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관련 글을 접하면서, 심도 있는 토론에 필요할 것 같아 '예배'를 주제로, 다음 네 개의 글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 필자 주

1. 주일예배는 목회자 영성과 자질 드러나는 시간
2. 예배 의식의 내연적인 의미
3. 교회와 예배
4.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를 생각할 때 자주 문제로 부각되는 점이 있다. 첫째, 예배하는 자가 교회에서 보이는 태도와 일상에서 보이는 태도 사이에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짧은 선교 역사를 생각할 때 믿는 자 수가 적지 않고 예배 종류와 수도 다른 나라보다 유독 많은 편인데, 우리 사회 윤리 도덕 수준은 OECD 국가 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높으나 기대에 반하는 현실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이제 일상이 되었고, 더 이상 기대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현저하게 드러나는 윤리적인 타락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둘째, 예배에 기울이는 정성에 따라 하나님이 반응하셔서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하는 주술적이고 기복주의 신앙이다. 예배에 쏟는 정성이 잘못된 게 아니라 예배 목적을 오직 건강과 삶의 번영 그리고 인생의 성공에 두고 있는 것이 잘못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의 친교로 인격적인 성숙과 변화를 선물로 얻는 예배는 뒷전인 태도다.

셋째, 성도가 예배자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방식으로 예배하게 만드는 예전이다. 역동적이지 못한 예전은 예배에 참여하기보다 예배를 섬기는 소수의 예배 행위를 보도록 하고, 성도의 찬양을 이끌어 내기보다는 찬양단의 찬양을 듣도록 구조되어 있다. 예배 시간에 함께 있었고 예배 의식을 공유했다는 생각만 심어 줄 뿐이다.

설교에서 감동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예배가 평가하도록 만든 예배이다. 예배가 교회 안에, 혹은 개인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예배의 자리로서 교회와 교회 행위로서 예배의 상호 관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와 예배의 관계

예배와 관련해서 볼 때 교회는 무엇일까? 교회에서 예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가톨릭은 미사에서 매번 성체성사(성찬식)를 거행한다. '성체(예수님의 몸)를 모시는 곳', 혹은 '성사(성례)를 행하는 곳'이라 해서 '성당(聖堂)'이라 부른다.

개신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으로 보고 교회를 '예배당(禮拜堂)'이라고 한다. 미사를 드리며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인 성당과 신앙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려 모이는 공간인 예배당의 차이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특징을 대변한다.

예배당은 교회이지만, 교회에 예배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관도 있고 선교관도 있으며 복지관도 있다. 문화 목회의 일환으로 카페와 공연장을 운영하고, 교제를 위한 식당을 별도로 마련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복합 기능을 수행하는 다목적 공간을 선호한다. 평소 체육관이나 공연장, 혹은 카페로 쓰다가 주일에는 예배와 교육 그리고 교제를 위한 용도로 바뀌는 공간을 말한다.

교회 행위 역시 예배만 있지 않다. 교육, 봉사, 교제, 선교 등 전통적으로 교회의 다섯 기둥으로 알려진 것들이 있다.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 교회 개념이 수용되면서 교회 행위가 선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으면 많은 성도가 '예배하는 곳'이라 대답한다. 교회에서 예배가 그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실제로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다른 교회 행위보다는 예배를 염두에 두고 간다. 이런 성도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예배하는 곳이다. 예배 이외 다른 활동도 일종의 예배,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여길 정도니 교회에서는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상의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영광과 존귀에 합당하게 예배하는 것이니 예배가 교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행위 대부분이 예배로 수렴되다보니 예배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해짐에 따라 교회 이해와 형태 역시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소위 '이머징 처치'는 의식을 갖춘 예배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를 실험적으로 도입하면서 등장한 교회 트렌드다. '열린 예배'는 전통적인 예전에 매이지 않는 예배를 통칭한다.

예배 이해 방식 따라 변하는 교회의 형태

예전을 간과한다는 비판 때문에 '열린 예배'가 예배인지 아니면 집회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예배학자들 중심의 모임에서 '집회'라 부르는 것으로 논쟁은 일단락된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예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 때문에 본질에 있어서 이미 열려 있는 것이다. 의식 유무에 따라 예배와 집회를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예전에 따르지는 않아도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도와 찬송과 설교로 간소화되었을 뿐이다.

