고뇌와 비극적 환희가 공존하는 인간 됨의 의미를 배워 가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었다.

물론 <한나의 아이>를 읽다 보면 '대단한' 신학자인 하우어워스가 곳곳에서 어떤 책을 탐독했으며 누구와 공부했는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입이 떡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대 서구 신학의 좋은 지형도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과 회한의 갈등, 열정과 부조리의 대립으로 삶의 표면에 끊임없는 파문이 일고 있기 때문인지, 하우어워스의 지적 수다는 고요한 호수에 스스로를 비춰 보고 빠져들던 나르시스의 자기 숭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하우어워스의 자기 성찰은, 모호한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담백하면서 다채롭게 펼쳐 보이는 프리즘 역할을 한다.

그래서인지 <한나의 아이>를 읽고 나면 당면한 실존적 문제에 해답이 없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잉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또 하우어워스의 솔직하고 아름다운 고백 덕분에, 비록 지금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더라도 인생이 외롭거나 고단하지만은 않다는 위안도 받게 된다.

김진혁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조교수

각주

1) 이 제목은 러시아의 연출가 카마 긴카스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삼부작에 붙인 부제인 '인생은 아름답다. 체호프식으로'를 변형한 것이다.

2) 왜 책 제목이 '한나의 아이'인지 아마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이다. 구약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듯,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하우어워스의 어머니도 기도 후에 그를 임신했기 때문에 정해진 제목이다. 그런데 하우어워스의 어머니는 한나의 기도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특히 나실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모르는 상태로 서원을 했다. 한 신학자의 이와 같은 '탄생의 비밀'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잘 보여 준다.

하우어워스라는 한 인간이 태어나고, 신앙인으로 자라나고, 신학자가 되었던 이면에는, 정확한 성경 지식이나 세련된 이론이나 잘 짜인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생 속에서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배워 가며, 그분과 동행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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