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관련 글을 접하면서, 심도 있는 토론에 필요할 것 같아 '예배'를 주제로, 다음 네 개의 글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 필자 주

1. 주일예배는 목회자 영성과 자질 드러나는 시간
2. 예배 의식의 내연적인 의미
3. 교회와 예배
4. 예배란 무엇인가

모든 예전은 스토리텔링이다. 특별히 구속사적인 스토리텔링을 지향한다. 그렇다고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구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속사적인 스토리텔링은 우선 예배에도 주제가 있다는 말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를 인지하고 또 경험할 수 있도록 예배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일반적으로 줄거리(plot), 캐릭터, 시점이 드러나도록 구성된다. 스토리텔링으로서 예배의 특징은 현장성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예배에서 각종 의식을 매개로 하나의 사건이 된다. 예배자는 예배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 행위로 하나님의 사건에 참여한다.

예배에서는 특정인의 시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시점을 말할 수는 없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시점에서 조명된다. 예배는 같은 시간과 장소에 모인 성도들이 같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시간이다.

스토리텔링으로서 예배는 주제에 맞게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드라마다. 예배 순서는 예배 주제(신학적 주제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와 관련해 성도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구성될 때 성도들이 역동적으로 예배에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에 공감각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동안 성도들이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잘 구성된 예배는 스토리 메이커로도 작용한다. 다시 말해 스토리텔링 과정에서 소통되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성도가 자신을 재인식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혹은 일상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 때문에 필자는 교회 공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고 본다. 의식을 통한 공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훈련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도록 고무한다.

예배는 기승전결까지는 아니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가 잘 드러나고, 모든 참여자가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주일예배 주제에 맞게 잘 짜여 있어야 한다. 만일 경건을 이유로 아무런 리듬감도, 생동감도 없다면, 예배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수하려 한다면, 굳이 잘못이라고 판단하진 못하겠지만, 성도들이 예배 참석을 꺼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세상을 따라갈 여력도 안 된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시대에 교회가 스토리텔링을 무시하는 것 역시 권장할 만하지 않다.

예배 주제는 대개 교회력에 따라 설정되어 있다. 교회력에 따르지 않는 경우, 예배 주제는 대체로 설교 주제에 맞춘다. 설교 주제는 임의로 설정하기보다(이 경우엔 주제 설교가 된다) 주로 성경 해석(본문 설교)으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에서 주제를 파악하는 일은 신학적인, 혹은 성경적인 주제를 숙지하고 있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주제를 숙지하고 있어도 많은 설교자가 시간을 쪼개어 급하게 설교를 준비하기에 일정한 주제를 반영하는 예배를 미리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

예배의 회복이 설교의 회복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다. 찬양과 찬양곡 주제로 예배를 구성할 수도 있다. 예배 스토리텔링은 각각 예배 순서를 매개로 한다. 이것의 의미를 알아야 스토리텔링을 실천할 수 있다.

이제 예배 의식 각각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기원

첫째, 예배 시작에는 예배 인도자를 통해 이뤄지는 기원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또 하나님이 공동체와 함께하시길 기원하는 기도가 있고, 찬양대 송영이나 악기 반주로 하나님의 임재에 합당한 찬양을 올린다. 기원과 이어지는 '예배로의 부름'에는 예배 주제, 곧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예배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송영은 맞이하는 노래다. 단지 예배 시작을 알리는 순서로만 여겨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의미를 갖는다. 영이신 하나님이 공동체 모임 가운데로 오심을 상징하며, 또한 영광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노래다. 예배 대상인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합당한 찬양을 준비한다. 송영과 함께 예배 인도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문제가 있는 행위다. 송영은 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일상에서 이뤄지는 하나님 경험의 본질적인 측면을 암시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의 오심을 맞이할 때 하나님 경험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인간의 어떤 노력과 행위로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하나님 경험은 오직 하나님의 오심을 바라고 기대하는 중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에 따라서만 일어난다. 예배에 지각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특히 명심해야 한다. 송영은 바로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소위 열린 예배나 열린 집회에서는 송영 대신에 앞부분에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시작하는데, 이것 역시 영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전제하고 행하는 일이다.

