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성을 추구한다. 특히,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 걱정으로 불안함을 느낀다. 

'불안정'의 사전적인 의미는 '흔들림 없이 안전하게 자리 잡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혼돈의 상태에서 느끼는 심리적인 현상을 뜻하기도 한다.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은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를 극복하고 안정된 삶의 형태가 정착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원시 상태는 혼돈이고, 문명은 안정을 상징한다. 유목민 생활에서 농경 사회로의 변화는 대표적이다. 하늘만 바라보며 농사를 지어야 했던 천수답에서 물을 관리하여 안정적인 물 공급을 통해 농사를 짓는 수리답으로의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문명 발전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불안정 상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곧 안정된 상태를 추구한다. 사회 발전과 안정은 서로 비례한다.

사회가 안정된 구조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사회가 불안정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염려, 불안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안정된 구조에서 보장된다는 확신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불안정한 구조에서는 미래 설계가 불가능하다. 계산되지 않고 또 예측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미래학은 과학적인 예측 방식을 개발하여 20~50년 후 혹은 100년 후의 미래를 청사진으로 보여 준다. 미래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문명을 추구하도록 한다. 문명의 정도는 얼마나 안정된 사회인가에 좌우된다.

종교는 사회에서 안정을 보장해 주는 또 다른 체계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문명과 초월자와의 관계에 근거를 둔 종교는 서로 손을 잡는다. 종교가 휴머니즘적인 경향을 강화하는 문명을 비난하면서도, 어느 정도 문명의 힘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종교가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언어분석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종교적 경험에 관해 말하기를, 근심을 없애는 것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종교는 불안정한 상황을 교리 체계에 따라 해석하고 설명하면서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고 또 지속적인 안정된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독교는 그 스스로는 불안정한 환경에 있었지만, 영혼의 평안을 보장해 주는 일에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문제는 안정성 자체를 종교가 보장해 주는 평안으로 볼 때 발생한다. 문명을 통해 얻는 안정을 종교적인 평안과 동일시할 때 발생한다. 결국 불안정성의 상실은 종교의 핵심 문제가 된다.

불안정한 구조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자유는 제한되고, 불평등한 삶을 살아야 하는 환경이 조성된다. 정의의 실현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 사회가 불안정하여 미래가 불투명질 때 나타나는 부조리한 현상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독재정치다. 자연재해로 인해 나타나는 일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렇지 않은 이유로 발생하는 불안정한 상태는 한 나라와 사회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국가는 언제나 안정된 사회를 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한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선진 국가로 갈수록 사회의 안정 지수는 점점 높아진다. 개인의 정치적 결단보다 각종 법과 제도로 안정된 구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유에서든 법과 제도가 무시당하고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중시된다면, 사회는 불안정해진다. 그러므로 안정된 사회를 위해 법과 제도는 공권력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이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한편, 불안정 구조가 발생하는 이유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측면, 곧 심리적인 면을 배제할 수 없다. 법과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다고 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 상태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법과 제도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마음의 안정은 법과 제도와 무관하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하고 관심을 가지면 중요한 변수가 되지만, 결코 보장해 주지 못한다.

불안정을 느끼는 이유는 삶이 일정한 패턴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항상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면, 누구든 그것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패턴이 일정치 않을 경우 사람들은 불안정을 느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고정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은 대체로(적어도 생활 계획에 있어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 비록 월급을 받는다 해도 보장된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에 비해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의 경우 불안정 지수가 더욱 높아진다. 그러나 아무리 정규직 직원이라 해도 마음의 불안정은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세상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혹은 예측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로 정치 사상가들은 인간의 욕망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헤겔(Friedrich Hegel)은 인정 욕구를 들었다. 따라서 법과 제도는 인간의 욕망을 일정하게 규제하는 방향으로 제정된다. 그러나 과연 그 이유가 인간의 욕망에만 있을까? 기독교는 이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또 핵심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혹은 예측이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인간의 뜻과 의지 그리고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사실 법과 제도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뜻을 반영한다. 따라서 일반 은총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제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뜻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법과 제도가 잘 갖춰진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상태가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때로는 잘못된 법들도 제정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러니 섣불리 세상이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한 구조를 교회에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추구하는 안정은 어느 정도 법과 제도를 통해 보장받지만, 전적으로 그것에만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안정을 추구한다. 물질세계에선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인류 사회는 오히려 이것을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오랜 세월동안의 발전을 거듭해온 가운데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현상은 안정된 구조이다. 안정된 구조를 신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의 뜻에 따라 구성된 혹은 인간에 의해 예측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불안정성의 상실'이다. 불안정성의 상실이란 표현에는 신앙생활에서 불안정은 당연한 현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신앙은 본질상 안정된 삶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불안정한 삶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불안정성의 상실이란 신앙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불안정의 현실에서 벗어난 경우를 말한다. 인간이 생존 본능을 따라 살다 보니 안정된 상태를 삶의 환경으로 삼게 된 것이다. 신앙적으로 보면, 현대사회는 불안정성의 상실로 특징지을 수 있다.

성경에서 특히 믿음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혹은 예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안정된 삶에서 벗어나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소개하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보라. 그들은 한결같이 보이지 않는 세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일이었다. 우리로 하여금 안정을 보장해 주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안정을 기대하며 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은 오직 약속으로 주어진 것일 뿐, 결코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앙인은 불안정한 구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살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런 부르심에 따라 살았고, 오늘 우리에게 불안정한 삶에 관한한 모범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무질서한 듯이 보이는 자연현상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카오스 이론이라 명명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삶이 겉보기에는 불안정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고, 또한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로고스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신뢰하는 자에겐 안정된 삶이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낀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보장하는 안정된 상태에 결코 안주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믿음은 결코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불안정한 상태로 과감하게 나를 던져 넣는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안정을 추구한다. 불안정하지만 평안한 마음을 누린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면서 세상이 주는 평안과 결코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독교인은 세상이 주는 안정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서 실패하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을 발견할 수 있을 때이다. 비록 당장에 발견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약속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상이 주는 안정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돈으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사회적인 지위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각종 성과와 업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명예와 권력으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지식으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행복한 가정을 통해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자녀들의 성공적인 삶에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성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삶을 통해 안정을 추구하는 삶, 계산되거나 예측이 되는 삶에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삶 등. 참 기독교인으로 살기를 결단한다면, 우리가 떠나야 할 것,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니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언제나 주의 재림을 기대하며,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를 외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주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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