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관련 글을 접하면서, 심도 있는 토론에 필요할 것 같아 '예배'를 주제로, 다음 네 개의 글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 필자 주

1. 주일예배는 목회자 영성과 자질 드러나는 시간
2. 예배 의식의 내연적인 의미
3. 교회와 예배
4. 예배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필자는 예배 순서의 신학적인 의미, 성례, 교회와 예배의 관계, 교회 공예배의 필요성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중심 주제로 다뤄진 예배란 도대체 무엇일까? 간단하긴 해도 긴 대답을 요하는 질문이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언급한 내용을 이곳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배의 본질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는 크게 네 방향에서 이뤄진다. 로마서에 나오는 '거룩한 산 제물'의 의미를 밝히면서, 어원적인 맥락에서,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영과 진리로'란 표현을 이해하면서 예배의 본질을 탐색한다. '거룩한 산 제물'에 관해선 앞의 글에서 다뤘기 때문에 여기서는 나머지 세 개만 살펴보겠다.

예배에 대한 어원론적 이해

구약에서 '예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히브리어는 '샤아하(ההשׁ)'와 '아바다(עבד)'이다. 이 말은 70인역 헬라어로 각각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와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로 번역되었다. 현대어로는 워십(worship)과 서비스(service)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들은 예배 대상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반영한다. 성도가 하나님께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 암시한다. 특히 worship은 본래 앵글로색슨어 'weorthscipe'에서 유래했다. 가치(worth)와 신분(ship)을 의미하는 말의 합성어다. 곧, worship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에게 최고의 예를 보이는 일을 말한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시29:2, 계5:12)과 일치한다.

어원적인 맥락에서 예배는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종교는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에게 최상의 예를 갖추는 태도를 요구하며, 그런 태도로부터 예상되는 삶의 열매까지 포함한다. 어원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주로 인간의 태도에 집중한다. 예배의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하나님이 베푸는 은혜의 시간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인간의 행위에 집중한다면 복음의 정신에 어긋난다.

예배의 역사와 예배 의식

예배의 역사와 예배 의식으로 예배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예배의 시대적인 변천 과정을 통해 예배의 본질과 의미를 알아내고, 예배 의식 변화를 관찰하여 예배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를 찾아내려 한다. 예배 의식은 단번에 형성되지 않았다. 역사로 형성된 구성물이다.

예배에는 본질적인 부분이 있고 가변적인 부분이 있다. 예배의 역사를 통해 예배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흐름에서도 변화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역사적인 관점은 분별력을 필요로 한다. 현상으로서 역사는 본질의 드러남과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현상들을 모두 옳다고 볼 수 없으며, 분별에는 무엇보다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가 전제된다.

다시 말해 예배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본질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면 비판을 받았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기도 했지만 시대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지되기도 했다. 과거에 예전으로 행해졌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예배의 역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예배 의식의 형성과 변화 과정이며, 예전을 강조하는 정도가 시대마다 달랐다는 사실뿐이다.

제사 중심의 예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예전으로, 초대교회의 말씀과 성만찬 중심 예전에서 가톨릭의 성례 중심 예전으로, 종교개혁 이후 말씀 중심의 예전으로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WCC 산하 '신앙과 직제 위원회(Faith and Oder Commission)'가 [BEM(Baptism, Eucharist, Ministry)라고도 이름 짓는] 리마(Rima) 문서 채택한 이후 예전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다. 말씀과 예전 중심 예배로 변화해 가는 추이에 있다.

김경열의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플러스)은 현대인의 신앙 및 예배가 구약 제사 전통과 밀접한 연관 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구약의 제사와 경건한 신앙의 관계는 물론이고 예배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참고로 제사 전통에서 예배를 추론하는 경우, 제사 행위 자체보다는 제사의 정신에 주목한다. 제사에는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번제 등이 있다. 번제는 제물을 남김없이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다. 근본적으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이지만,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이기도 하다.

번제는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제물의 종류가 구분되었는데, 헌신을 평가하는 정도가 재산에 따라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소를 태워 드리는 번제, 양이나 염소를 태워 드리는 번제, 비둘기를 태워 드리는 번제 등이 있다.