송영이나 임재를 기원하는 기도에 이어 '예배로의 부름'이 이어진다. 대체로 예배 인도자(목사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가능하다)가 담당하고, 또 적당한 성경 구절이 낭송된다. 하지만 사실 '예배로의 부름'은 영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이 성도들을 일상으로부터 예배의 현장으로 부르시는 행위를 표현한다.

성도는 이로써 예배 방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동참하는 자가 됨을 선언한다. 세상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내는 호명 행위로 이해할 수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준비하게 한다.

'예배로의 부름'은 예배가 인간이 주도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베푸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의식이다. 예배로의 부름은 순서적으로 예배의 처음에 있지만, 성도를 세상에 파송하는 의식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다시 말해 교회 예배에서 예배로의 부름은 일상으로부터 성도들을 호명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상징하고, 예배를 마무리하며 이뤄지는 축도는 일상으로 파송을 상징한다. 결국 교회의 예배와 일상의 예배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원형을 이루며 계속 반복되는 구조를 갖는다. 하나님이 성도를 세상으로부터 부르시고 세상으로 보내는 일이 예배에서 일어난다.

교회에 따라 다르지만 '예배로의 부름'에 앞서 한 주일 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는 참회 순서를 갖는다. 하나님의 현존을 믿고 나가는 일이니 먼저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예배로의 부름 이후 참회 시간을 갖는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예배한다. 부름에 앞서 회개 순서를 넣든, 부름 이후에 회개 순서를 넣든, 관건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죄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숙지하는 것이다. 기독론적인 성격을 갖는 순서다.

2. 신앙고백

둘째,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있다. 예배로 부름을 받은 자는 신앙고백으로 자신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예배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예배 행위는, 사도 바울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말한 바 있듯이, 우상에 불과할 뿐이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일수록 신앙고백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는 성경에서 증거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모든 말씀과 행위를 옳다고 시인하는 언어 행위다. 또한 신앙고백으로 성도들은 그동안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믿고 살았던 사실이 있을 경우 이것을 반성한다.

신앙고백 시간에 보통은 '사도신경'을 사용하는데,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신앙의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은 단순히 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주일에는 특별히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고백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신앙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고백하도록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 신앙 전통을 반영하기에 '사도신경'으로 불린다. 사도신경은 세례 문답 형식으로 된 '로마 신경'에서 유래한다. 이를 로마가톨릭의 잔재라 여겨 공적 예배에서 사용하지 않으려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자신들 신앙을 고백한다.

전 세계 교회는 이로써 같은 믿음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소망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나타낸다. 물론 동방교회는 사도신경이 아니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사용하기 때문에 WCC 에큐메니컬 예배에선 종종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사용하기도 한다.

신앙고백은 기도가 아니다. 반드시 눈을 감고 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고백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어서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국에는 마치 선서하듯이 손을 들고 행하는 교회들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신앙고백은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신뢰 관계를 밝히는 일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일을 피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려고 눈을 감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신앙고백이 기도가 아니라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도신경 내용을 신학적인 의미와 관련해 숙지하도록 하는 일은 새신자 교육과정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기존 성도들에게도 교육이나 설교로 의미를 거듭 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소망하는지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3. 찬양

셋째, 예배에는 찬양이 있다. 예배 전통에서 기도와 함께 가장 오래된 의식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찬양이란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이는 행위다. 찬양으로 성도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일을 실천한다. 자기 형편이나 처지와 무관하게 마땅히 하나님이 찬양받을 만한 분임을 인정한다. 문제를 갖고 있는 성도들이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성도들이나 모두 찬양 시간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여 드린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찬양할 수 없다. 예배 시간에 찬양이 포함된 이유는 하나님이 마땅히 찬양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지만, 찬양함으로 다시 한 번 자기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고 부정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찬양이 너무 감성적인 측면으로 기울다 보니 태도 측면에서 아무 변화 없이 가사와 멜로디에 도취하는 경향이 자주 목격된다. 이런 현상은 지양되어야 한다. 찬양하는 순간엔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 모습을 찬양 후까지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성과 감성의 관계에서 감성 작용이 우선적으로 일어나고, 감성 상태에 따라 지성 작용이 달라진다는 뇌 과학 연구 결과들을 볼 때 찬양이 우리 마음을 여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례도 있고, 생각과 삶에 아무 변화 없이 오직 찬양만으로 만족을 누리려는 사람들 때문에 감정적인 찬양은 진정성에서 종종 의심을 받는다.