앞서 말했듯 예배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교회의 이해와 형태는 변한다. 이것 역시 예배가 교회 이해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확인해 준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교회는 전통적인 형태를 중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정도 전통적인 형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기도 한다.

예컨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이해한다면, 예배는 하나님 중심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합당하게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으로 이해한다면 소통 행위가 예배 시간에 일어날 수 있도록 구성한다. 성도들이 예배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할 있도록 구성한다.

예배를 일상의 삶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굳이 교회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도 예배가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을 예배로 생각한다면 유형 건물뿐 아니라 교역자나 직분을 불필요하게 여겨 무교회주의자가 된다. 예배 이해에서 현장성보다 현실 경험을 중요시한다면 굳이 교회에 가지 않고도 미디어로 예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이버 처치 역시 가능해진다.

교회에서 예배 의미를 지나치게 중시하다보니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 글에는 진정한 예배가 이뤄지는 곳을 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의외로 많다. 예배에 감격이 없으면 교회에 나가길 주저하는 성도도 많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진정성이지 건물이 아니라는 말이며, 건물 형태의 교회보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교회 이해에 있어서 예배를 특별하게 중시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물리적인 공간보다 예배하는 자와 예배 행위가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잘못하면 교회 이해에서 영지주의적 태도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교회 이해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기에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성도 개인을 교회로 보면서 공예배보다 선한 삶으로 예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식의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만일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면 성도들 모임으로서 교회 자체를 폐지하자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행 일치의 삶을 강조하는 취지에서 하는 주장이라 보고 싶다.

'예배'가 교회 평가 기준이 될 수 없는 이유

필자는 공적인 예배를 중시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교회 예배를 비판하고 삶으로서 예배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본인 말대로 본인은 삶으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삶을 살고 있는지. 교회 간판은 없어도 진정한 예배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위한 최소한의 물리적인 공간마저도 필요 없는지.

위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삶의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공적인 예배를 간과하는 투로 말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교회가 올바르게 변화되면 그런 주장을 철회하게 될까? 만일 그렇다면 철회할 기회를 결코 얻지 못한다. 틸리히(Paul Tillich)가 주장했듯이 지상의 교회는 종말이 임할 때까지 언제나 거룩함과 악마성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배로만 교회를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리가 너무 잦은 현실 교회를 비판하는 의도에서 비롯한 주장임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마지막 때가 이를 때까지 결코 바뀌지 않을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를 오로지 '예배하는 곳'으로 환원하고 '진정한' 예배만을 교회의 교회 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과연 정당할까?

무엇보다 이런 예배 이해에는 예배가 다분히 '인간의 거룩한 혹은 경건한 행위'로 구성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이는 얼마나 예배의 신학적인 이해에 합당할까? 진정한 개혁을 추구한다면서 이런 주장을 한다. 종교개혁 정신에 부합할까?

이런 예배 이해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는 교회를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도 개인을 교회로 보는 게 그 대표적 표현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을 때, 바울은 성도로 구성된 유기체를 생각했다. 성도를 교회라고 보는 것은 유기체 일부를 겨냥한 것이다. 성도 한 사람을 독립적인 교회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라면 충분히 공감하나, 성도 개개인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라면 신학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원래 '에클레시아'란 말은 '공동체'로 번역되는 게 바람직하다.

다른 하나는 희생과 헌신 모티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예배 행위를 윤리적인 온전함과 경건한 삶과 동일시한다면, 이는 개인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뤄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동시에 이뤄지는 사건으로서 예배를 인간의 행위 측면에서만 고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사실 구약의 제사 개념을 바탕으로 예배를 이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도 예배가 구약의 제사 개념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예배, 선한 삶으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해 마치 유형 교회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교회 이해는 교회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에서 한쪽만을 취한 결과이다. 지상의 교회는 신학적 측면과 사회학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신학적 관점에서만 교회를 이해해서도 안 되고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회 이해에서 두 관점은 현실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교회의 실존 양태를 반영한다. 곧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존재하지만 사회의 한 제도로서도 존재한다. 교회를 이해할 때 두 관점의 긴장 상태와 균형을 잘 유지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의문과 오해 그리고 갈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예배와 교회, 균형 잡힌 이해가 필요하다

