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1987년 12월 24일 광주교도소 대문이 열렸다. 무기수였던 남자가 15년 만에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세상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매섭게 불던 겨울바람이 이날만은 잠잠했다. 성탄 특사로 풀려난 남자는 가족과 재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난 15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1972년 강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춘천교도소를 거쳐 광주교도소로 왔다. 교도소 안에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었다. 세 번 자살을 시도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자살 시도 소식을 들은 '스승'이 찾아왔다. 죽지 말라, 죽으면 진짜 '범죄자'가 된다고 타일렀다. 남자는 악착같이 살기로 다짐했다. 정원섭 은퇴목사(충절교회) 이야기다.

정 목사는 출소 이후 다시 법원 문을 두드렸다.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재조사 2번, 재판 6번이 열렸다. 2011년 10월 대법원은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고문 같은 가혹 행위로 강제적 자백을 했다면, 검사의 조사 단계에서도 같은 심리 상태가 계속돼 동일한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39년 만에 죄를 벗어던진 정 목사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고문한 사람들을 명예롭게 용서하기 위해 재심을 신청했다. 이제 누명을 벗었으니 그들을 원망하지 않겠다. 억울한 옥살이에 너무 지치고 힘들어 죽고 싶을 때 광주교도소에 찾아와 '죽지 말고 억울하면 살아남아 그들을 회개시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김재준 목사님께 감사 드린다."

▲ 정원섭 목사는 아동 강간·살인죄로 1972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5년간 복역한 뒤 출소했다. 재심을 신청한 정 목사는 2011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만화방 운영하다 강간·살인범으로

1972년 춘천역 파출소장 딸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다. 피해자는 10살이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내무부장관은 공권력에 대항하는 범죄로 규정했다. 체포 기간을 정하고 범인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수사기관 책임자들을 문책하겠다고 발표했다. 범인은 체포 명령 기간을 하루 앞두고 체포됐다. 바로 정 목사였다.

정 목사는 춘천에서 만화방을 운영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은 피해자 주변에서 발견된 몽당연필, 검은 빗, 만화방 쿠폰 등을 제시하며 죄를 추궁했다. 정 목사는 범인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대머리에 가까운 스포츠 머리여서 빗도 필요 없었다. 쿠폰도 다른 만화방 것이었다.

경찰은 정 목사 이야기를 듣는 대신 고문과 폭행을 자행했다. 잡혀간 지 3일 만에 정 목사는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자백했다. 고문받는 게 두려웠다. 정 목사는 법원에서 허위 자백이라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1·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기까지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작 사건 이후 정 목사 인생은 무너졌다. 강간·살인범을 품어 준 가족들도 멸시를 받았다. 아내와 네 자식은 춘천을 떠나야 했다. 아내는 생계를 꾸려 나가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었다.

감옥에서 세 번 자살 시도

재심을 거쳐 누명을 벗었지만, 그가 겪은 고통의 시간은 누구도 보상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을 정 목사의 인생을 소설로 다룬 책이 나왔다. 유채림 작가가 쓴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새움)는 계간지 <작가들>에 1년간 연재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유 작가는 정원섭 목사가 나온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 신학과 후배이기도 하다.

한신민주동문회(김현주 회장)는 7월 2일 인권재단 사람에서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 북 콘서트를 개최했다. 정원섭 목사, 유채림 작가가 참석해 이야기를 풀어 갔다. 유 작가는 정 목사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 신앙 소설이나 일방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밝혔다. 정 목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풀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책 제목에 왜 하필 오쿠바가 들어가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정 목사도 "왜 오쿠바라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책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 주인공은 정원탁이다. 

"왜정 치하였다. 정원탁은 고향 춘천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그는 오쿠바(어금니)로 불렸다. (중략) 치과를 다녀온 아이들은 썩은 어금니를 뽑을 때 갖는 두려움과 아픔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강렬한 기억 때문에 치과 병원의 막내아들인 정원탁을 오쿠바로 불렀다." (68쪽)

그 시절 자비량 목회를 꿈꾸다

정 목사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6·25 전쟁 이후 사진관을 운영하며 적지 않은 돈도 만져 봤다. 정 목사는 그 시절 '자비량 목회'를 꿈꿨다. 어려운 교인들에게 돈 받는 목회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하루빨리 목회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정 목사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학교에서 윤리 교사로도 재직했다. 무난했던 정 목사의 삶은 큰아들 죽음 이후 위기를 맞기도 했다.