성도는 찬양함으로 임재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높이고,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고백하고, 인간의 회개·의지·결단·간구·소망을 표현한다. 찬송은 각 주제에 맞도록 선별한다.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복음 성가를 부른다.

복음 성가는 성경 말씀이나 신앙 간증에 곡을 붙여 현대인들이 부르기 쉽게 만든 것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은 내용뿐 아니라 리듬에 모던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간혹 세속 음악 리듬을 그대로 차용한 곡이 있어 찬양곡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내용적으로 비판을 받는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욱 많은 까닭이다. 형식과 내용에서 찬양에 적합한 노래가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한편 기독교 문화 생산이 저조해 세상 문화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지나친 비판은 삼가야 한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긍정적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찬양은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예배에서 음악적인 리듬으로 찬양하는 것만 고집하면 단조로워진다. 시편 전통을 생각해 보면, 때때로 시와 그림 그리고 몸의 움직임으로 찬양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배가 일정한 의식에 따른다 해도 경직되지 않고 역동성을 갖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생동감 넘치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4. 성시 교독

넷째, 성시 교독이다. 이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교독문'을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교독하는 일이다. 찬송가 뒷부분에는 교회력에 따라 교독문이 수록되어 있다. 성시 교독은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교회 전통에 따른 것이다.

회당 전통에서는 쉐마 낭독이 있었고, 그 후 십계명 낭독도 있었다. 중세에는 시편 교독문으로 대체하였는데, 수도사와 사제만 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이런 특권을 철폐하고 성도들이 함께 부르는 코랄(오늘날의 찬송가)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시 교독이 찬양과 함께 다시 예배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전통으로 자리 잡은 일을 굳이 제거할 이유는 없다. 회당 전통에서 볼 수 있듯이, 교독문은 신앙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을 반복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중세 가톨릭에서는 신앙인들의 하나님 경험을 상기하고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예배에서 왜 성시 교독은 하는 걸까?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 은혜와 심판 행위에 대한 경험을 시의 형태로 기록했다. 성시 교독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상기하면서 고마워하고, 때로는 회개하면서, 때로는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대하게 한다.

찬양이 일반화되어 있는 게 현실이라, 성경에 없는 것일 뿐 아니라 가톨릭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서, 성시 교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신앙 전통 중 가톨릭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다. 교회 전통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니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평가받거나, 상급 기관에서 폐지를 결정하지 않는 한 중단할 이유는 없다.

예배 의식은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최근에는 시가 아니라도 주제에 맞는 성경 구절들을 모아 놓고 교독문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예배 주제에 맞게 기도나 신앙 경험을 표현한 글을 교독문으로 사용한다. 이는 교독문이 반드시 성경 구절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모든 예배에서 반드시 교독문을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교독문 낭독은 대부분 주일예배 순서에만 놓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나, 개인적으로는 십계명을 교독하는 일이 자주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성시 교독은 자칫 형식적인 순서로 끝나기 쉽다. 이 의식에서 예배자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그 안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행위가 고백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서 화답하며 교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시 교독은 신앙 선배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 하나님의 행위나 자신들 경험을 시와 노래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성시 교독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소 리듬감을 갖고 낭독하는 일은 가톨릭교회에서는 자주 볼 수 있으나, 개신교 전통에선 거의 찾아기 힘들다. 개신교 예배 도입을 고려해 볼 만하다.