이단은 대개 한쪽으로 치우친 교회 이해를 강조한다. 세상과 소통을 단절하여 교회의 사회학적인 측면을 무시하든지, 세상 속으로 지나치게 빠져들어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다. 대개 이단은 겉보기에는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은밀한 방식으로 권력과 물질을 추구한다. 성 윤리에서도 옳지 않다. 다시 말해 이단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이 변형되어 종교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보자. 예배 장소는 왜 꼭 교회여야 할까?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교회에는 예배하기 위한 공간과 인력 그리고 예배에 필요한 게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예배의 상관관계를 비판하는 사람이 주로 교회 공간과 목회자를 겨냥한다. 예배가 가능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이나 장소가 오히려 참다운 예배를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록 성도는 아니라도 동료나 이웃이나 가족과 함께 공부하고 교제하며, 지역사회에 봉사하면서,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인 됨을 드러내며 선교할 수 있다. 성도는 직장이나 가정이나 카페 등에서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도 있다. 공간 없어도 교회 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공간으로서 교회가 필요할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 가정, 직장, 일상 장소 어디서든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날 교회 비판과 관련해 종종 제기되는 이런 질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장차 하나님을 예배할 곳은 어디인지를 물었다. 북이스라엘 지역일까, 아니면 남쪽 유다 지역일까. 이 질문은 예배 장소와 관련해 존재하는 갈등 상황을 드러낸다. 

진정한 예배가 혈통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곳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입장과 역사적인 여건상 혼혈이 되었어도 굳이 남쪽까지 가서 예배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맞서 있다. 예수님은 그녀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다른 대답으로 그녀의 생각을 수정하셨다. 올바른 예배를 특정한 장소와 결부시켜 대답하시는 대신 오히려 예배를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요 4:24)

장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이해에 따라 예배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 장소가 이곳인가 저곳인가, 사마리아냐 예루살렘이냐 묻는 사마리아 여인의 예배 이해 바탕에는 공간과 장소 개념이 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 이해를 바탕으로 예배를 이해한다. 영으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지에 초점을 두고 말씀하셨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 예배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인간 기준으로 예배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 예배하는 곳이 교회인지 아니면 일상의 삶인지를 묻는다면 예수님은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분의 영광과 존귀에 합당하게 예배하는 게 옳다고 하실 것이다. 교회가 예배의 유일한 장소는 아니다. 하나님에게 합당한 예배 요건만 충족되면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참다운 예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교회라 말할 수 있다.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며, 하나님 은혜가 베풀어지고, 성도의 교제가 이뤄지면 어떤 형식을 갖추든 예배라 할 수 있다. 그곳을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특정한 지역에 위치한 교회의 의미를 간과하면 몸에 병이 잦다고 몸을 돌보지 않고 영혼만 중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와 사역을 바탕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모임이 교회다. 그러나 교회 밖에도 성령의 사역은 이뤄지고 있다. 틸리히가 말한 대로 인간의 이념이나 신념 공동체인 '영 공동체' 모임이 있기에 바른 정신이나 선한 행위로만 교회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현상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교회 행위와 동일한 행위를 실천하는 곳도 있다. 이런 모임이 커져서 미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교회 공적 예배에는 일상의 예배와 구분되는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 예배와 연계되는 지점도 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이를 위해 교회는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 행위에는 예배만 있지 않다. 다른 교회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예배만으로 교회를 정의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 교회 개념이 일반화되면서 교회 행위가 선교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옳지 않다. 제도 측면에서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각종 신앙 행위(예배 의식, 교육, 선교, 봉사, 교제)를 하는 곳이다. 아무리 예배, 혹은 선교가 중시된다 해도 교회는 다섯 가지 행위가 대체적으로 충족되는 곳으로 정의된다.