소제는 곡물, 특히 고운 밀가루를 드리는 제사인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와 친교를 구하지만, 이웃과의 화해와 친교를 구하기도 하는 제사이다. 속죄제는 계명을 어겼을 때, 특히 부지중에 어겼을 때 죄의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속건제는 이웃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그렇다고 제사만 드리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반드시 보상해야 했다.

예배를 제사 전통에서 찾는다면, 제사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정신에 주목하게 된다. 다섯 가지 제사 행위가 있듯이, 예배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속죄는 공통적이다. 여기에 성도의 헌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뢰를 표현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것이 첨가된다.

이렇게 본다면, 참회와 사죄의 선언, 친교, 신앙고백, 기도 등은 예배의 기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들이 제사 행위의 이유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예배와 삶의 밀접한 관계를 환기한다. 제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없다. 찬양 시간 또한 없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시간과 찬양은 제사와는 다른 전승 과정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전에서 시와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고, 또 율법을 선포하고 설명하는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는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시간과 찬양 시간을 예배 안으로 수용하였다.

시기별로 예배가 달랐고, 예배학적으로는 어느 시기의 예전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거나 예배 의식의 변화를 추적하는 일에서 주된 관심은 언제나 초대교회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을 초대교회에서 찾는 일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누가는 당시 교회 모습을 이렇게 전해 주고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장 42절) 오늘날의 예배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모였고, 모일 때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는 사실이다.

서로 어떤 맥락에서, 어떤 순서로 이것들이 행해졌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다수가 이것을 예배의 전형, 혹은 교회에서 이뤄지는 각종 교회 행위의 전형이라 여기고 있다. 예배 의식의 원시 형태라 할까. 여하튼 사도행전의 기록 때문에, 비록 역사적으로 다양한 예배 형태가 나타났어도, 초대교회 모습은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네 가지 요소(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떡을 떼는 일,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면, 혹시 교회 공예배의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누가가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전해 주는 초대교회 모임에 착안하면, 예배에는 본질적인 측면이 있지만, 무엇보다 종말론적인 성격과 경제 공동체적인 성격을 고려하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간과하면 교회 개혁을 추구하면서 초대교회를 모범으로 삼는 것은 하나의 운동일 수는 있어도 현실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과거 초대교회와 유사한 삶의 형태를 추구하면서 당시 교회 갱신을 이끌고, 또 자극을 주었던 수도원 운동이 교회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가 쓴 <데카메론>은 중세의 수도원과 성직자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처음에는 교회 갱신을 위한 자극을 주었지만, 결국 스스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실존 형태를 갖고, 또 갖고 있어야만 한다. 지역 교회로서 면모를 벗어던지고 영성 수련원 같은 분위기가 되면 처음에는 좋은 것 같고, 교회 갱신을 위한 신선한 자극도 되지만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지는 못한다. 곧,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마지막으로 "영과 진리로"를 통한 이해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 기록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배가 사실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 이해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요한복음 본문에 따르면, 예배 대상인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거나 인식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장소에도 매여 있지 않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른 태도는 영과 진리 안에서 나타난다. 때와 장소가 예배의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현존이 그것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는 영"이라 고백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후 3:17).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본다면, 예배는 하나님이 영으로서 현존하는 가운데 그 영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뤄지는 인간의 의식 행위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인식될 수 없기에 오직 그의 가르침(진리 안에서)을 듣고 또 그의 인도하심에(영 안에서) 순종하겠다는 결심(고백)이 표현되는 의식이 예배라는 말이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의 현존에서 출발한다.

한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안에서 메시아를 발견한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예배의 본질을 묻는 질문의 핵심은 장소 선정이나 하나님의 전재(全在 Allgegenwart)를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 안에서 메시아, 다시 오실 그리스도, 즉 예배 대상을 볼 수 있고 또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요한복음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을 형성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과 예수 승천 이후 제자들이 고난당하게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요 16:2-3).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태도가 영과 진리 안에서 이뤄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영"이라는 선언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 바울은 영 안에서 성도들 자유를 인식했던 것 같고(고후3:17), 그것으로 성령 은사의 다양함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불트만(Rudolf Bultmann)을 비롯한 많은 신약학자도 위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영"이라는 고백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에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놀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경험이 다르고, 하나님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인간 생각에 앞설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항상 인간에게 다가오는 존재로 경험되기 때문은 아닌가.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전적 타자(der ganz Andere)'로 이해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리스도는 이미 오신 분으로만 계시지 않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 약속되었다. 따라서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를 갖고 두 세 사람에 의해서 주의 이름이 불리고, 또 하나님이 임하시게 될 때 예배의 자리는 마련된다.