5. 기도

다섯째, 기도다. 기도는 찬양과 더불어 예배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의식이다. 성경에 보면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만 제사 중에 기도한 것 같다. 예수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실 정도로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했다. 기도가 없으면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왜 그럴까? 기도란 무엇이기에 '호흡'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사실 기도란 인간이 자기 말과 생각을 하나님께 말하도록 허용된 유일한 언어 행위(talk to God)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갈 수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가 용서받았기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 기도는 바로 이런 특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기도에는 기도문을 이용한 기도가 있고 자유 기도가 있다. 신앙 선배들의 기도로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수 있는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배운다. 자유 기도는 기도문을 따르지 않고 드리는 기도이다. 한국교회는 대부분 자유 기도를 드린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주의 기도'라 불리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교회는 이 기도를 공예배에서, 특히 축도를 대신해서 예배 마무리를 알리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은 문제다. 주의 기도는 모범적인 기도로서 의미를 갖는다. 마땅히 기도로서 드려져야 한다.

예배 중 기도할 때는 우리가 누구에게 간구해야 하는지,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 기도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우리 필요를 공급받는다. 이런 기도로 성도는 일상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에 의해 필요가 채워짐을 배우고 또 알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게 무엇인지 모두 알고 계신다. 그리고 늘 우리 생각과 계획보다 앞서 행하신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간들이 하나님께 말하게 되는 때, 곧 기도하는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면 조금 짐작이 가능하다.

우리는 어려울 때, 낙심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기쁘고 감사할 때 기도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도함으로 먼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인간임을 인정하게 된다.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면, 이는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반대 경우가 된다. 교만의 대표적인 경우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미워하신다.

기도에는 중보 기도(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비는 기도로 '도고'가 더욱 정확하다. 중보라는 의미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만 사용되는 개념으로 사용을 자제해야 하나, 이미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회개(엄밀히 말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기도 중 행하기 때문에 보통 회개 기도로 불리고 있다), 감사(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 간구(개인적인 필요를 위한 기도)가 있다.

그리고 탄원이 있는데, 이것은 자기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이다. 경건하지 않은 듯 여겨지는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 존재에 대한 신뢰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기도이다. 욥과 시편에서 자주 발견된다.

예배 속 기도에는 성도를 대표해서 기도하는 '기도 인도'가 있고, 마지막에 행해지는 '축도'가 있다. 공중 예배의 기도는 기도자의 관심을 표현하는 시간이 아니다. 공적인 관심을 반영해야 한다. 교회를 위한 기도, 타자를 위한 기도, 곧 중보 기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중보 기도란 나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출석하고 있는 교회나 자신과 관계하는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병든 자나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같은 주님으로 섬기고 있는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마땅하다. 의미와 관련해서 볼 때 중보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타 교회와 지역사회가 연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임을 인정하면서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보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교회가 서로 연합을 실천하는 일이다. 매우 중요한 예배 행위다.

예배 마지막 순서로 있는 '축도'는 참석한 모든 사람을 세상에 파송하면서, 그들이 그날 들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고 동행하실 것을 원하면서 하는 목회적 행위이다. '축도'는 축복하는 기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기도보다는 목회적인 관심에서 행하는 일이다. 민수기 6장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소원의 형태를 취하는 축도가 있고, 선언으로 하는 축도가 있다.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을 향한 목회적인 기대와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축도는 일상으로 파송을 재현하는 시간이다. 축도로 성도들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축도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복과 은혜를 베풀고, 또 세상으로 나가는 성도들과 동행하길 바라며 행하는 일이지, 목사가 복을 베푸는 행위가 아니다.

축도는 관례적으로 목사가 하지만, 그렇다고 축복권이 목사에게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축복권은 모든 성도에게 있지만, 예배 의식에서 축도는 목사가 행한다. 목사가 부재하는 교회에서 예배 인도자가 민수기 6장 24-26절 본문을 읽는 방식으로 행해, 성도들을 세상으로 부르시면서 동시에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은 무리가 될까?

