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백인 교회와 흑인 교회가 나뉘어 있다. 교회가 그래도 되나 싶지만 불과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 일부 남부 지역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법에 의해 다른 학교에 다녔다. 학교뿐 아니라 화장실, 음식점, 호프집, 버스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흑인과 백인의 경계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투쟁하고 희생한 결과, 법적으로는 인종 구분이 금지되었지만 교회는 예외였다.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지 48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종의 벽은 허물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흑인 인구 상당수가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할렘'으로 대표되는 빈민가가 사실상 '흑인 지역'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그 와중에 필라델피아 빈민가에서 흑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국 사람이 있다.

흑인 빈민가에서 한국 사람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슈퍼마켓, 세탁소, 패스트푸드 중식집에 가면 한국인 오너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회와 사역을 위해 그곳에 산다.

이태후 목사는 2003년 필라델피아 빈민가에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인 교회에서 사역한 지 7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6개월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깊이 고민하던 중에 빈민가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의 사역은 이미 많은 언론이 다루었다. 필라델피아 지역 신문에서도 그의 사역을 조명했다. 한국인 목사 사역을 한인 언론이 아닌 현지 언론이 다룬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근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인터뷰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언론들은 주로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다뤘다. 그러나 <뉴스앤조이>는 그의 사역보다 그가 사역을 하게 된 신학적, 목회적 이유가 더 궁금했다. 사역 이야기는 이미 많이 소개된 상황이라, 신학 이야기를 주로 해 보자는 기자의 요청에 이태후 목사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 미국 필라델피아 할렘가에서 사역하고 있는 이태후 목사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 목사님의 신앙 그리고 신학이 궁금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목사님이 자선 활동을 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교회가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죠. 그런데 그것이 복음 혹은 전도와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은 의아해 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게 자선 활동이지 목회는 아니지 않냐"는 거죠.

제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과 연결됩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미학 공부를 시작할 때는 박사까지 마치고 학교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공부하면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안에 팽배한 안티 기독교 분위기를 느끼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신앙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믿는 복음은 분명 기쁜 소식인데. 그 당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매스컴에 자주 나오는 일부 대형 교회들 그리고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고 직접 보여 주신 복음과는 너무 달랐거든요.

사람들이 안티 기독교가 되는 이유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예수의 삶과 가르침 때문에 안티 기독교가 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어요. 문제는 교회가 보여 주는 모습이 실제 예수의 삶과는 너무 다르다는 거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야 한다는 일종의 기대가 있거든요. 현실에서 그런 기대가 무너져요.

교회가 오히려 권력과 부를 추구하고, 설교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미명하에 권력과 부의 추구를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돌아서거든요. 요즘에도 뭐 달라진 것이 없죠.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홍 모 변호사가 실은 강남 대형 교회 출신 아닙니까.

- 그런 문제의식은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식이 '복음'하고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제가 이해하는 복음의 진수는 누가복음 4장 16절에서 21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 본문이 이사야서 61장이었다고 하죠.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이 설교를 가장 처음에 배치함으로 예수님의 미션을 정의한 것이죠.

우리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이해한 복음과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사야 61장 말씀에 한국교회가 주로 사용하는 죄, 용서, 믿음, 천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샤야서 61장을 어떻게 복음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이 말씀은 구속사적인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 이후에 족장 시대, 이스라엘 국가 시대,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 디아스포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의 역사를 예수님이 완성하시겠다는 의미거든요. 하나님의 구원은 한 개인이 예수님 믿어서 죽은 후에 하늘나라 가고 이 땅에서는 복받아서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왜곡되고 파괴된 하나님의 샬롬이 회복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영적 샬롬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 △심리적 샬롬 – 나 자신, 스스로와의 관계 회복 △사회적 샬롬 – 타인과의 관계 회복 △생태적 샬롬 – 환경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이 네 가지 샬롬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이 괴로운 거에요. 신문 사회면 기사에 나오는 그 수많은 문제가 넓게 보면 이 네 가지 샬롬 중 하나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죠.

사회적 샬롬이 깨지니까 우리 삶이 어떻게 왜곡되나요? 내 자식은 가장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하지만, 파키스탄에서 일곱 살짜리 어린이가 바늘에 찔려 가며 손으로 축구공을 만들어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월호도 마찬가집니다. 그 배에 내 아이가 타고 있었다면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강남에 있는 학교나 유명한 외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참사를 당했다고 하면 2년이 지나도록 이런 식으로 끌 수 있었을까요? 경제적, 정치적 힘이 없는 사람들의 아이들이니까 듣기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 내 죄를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라는 아주 전통적인(?) 복음의 이해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인가요?