예배의 의미는 이런 맥락에서 주권적인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과 예배자가 만나게 되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향하지 않는 어떤 예배도 참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이뤄지는 삶은 비록 의식을 갖추지 않았어도 참 예배다.

예배와 우상숭배

예배 이해의 필요성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만나되 그분의 영광과 존귀에 합당한 방식으로 섬기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예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에 있다. 예배의 열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구를 예배하느냐이다. 예배 반대편에는 언제나 우상숭배가 있다. 지상에 사는 동안 신앙은 대체로 예배와 우상숭배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한다.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는 경험이다. 예배 이해에서 우상숭배 이해는 피할 수 없다.

우상숭배란 대체로 예배하는 대상과 관련해 규정된다. 관건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해서 누구를 예배하느냐에 있다. 십계명은 여호와 신앙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다. 우상은 먼저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일과 여호와 하나님을 다른 형상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여호와로 여겨 예배하는 것을 두고 우상숭배라 한다. 단일신 신앙(Monolatrie), 오직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생각되어질 일이다. 다른 종교 신앙을 우상숭배로 규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는 유일신 사상이 형성된 후에 나타난다.

고전적 의미에서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사례는 출애굽기 32장이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뒤로 오랫동안 소식이 없고, 동시에 하나님 부재 경험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아론을 통해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을 만들었다. 그 신은 실제로 여호와이지만, 그들은 송아지상을 만든 후에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믿었다.

보이지 않는 신이 지각 가능한 존재가 되자 사람들은 안심했고 또 열광했다. 비록 외연은 달랐어도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낸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내연에는 별 문제 없이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계명은 바로 이런 신앙 태도를 우상숭배라 규정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시화시키는 일을 금하고 또 가시화된 것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일을 금하는 것은 여호와 신앙에만 있는 특징이다.

루터는 두 번째 계명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마음으로 신뢰하고 믿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비록 구체적인 우상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의지한다면 우상숭배라는 말이다. 루터와 달리 칼뱅은 피조 세계 형상으로 하나님을 표상하는 것을 금한다고 이해했다.

칼뱅이 비교적 계명의 외연적인 의미에 충실했다면, 루터는 두 번째 계명에 대한 해석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볼 수 있다. 루터의 해석은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과 탐욕을 우상숭배로 보는 성경적인 관점을 따르고 있다.

두 번째 계명을 이해하는 방식 차이는 성상과 성화에 대한 태도에서 두드러졌다. 루터는 그림에 관한한 가톨릭 전통을 어느 정도 보존하려고 했지만 칼뱅은 철저한 단절을 시도했다. 교회 내 모든 그림을 제거했고, 십자가와 스테인드글라스마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참된 예배를 고려할 때, 우상숭배의 문제는 무엇일까?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는 <하나님의 선교>(IVP)에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 사이의 구별을 흐려놓는다. 둘째, 우상숭배는 피조 세계에 피해를 주며,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침식한다.

예배와 우상숭배 간 구별이 흐려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인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 상호 간 군림과 억압과 종속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형상 됨이 침해된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도 무색해진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훼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됨이 부정된다.

그레고리 비일(Gregory K. Beale)은 이에 덧붙여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새물결플러스)에서 우상숭배자는 우상을 닮아가 결과적으로 영적으로 무뎌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우상숭배가 깊어질수록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를 인지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는 상태로 전락한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기보다 돈과 권력과 명예, 자신의 욕망과 직관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한편,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보자. 도대체 예배는 왜 있는 걸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예배'라 표현했지만, 다른 종교를 고려한다면,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마땅한 도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인류 역사에서 꾸준히 실천되어 왔다. 여기에는 언제나 두 가지 방식의 현상이 존재했다.

신을 예배하거나 자신이 지어낸 것을 예배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거나 거짓에 현혹되는 것이다. 본질에 천착하거나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를 말할 때 기독교는 예배와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느냐,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지어낸 것을 예배하느냐다.

인간은 예배와 우상숭배 사이에서 줄다리기할 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경우는 없다. 무신론자라 해도 자신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있으며, 무신론자는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상을 숭배한다. 제3의 가능성은 없다.

