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주의란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교회에만 국한하는 일이다. 신앙생활은 가정에서도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직장에서도 전개되어야 한다. 크리스천들이 사는 공동체 속에는 언제나 신앙이 꽃피고 열매 맺어야 한다. 한때 프랑스 신부들은 일요일만 되면 성당을 떠나 공장과 부두, 빈민촌을 찾아갔다. 교회에 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어 주는 일은 당연한 책임이다." (28쪽)

▲ <어떻게 믿을 것인가> / 김형석 지음 / 이와우 펴냄 / 264쪽 / 1만 2,000원

시대의 지성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형석 교수가 쓴 <어떻게 믿을 것인가>(이와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보다 편협한 시선과 기득권 추구에 열을 내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하기보다 목사와 교리만 신봉하게 만들고, 참된 하늘나라 백성으로 세우기보다 교회의 몸집을 키워 정치판을 흔들려는 지도자들로 넘쳐나는 현실을 직시토록 하고 있죠.

"개신교에서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죄다 아니다는 식의 구속을 주기보다는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조상들의 선한 유지를 받아들이는 길인가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신앙이 생긴 후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 옳을 것이다. 신앙적으로 무엇은 죄가 되고 무엇은 죄가 안 된다는 것은 신앙인이 된 후에 스스로 선택하고 해결 지을 문제다." (123쪽)

이른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품을 수 있는 교회와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는 뜻이죠.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과 엘리사의 모습을 엿보게 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갓 알기 시작한 나아만이 제사 문제를 말하자 엘리사가 품었던 그 모습 말이죠. 그만큼 교회는 교리로 옥죄고 몰아세우기보다 세상과 연약한 자를 품는, 예수님의 정신과 삶을 보여 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이 책이 마치 교회와 세상의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시선과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할 것인지, 또한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판에 대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수용해야 할지 생각토록 말이죠. 그만큼 교회가 껍질을 벗어던지고 본질을 추구해야 할 게 무엇인지, 주님 안에서 세상과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그 조정자 역할을 해 주고 있죠.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새벽에 묵상하고 있는 욥기서의 '엘리후'가 떠오릅니다. 욥(אִיּוֹב)을 신화적인 인물로 단정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욥은 실존 인물(창 46:13, 창 36:33, 겔 14:14, 약 5:11)이죠.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정도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였죠.

고소자 사탄이 '이유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욥1:9) 욥을 시험코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재산과 자식들 곧 모든 소유물을 잃고, 몸에 악창 곧 피부암이 들끓고, 그의 아내마저 등을 돌릴 때에도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침묵(마 27:46)하셨죠.

그러자 욥의 세 친구들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을 찾아와 위로하려 했지만 욥의 극심한 고통 앞에 7일간 아무런 말도 못했죠. 욥이 드디어 입을 벌려 자기 생일과 태어난 날을 비통해하자 그때 그 친구들이 나서서 욥과 함께 세 번에 걸쳐 대화(4-27장)를 나누었죠.

물론 그 친구들의 주장은 한결같았죠. 대부분 인과응보식의 견해를 세 차례에 걸쳐(욥 4:7, 8:11, 11:1,  욥 15:34, 18:8, 20:5, 욥 22:5, 25-26) 펼쳤죠.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서도 세 차례에 걸쳐(욥 4,17, 8:3, 11:7, 욥 15:8, 18:21, 20:27, 욥 22:26, 25:2) 이야기했죠. 물론 그들이 말한 인과응보 곧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성경적인 시각(전 11:1, 갈 6:7, 약 1:14)이죠. 또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는 하나님의 초월성도 맞는 말이죠.

하지만 그들이 놓친 게 있었죠. 욥처럼 의로운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고통을(욥 6:10, 9:20, 10:7, 13:16, 16:19, 19:26, 27:4) 허락하시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케 하신다는(욥 7:18, 17:9, 23:10) 걸 몰랐죠.

또한 하나님의 초월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내재성'(욥 7:19, 10:12, 13:22, 17:3, 19:27, 23:5, 27:3) 곧 긍휼하심과 사랑하심과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의 인격조차 그들은 바라보지 않았죠.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으로 욥을 품고 아파하고 기도하기보다 교리적인 하나님을 들이대며 욥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것이죠.

바로 그 즈음, 잠시 휴지기(Interlude) 곧 막간(욥 28-31장)을 거쳐 엘리후(אֱלִיהוּ)가 등장합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이름의 뜻을 지닌 엘리후,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뜻의 아버지 '바라겔'의 아들로서, 그는 '람'(the family of Ram)의 가문에 속한 '부스족(Buzite)의 후예'(욥 32:2, 렘 25:23)였죠.

그 '부스족'을 '나홀의 후손'(창 22:20-21)으로 생각하면 엘리후는 아브라함과 친척이 되고, '람'(룻 4:19-22)을 다윗의 선조로 보면 유다 족속의 후예가 되죠.1) 어찌 됐든 욥과 엘리후는 같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는 셈이죠.

엘리후는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진술하죠. 첫 번째 진술(32:6-33:33)에서 그는 나이가 어리지만 욥의 친구들이 무지한 것과 욥의 의로움을 주장한 걸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면서 나선 배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고통을 주신 게 아니라 죽음에서 막으시고자 하신 것에 대해 언급하죠.

두 번째 진술(34:1–37)에서 욥의 무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주장(34:12)하고, 세 번째 진술(35:1–16)에서 인간의 어떤 죄악이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은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하신 분(35:6-7)임을, 그리고 네 번째 진술(36:1-37:24)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항변'(36:1-21)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36:22-37:24)을 고백하죠.2)

그렇기에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가 지닌 관점엔 차이가 있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죄가 고통에 이르게 하고 벌을 가져오기 때문에, 죄인인 욥이 회개해야 비로소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죠. 그에 반해 엘리후는 고통이 죄에 이르게 하지만 고통은 은총을 갈망하기 때문에 교육적인 것이요 욥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회복시켜 주실 것이란 관점이죠.3) 그는 고통을 통해 교훈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엘리후의 역할은 '중재자'(욥 32:12, עָנָה, arbiter)였지 않아 싶습니다. 그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욥의 무죄와 함께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반추하도록 했고, 아울러 초월적인 하나님과 함께 인간을 교훈하시고 바르게 이끄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을 부각시킨 인물이었죠.

그런 뜻에서 볼 때 그는 일각에서 말하는 '허풍쟁이'(Wineskin)가 아니라 '새 가죽 부대'(Windbag)로서의 중재자 역할을 한 사람이죠.4) 자기 의로움을 항변하는 욥이나 욥의 죄악을 공격했던 세 친구들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한 채 모두가 겸손케 했으니 말이죠.

그뿐 아니라 그의 진술 이후 곧장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욥 38-41장) 자연 만물의 기원과 이치로 욥의 무지를 일깨워 주셨고, 욥의 세 친구들에게도 나타나(욥 42:7) 욥을 찾아가 화목케 하도록 지침을 내려주셨으니, 그는 또 다른 의미의 중재자이지 않나 싶습니다.4) 이른바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사신'(מַלְאָךְ, 욥 33:23)으로서의 상징성을 갖춘 인물이죠.5)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가 너무 편협하고, 미신화하고, 세력화한다고 비난치 않나요? 교회와 크리스천 모습 속에 예수님의 사랑과 인격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이럴 때 프란시스의 기도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각각 심고, 자기를 내어 주는 중재자로 산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주님께서는 이 시대에 엘리후와 같은 중재자로 우리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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