6. 설교

여섯째, 설교다. 예배의 스토리텔링에서 주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간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예배에서 가장 중시되고 있는 순서지만, 그 내용 때문에 가장 문제가 많은 시간이기도 하다. 잘못된 설교로 설교 자체의 의미가 많이 손상되었고 심지어는 예배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렇다고 없어져야 할 것은 아니다. 설교는 예배 순서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무엇보다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 타자로부터 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듣기에 좋은 말씀이든 그렇지 않든 '들음'을 실천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 해석에서 올바르고, 또 전하는 과정에서 듣는 자에게 오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건을 상징한다. 설교로 우리는 나 아닌 타자에게 들음으로써 하나님과 소통함을 배운다. 말하고 보고 듣는 일에서 내가 주체가 되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하나님은 타자를 통해 말씀하시며, 우리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말씀을 기억하고 또 들을 수 있다.

설교의 상징적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실패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을 주체로 삼는 데서 나타난다. 말이 많은 시대에 다른 사람들 말에 경청하는 것은 하나의 덕목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예배의 설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듣는 자로서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렇기에 설교는 충실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가 중시되는 것은 종교개혁 성격상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설교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여 마치 설교를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부정적인 사례를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예배하는 자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중요하다 해도 '예배=설교를 듣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설교를 듣고 난 후 예배를 마쳤다고 생각해서 예배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 그 자체이시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말씀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 곧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고, 또 그 일을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전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향해 어떤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근거해서 선포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 우리들은 시대와 때를 따라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교훈을 얻는다. 설교를 듣는 바른 자세는 설교를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이다.

7. 헌금

마지막으로 헌금(봉헌)이 있다.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나 현대 신앙인들이 교회 예배에서 가장 어렵게 여기는 부분이 헌금(봉헌) 순서라 한다. 사실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이 온갖 명목의 헌금(봉헌)을 강요해 교회 전체 이미지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교회 헌금을 잘못 사용하여 헌금할 마음마저 빼앗는 교회와 목회자가 없지 않다. 교회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

헌금은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물질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헌금(봉헌)은 모든 것이 주께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 행위이다. 인간이 결코 물질에 매여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행위이지, 결코 보상을 기대하는 의미에서 행해져서는 안 된다. 또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다. 이렇게 되면 무속이나 다른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복신앙으로 전락된다. 하나님 영광을 가릴 뿐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기금을 모으는 일이다. 교회 사역을 위해 필요한 기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헌금은 이 일에 공동체가 참여하는 일이다. 따라서 교회 사역은 엄정하게 선별되어야 한다. 특정인 생각에 좌우될 성격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낼 분명한 목적을 갖고 또 실천해야 하며, 그 과정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헌금하는 데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이 있다. 헌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지 인색하게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되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내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드릴 것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꾸짖거나 싫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동전 하나를, 만일 그것이 정성이 담긴 것이라면 수 억의 헌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인데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 헌금을 강요하겠는가? 헌금하는 사람들이 잊지 않아야 할 일이지만, 무엇보다 먼저는 목회자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회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성도들의 헌금을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 수입과 지출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성도들 스스로 헤아려 판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재정적으로 튼튼한 교회가 그렇지 않은 교회를 도우면 헌금을 강요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까?

헌금과 관련해 우리가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헌금은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예배 행위라는 것이다. 모인 헌금(봉헌)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운영과 선교, 장학 그리고 구제 및 복지 사업 등에 사용된다.

교회 사역의 범위가 확장하는 추세인데, 이는 그만큼 헌금이 많아졌을 뿐 아니라 헌금의 용도가 다양해졌음을 말한다. 헌금이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흔히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고 말한다. 헌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목회자가 많다 보니 헌금에 대한 성도들의 비판적인 소리는 계속되고 있고, 그 끝을 결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다.

예배는 어떤 특정 순서로 환원할 수 없고, 또 특정한 인물에 집중해서도 안 된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부터 떠나 하나님 앞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성도들과 함께 보내는 은혜의 시간이고 또 가능한 한 그런 시간으로 경험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결코 촉발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건이며,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만날 기대를 갖고 참석할 뿐이다. 충실하게 준비된 예배 순서를 통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기대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할 뿐이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결코 예측할 수 없고 다만 의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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