예배는 왜 있는 걸까? 성경은 인간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곧 예배라고 했다. 창조신학적인 관점에서 예배가 인간에게 마땅한 일임을 강조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사람을 짐승으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학적인 특징 중 하나로 여긴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관념이 인간에게 선천적이며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증거하는 것들이 만물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칼뱅에 따르면, 예배는 인간학적으로 불가피한 숙명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예배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예배하는 대상이 참 하나님인가 하는 것이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돕기 위해 그는 <기독교 강요>를 집필했다.

예배가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참 예배가 아니라도 인간은 자신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에 의지해 예배를 실천한다. 그것이 우상숭배에 불과하더라도 자신이 좋게 생각하고 있는 한 결코 우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상은 참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인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상이란 개념 자체를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한 그에게 우상은 자기가 신뢰하지 않는 모든 존재다. 예배하는 자와 우상숭배자를 가르는 것은 대상에 있다. 인간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예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다른 종교는 예배하기를 요구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그가 마땅히 예배하는 자로서 참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고, 인간이 예배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다. 지금은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계시하신다. 예배가 있는 이유와 우리가 예배자로서 존재하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결코 부담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나타내보여 주셨고 우리를 초대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28절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이처럼 신학적인 맥락에서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은혜로 여겨질 일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여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바라는 의도에서 전도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기독교 역시 예배와 관련해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혹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당위성을 강조하는 게 사실이다. 예배는 요구되어야 할 일인가, 아니면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할 뿐인가?

앞서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예배 아니면 우상숭배만 있고, 제3의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마땅히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이 멸망에 이르길 원하지 않으시기에 예배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명령으로 말씀하시고, 또 이 일을 현실로 나타나게 하면서 교회는 당위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선을 위해 당위적인 표현을 썼더라도 결코 강제는 아니다. 환자가 병 치료를 위해 약을 복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비록 당위적인 언어를 쓴다 해도 환자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다. 예배하는 일과 관련해 비록 당위적인 언어를 듣는다 해도 피조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사랑이 옳다고 인정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은 성령의 도움으로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라 요구한다

예배의 본질에 관해 정리해 보자. 예배란 무엇인가? 독일 신학자 게르하르트 자우터(Gerhard Sauter)는 예배를 아래와 같이 이해했다. 필자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이곳에 소개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형태(Gestalt)이며, 이런 형태의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요구하는데, 하나님을 섬긴다 함은 하나님이 인간 자신에게 직접 역사하시도록 스스로를 내어 드리는 것이다."

자우터는 예배를 무엇인가가 일어날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예배는 하나님이 행위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시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실존 형식이다. 관건은 하나님을 바라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곧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예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핵심은 다른 신이나 인간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방식은 하나님의 행위가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인간이 알아서 노력하고 헌신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하는 것을 섬김으로 보았다. 섬김의 의미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자우터가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예배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하나님의 행위로 본 것은 바르트와 견해를 같이한다.

자우터가 인간의 의식 행위로서 예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를 인간의 행위로 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게 하는 일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하는 일, 곧 예배하는 일이다. 의식을 통한 예배는 이것의 현실을 선취한다.

자주 반복된 말이지만, 예배는 의식을 통해 드리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복음으로 나와 세상을 이해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웃과 서로 나누고, 복음의 말씀에 기초해 서로 교제하는 삶 자체, 곧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의 삶에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럼에도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 곧 교회의 예배는 필요하다.

무엇보다 분명하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예배를 각종 의식과 의식 행위로 가시화시키면 다양한 지각 경험이 가능해진다. 교회 예배를 매개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지 배울 수 있다. 배우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삶을 실천한다. 예배로 하나님을 경험할 뿐 아니라 하나님 경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거나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는 시간이다. 세상 속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예배는 하나님나라를 선취할 수 있게 한다. 의식을 동반한 예배로 성도들은 참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며 또한 실천하고 또 배운다. 과거 제사를 드리면서 죄를 기억하였듯이, 성도는 예배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자신의 죄를 기억한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참 하나님이심이 나타난다. 달리 말해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는 사람은 먼저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요구에 순종하고, 교회 예배에서 참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며, 그 후에 하나님이 내 삶에서 참 하나님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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