초대교회 성도는 박해 위협이 현저한데도 죽음을 각오하고 모이기를 힘썼다. 그들은 모일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지하 무덤인 카타콤을 예배 장소로 사용하였다. 교회라는 이름을 지닌 물리적 공간은 아니라도 모임이 이뤄지는 공간 개념으로서 교회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리적 공간은 교회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공간적 속성을 현실화한 것일 뿐이다.

가정, 사무실, 강당, 혹은 그곳이 어디든, 교회라는 간판을 걸지 않았어도 모일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하다. 그곳에 교회 간판을 붙이든, 다목적으로 사용하든, 모일 필요가 있을 때만 임대하여 쓰든, 공간 개념으로서 교회는 필요하다. 또 그곳에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예배하려면 교회는 필요하다. 유형 교회가 얼마나 교회다운가 하는 문제는 별개다. 현실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실존을 상징한다.

성도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예배하는 일을 각 교단 헌법에서 '성도의 마땅한 도리'라고 규정하고 있지만(제도로서 교회의 측면), 엄밀히 말해 성도의 예배는 하나님 은혜에서 비롯한다. 개신교 신학에서 예배 주체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바르트는 이 점을 명시하여, 예배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했다. 결국 선한 행위가 있는 삶으로서 예배만을 교회와 동일시하는 주장은 예배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일상의 예배,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예배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시간이다. 인간은 초대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태도를 취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인간의 행위이기도 하다. 용서는 받았으나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도대체 누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를 자신할 수 있겠는가?

교회를 특별하게 따로 마련된 공간이 없는 모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비판할 점은 전혀 없을까? 은혜가 아니면 예배는 가능하지 않다. 교회 비판 의도는 충분히 공감하고, 교회에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겠다고 아이마저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예전으로서 예배보다 삶으로서 예배를 말하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자. 예배는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데, 굳이 교회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예배 특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일정한 의식으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상징이 갖는 힘이 있고, 상징은 일상에서 예배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일상의 예배를 말할 때 근거로 인용하는 로마서 12장 1~2절 "거룩한 산 제물"은 성도의 모임으로서 교회와 교회 예배가 불필요하다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 표현으로 일상 예배가 새롭게 조명되고, 선한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교회 공예배 못지않게 중요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 표현을 로마서 전체 맥락과 따로 떼어 이해하면 안 된다. 로마서는 로마 박해뿐 아니라 유대교로부터 공격받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필요한 복음의 진실을 전할 필요성에 따라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격려하며 쓴 선교 편지이다. 12장 이전 글은 복음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구원이 율법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따라 주어지는 은혜임을 강조한다.

12장 3절부터는 성도가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미루어 보아 "거룩한 산 제물"을 삶을 예배로서 이해하는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공동체의 삶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밖 예배만 진정한 예배임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와 병행하는 삶으로서 예배를 겨냥한 표현이다.

필자의 이해에 따르면, 로마 지역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사용한 "거룩한 산 제물"이란 표현은 당시 성도의 종말론적인 실존 상황을 염두에 뒀다고 생각한다. 초대교회 예배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말론적인 성격이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 공동체 성격과 성도들 삶을 총체적으로 규정하였다.

이런 종말론적인 성격의 예배는 기독교가 공인되어, 가정 교회 틀에서 벗어나 바실리카(Basilica)에서 모이게 되면서 사라졌다. 로마에 의해 공인되기 전, 바울은 예배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공동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할 것인지 권고하려고 "거룩한 산 제물"이란 표현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영적 예배"라는 표현에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영적'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합리적', '이성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예배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기에 자칫 열광적으로, 신비주의적으로 기울 수 있다는 점을 특별히 고려하여 선택된 언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문제는 고린도교회에서 볼 수 있었고 교회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현대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많은 문제는 신앙의 종말론적 성격을 상실한 결과다. 안주하려 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성공과 번영을 추구한 결과다. 교회는 비대해지고, 작은 규모라 해도 커지려고 노력한다. 진실한 모임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장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려다 보니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다.

지역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빛과 소금 역할은 차치하고, 개혁을 뒷전으로 하면서 교회 성장만 추구한 결과다. 신앙의 종말론적 성격과 동시에 예배의 종말론적 성격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불시에, 혹은 부지중 하나님 오심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자는 의식으로서 예배든 아니면 삶으로서 예배든 남다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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