"우리는 신이 기뻐할 것이라고 믿기에 예배를 드린다. 예배의 대상인 신은 의심할 바 없이 완전하다. 완전하다는 건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그러니 예배는 신에게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신에게 기쁨을 전하고 싶지만, 신은 인간에 의지하여 기쁨을 누리거나, 겨우 이따위 수준의 예배냐며 화를 내는 분이 아니다. 인간의 예배에 반응하지 않는 그런 완전한 신에게 어머니는 아들을 목회자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신은 완전한데 한 여자의 아들이 목회자가 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엄마는 신이 완전자이기에 재무를 살려 낼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은 완전하기에 재무를 살려 낼 이유가 없었다. 재무가 죽은 뒤로 엄마는 모든 원인을 오쿠바한테로 돌렸다. 목회를 하지 않은 벌이라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379쪽)

▲ 조작 수사는 정 목사의 삶을 무너뜨렸다. 강간 살인범으로 내몰렸고, 가족은 해체되다시피 했다. 정 목사는 감옥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정 목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끔찍했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는 정 목사가 허위 자백을 하게 된 과정이 자세히 나왔다.

"그들은 오쿠바를 바닥에서 일으켜 포승줄로 팔과 다리를 쇠 파이프에 묶었다. 오쿠바는 책상과 책상 사이에 통닭처럼 매달리는 자가 되었다. 그들은 오쿠바의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 그들은 수건 위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오쿠바는 숨을 쉴 때마다 폐로 물을 들이마시는 자가 되었다. 정신을 잃으면 얼굴을 덮었던 수건이 벗겨졌다. 정신을 차리면 같은 물음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다시 수건을 덮었다. 그때부터 오쿠바에겐 오직 죽음만이 오고 갔다.

천하고 모욕적인 삶은 끝이 보이지 않았으나 죽음은 삶을 압도하지 못했다. 오쿠바는 살고 싶었다. 오쿠바는 받아들였다. 오쿠바는 경찰의 탁월한 추리와 수사에 전혀 흠결이 없다고 인정했다 (중략)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으나 장 양이 소리 지르며 반항하자, 우발적으로 죽이게 됐음도 인정했다." (397-398쪽)

정 목사 표현대로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흔하지 않는 일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나 책으로 만들자는 제안만 10개가 넘었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은 정 목사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다. 정 목사는 "바라는 건 없다. 사실대로만 써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정 목사 생명의 은인이다. 정 목사는 "신학생 시절 그분의 수업을 들으며 반했다"고 말했다. 김재준 목사는, 정 목사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면회를 가서 정 목사를 설득했다.

"오쿠바는 춘천교도소 면회 때처럼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김재준 역시 어떤 말도 없이 오쿠바의 등만 두드려 주었다. 그게 다였다. 30분 넘도록 면회하는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헤어질 때 김재준은 '살게, 살아야 누명을 벗을 게 아닌가, 앞으론 아마 김군, 응태가 면회 올 걸세' 라는 말을 남겼다. 김재준은 제자에 대한 마지막 깊은 신뢰를 남기고 면회실을 나섰다.

희망을 남기고 면회실을 떠나는 김재준에게서 오쿠바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온 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신은 언제나 그랬다. 신은 느낌으로 온다. 때로는 빛으로 오기도 하고, 목소리로 오기도 한다. 그 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찾아 헤맨다면 니체의 '알려지지 않은 신'처럼 절규할 수밖에 없다고 오쿠바는 말했다." (407-408쪽)

정 목사는 "1987년 12월이 출소했는데, 그해 1월 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못 봐 슬펐다"고 말했다.

▲ 이번 북콘서트는 한신민주동문회가 주최했다. 유채림 작가(사진 왼쪽)와 정 목사가 참석해 이야기를 전했다. 한신민주동문회 이의진 사무국장이(사진 오른쪽) 사회를 봤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보상은 없었다

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 목사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했다. 2013년 서울중앙지법은 정 목사 손을 들어줬다. 26억 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고법은 소송 제기 소멸 시효 기간이 지났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소송 제기 소멸 시효 기간이 6개월인데, 10일 늦었다는 것이다. 넉 달 뒤 대법원도 배상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올해 82세인 정 목사는 자신과 같은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 '코리아이노센스센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감옥에 보내 경험하고 오라고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누명 쓰고 살아가는 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 북콘서트에는 2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정 목사와 유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 / 유채림 지음 / 새움 펴냄 / 431쪽 / 1만 2,800원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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