복음이 뭘까요? 먼저 내가 하나님과 영적인 샬롬을 통해서 거듭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시작이죠. 그 다음에는 내 자아를 회복해야죠. 내가 얼마나 귀하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인지 인정하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처지와 환경보다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뜻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펼쳐 나가야 하는 것이죠.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면 과도한 자아비판, 열등감 같은 소모적인 감정싸움에 지나치게 흔들릴 수 있고요. 그 반대로 너무 교만한 것도 자기 자신과의 화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사회적 샬롬입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상대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그를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인종이 다르거나, 출신 지역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성적 정체성이 다르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게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창세기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줄 아는 겁니다. 나와 다른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와 화평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평이 복음입니다.

▲ 이태후 목사는 하나님의 샬롬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적 샬롬, 심리적 샬롬, 사회적 샬롬, 생태적 샬롬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든 것이라 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 설교에는 특별히 '희년'을 언급하고 계신데요. 그것도 복음으로 이해하시나요?

그렇죠. 사실 그것이야말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시고 나서 "이 말씀이 너희들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거든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희년을 제대로 실행한 적이 없다고 봅니다. 사람의 탐욕이 끝이 없으니까요. 역대하에 보면 바벨론 포로기 70년간 예루살렘 땅이 황무한 채로 버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 70년 동안 예루살렘은 그간 누리지 못했던 안식을 누렸다." 상징적인 말씀이죠. 7년에 한 번씩 땅을 쉬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그 땅이 누리지 못했던 안식을 주신 거죠. 그런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예수님이 희년을 선포하신 겁니다.

물론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 제도를 21세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희년 정신이 무엇이냐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토지가 유일한 생산 수단이었던 고대 근동 사회에서 희년은 경제적 평등, 정의로운 부의 분배를 뜻합니다. 그것이 완전 균등한 분배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 땅을 배분하는 과정에서는 말 그대로 균등한 분배를 했었죠.

그 이후에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부의 편중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연 재해도 있을 테고 경영을 잘못했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문제가 발생하면 생계를 위해 일시적으로 땅을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년이 일곱 번 돌아온 다음 해인 50년째 희년이 도래하면 본래 땅 주인에게 다 돌려줘야 했던 것 아닙니까? 결국 어떤 사정으로 한 가정이나 집단이 가난해지고 노예가 되더라도 그 가난과 신분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땅을 돌려준다는 것이 부의 균등한 재분배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수십 년간 타인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혹은 노예를 소유함으로써 잉여생산물을 축적했거든요. 성경은 축적된 잉여생산물을 토해 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노예가 됐던 사람들이 다시 자유민이 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겁니다. 새로운 시작인 거죠.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희년은 50년마다 오는 출애굽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게 희년입니다. 예수님이 희년을 선포하신 것이 그런 의미고 그게 복음이죠.

- 그렇다면 복음을 한 개인의 회심으로만 볼 수 없다는 말씀인데요.

희년을 경제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 당시는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땅을 가진다는 것은 오늘날 의미로 치면 자산을 소유한다는 의미거든요. 당시 사회를 상상해 보면 땅에 밀, 올리브, 포도나무를 심잖아요. 한쪽에는 목초지에 양과 염소와 소를 키웠단 말이죠.

그럼 식탁에 빵과 올리브오일, 포도주, 그리고 우유와 버터, 가끔은 양고기가 올라오는, 오늘날로 쳐도 상당히 훌륭한 저녁 식탁을 누리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선물하신 구원은 단순히 노예 신분에서 자유롭게 된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을 허락하신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선언하신 복음도 그런 구약의 의미를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죠.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88만원 세대에게는 정규직이고, 노숙자에게는 쉴 수 있는 쉼터와 쫓겨날 걱정 없는 임대주택 같은 거에요.

천국이 뭔가요? 죽어서 가는 '곳'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갇혀 있는 자가 풀려나는 것은 질병이나 사회적인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이죠.

구원은 개인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사건입니다. 폭력과 불의가 난무하는 사회에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 같은 사회적 약자, 우리 시대에서 적용하자면 일용직 노동자, 새터민,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이런 사람들에게 웰빙이 보장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면 사회적 약자의 웰빙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다른 사람들의 권익은 이미 보장이 된 거니까요.

- 그렇다면 흑인 빈민가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사역이 복음의 파생적인 활동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라는 말씀이군요.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런 거죠. "가장 약한 사람들의 권리와 복지가 보장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완성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은 자선사업이 아니라 복음이에요.

복음과 자선 활동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이원화된 사고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 예수님에게 "왜 그들에게 빵을 주시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나요? 예수님에게는 이 두 개념이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복음은 죄로 무너진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 죄의 영향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니까요.

우리 한국교회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구호물자를 받았습니다. 그걸로 한국교회가 성장했어요. 많은 구호물자가 한국교회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이죠.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걸 자선사업이라고, 복음하고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역사를 망각한 거죠.

- '구원',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핵심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구약에서 시작해 예수님까지 오는 과정으로 복음을 설명했는데요. 한국에 있는 많은 교회가 복음서 이후 신약으로만 복음을 설명하거든요. 더 정확히 말하면 바울의 서신서를 중심으로 복음을 설명하죠. 이 부분이 조금 의아스럽긴 합니다. 한국 대부분 교회가 따르는 보수 신학 관점으로 보자면 바울을 비롯한 신약 기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재정의한 것이 아니라 보충 설명을 했다고 봐야 하는데 정작 복음을 설명할 때는 바울서신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거든요.

미국 근본주의 신앙도 사실 비슷하죠. 제가 신학자가 아니라서 조심스러운데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이 심한 경우에는 완전히 다르다고 보는 신학자들도 분명 있지요. 저는 동의하지 않고요. 맥락을 벗어난 것이라 생각해요. 바울 사도는 랍비였기 때문에 구약에 대해 너무 잘 알았고,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바울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던 거에요. 바울서신은 구약 성경과 복음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초대교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이거든요. 목회서신이잖아요. 바울의 서신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복음서를 전제하고 읽어야 하는데, 오히려 보수 교회가 마치 서신서를 구약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 신앙을 너무 교리화시킨 것 같아요. 그것은 서양 학문 전통 때문이기도 한데요. 뭐든지 합리적인 사고 위에 체계화를 시키다 보니까 우리 신앙도 그런 체계화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구원과 복음을 교리화시켜 놓고 마치 옳은 교리를 알고 있으면 구원이 성취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교회도 역사적으로 이단 시비가 많다 보니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생긴 것 아닌가 싶어요. 교리가 복음은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복음은 삶 그 자체거든요. 제가 하는 사역도 사회사업, 소셜 미션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복음이에요.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잖아요. "항상 복음을 전하십시오. 필요하면 말로 전하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복음을 제대로 살아 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그런 삶의 지향을 갖는 거죠. 우리 동네 사람들이 제게 그래요. "목사님, 썸머 캠프를 보니 복음이 뭔지 알겠네요." 그런 반응을 볼 때 기쁘죠. 

▲ 이 목사는 한국교회 핵심 문제 중 하나가 신앙을 교리화시킨 것이라 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복음은 '삶'인데, 교리를 지나치게 중요시한다는 지적이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사역의 열매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목사님 사역이 '영혼 구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요?

제가 미국에서 교제하는 신학도 중에 한국의 진보적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가 제가 나온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면서 "내가 아는 아주 보수적인 목사님이…"라고 썼더라고요. 제 부친은 '순장로교단'이라는 아주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였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저는 어떻겠어요.

저도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에요. 죄 문제는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캠프에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이 실제로 죄 문제로 고민을 하거든요. 그런 고민을 하는 아이들에게 죄를 대속하는 구주로서 예수님을 말해 주죠.

그런데요. 우리가 죄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은 스스로 지은 죄보다는 (그들은) 사회적으로 그들에게 가해진 구조적 악에 의해서 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인종차별은 불과 몇 십 년 전 일이고 현재진행형이죠.

심지어 요즘의 도시계획도 흑인 빈민가를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거든요. 이분들이 가난한 이유를 게을러서, 공부하지 않아서, 일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한국 분들이 많은데요. 물론 그런 부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는 노예제도 때부터 지금까지 미국 사회가 흑인들을 차별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여러 정책으로 속박했다는 게 핵심입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흑인들을 '보이지 않는 철장'에 가둬 놨다고까지 표현을 했어요. 

그렇다면 이분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그들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는 게 먼저일까요? 더 나아가 이들이 겪은 고립과 차별이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불의한 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샬롬을 맛보게 하는 것이 복음이고 전도입니다. 그 가운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죠. 구원의 역사가 있으니까 목사인 제가 이 일을 하는 거죠.

긴 대화를 나누고 나서 '보수적인 목사'가 왜 흑인 빈민가에서 청소하고 아이들을 위한 캠프 사역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싸움이다.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우리가 생각했던 이 간단한 두 문장으로는 복음과 구원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겠다.

로마서 10장 9절 말씀이 생각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당시를 생각해보면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으로 시인했다는 것은 마음으로 믿었다는 것의 보증이다.

아니, 바울은 목숨을 내놓고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말한다. 2016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가 주라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만큼이나 합당한 각오와 희생 없이 '마음으로 믿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태후 목사님은 한국과 미국에서 주류적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가장 비주류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미국 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다음 편에는 미국 사회와 교회 그리고 그가 하는 사역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살펴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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