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저항의 본질

내년 2017년은 특별한 한 해가 될 듯하다. 적어도 개신교인들에게는 그렇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가 바로 내년이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하며 종교개혁 정신을 기념하려는 행사와 각종 학술 대회가 활발히 기획되고 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무엇일까. 흔히 카톨릭 교회가 개신교를 자신들의 한 분파로 간주하기 위한 비하적 표현으로 개신교회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의 본의미인 저항, 'Protestatio'는 결코 비하하는 개념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핵심으로, 더 나아가 교회의 핵심으로 발전된다.

저항이 교회의 본질이란 명제에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의 저항인지 그 함축된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생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속의 모든 이교적 가치로부터 저항한다. 이때 말하는 이교적 가치엔 기복신앙과 함께 현세주의에 뼛속까지 물들어 있는 속물근성까지 포함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령과 위배되는 모든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한다. 그러한 저항의 저변에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황폐한 사회구조, 공동체 정신 말살에 대한 저항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언급되어야 할 교회의 저항은 사실 하나의 테마에 집중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녀로서의 인간다움, 그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이를 가로막는 사회적, 현상적, 실존적인 부조리에 맞서는 저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요, 프로테스탄트의 본질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언명적 본질인 저항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는, 아니, 적이 누구인지, 내가 어떤 가치, 어떤 개념과 맞서 저항해야 하는지 '저항'에 대한 주체 의식을 상실해 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그 이유와 근거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 치밀한 추론을 통해 오늘의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영성의 초점을 어디에 자리매김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저항의 한 몸짓이 될 것으로 보는 건 필자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나, '인수분해된 개인, 그리고 교회'

교회는 순수의 기관이요, 진리의 요체이기에 현대의 시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맞물린 바퀴처럼 상호 간 거울 역할로 존재하는 걸 부정해선 곤란하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본 오늘의 한국 사회 핵심 키워드는 갑-을 사회의 출현이다. 갑의 사회로 압축되는 갑을의 정서, 그 원인은 걷잡을 수 없이 가속이 붙어 버린 소득 불평등과 빈부 양극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갑을 사회의 출범은 소득 불평등 심화가 낳은 악진화의 막장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갑을 사회는 사회적 폭력의 한 단면으로 기능한다. 이 경우 교회는 현대 한국 사회의 신흥 악마로 떠오른 갑을의 정서에 대해 저항은 고사하고 우회적으로 독려하고 방임하는 데 급급해 보인다. 

갑을 정서의 사회적 심화는 병적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갑을 정서가 집요하게 획책하는 건 조직의 무력화에 있다. 스스로 자신들을 상대적인 갑으로 여기고 그러한 갑을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공동체와 조직의 큰 그림을 보기보다는 개인과 개인 간의 능력 경쟁으로 싸움의 대상이 국소화된다. 병적 무관심은 이 사태 속에서 개인주의란 이름으로 대표되며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한 사회를 대표하는 개인주의의 살풍경, 병적 무관심의 모토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스며든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분명 교회라면, 프로테스탄트라는 전통의 구호를 보유한 영혼의 보루라면 이렇게 지독한 수준으로까지 경화된 병적 무관심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게 교회의 본질적 기능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병적 무관심을 도리어 영적 유토피아, 사후 천국의 소망이란 내세주의로 둔갑시킨다. 개인주의, 개인 축복에 대한 광적인 매달림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명분 아래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수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경우 교회는 사회에서 곪을 대로 곪아 버린 병폐 중 하나인 병적 무관심을 병적 무관심이라 부르지 않고 세속을 초월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엇박자의 심화 속에서 교회는 이른바 종말론적 무기력을 신앙 행위의 절정에 포진시키기에 급급한 속내를 적실히 보여 준다.

무기력의 두 얼굴 

한국 사회에 광풍처럼 몰아닥친 갑을 사회의 심화, 그로 인해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극심한 개인주의적 채근이 창궐한 세계는 무한 경쟁의 세계다. 무한 경쟁의 논리 속에 유기된 개인주의의 강요는 집요하고도 유일하게 오직 개인 능력 강화만을 요구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미래 불안에 몸서리친다.

직장인들은 또 어떤가. 1년 주기도 모자라 이제는 3개월에 한 번씩 자기 개발에 힘써야 하는 실정이다. 더욱이 프리랜서 예술가들은 당장 오늘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게 엄존한 현실의 살풍경이다. 이런 종류의 불안과 근심이 만성화되면 사람은 그 반발 작용으로 무기력, 무장해제, 의지 포기의 반응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이렇듯 현대 한국 사회의 병폐의 기원에는 모두 알고 있는, 하지만 문제의식의 보편화에 비해 문제의식의 해결 방법은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갑을의 정서에 깊이 물들어 있다. 이러한 갑을 구조와 정서의 지속은 결국 파편화된 개인의 각자도생을 강요할 것이며, 그 결과는 무관심, 무기력, 무의지의 악무한의 반복일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경우 무엇에 대해 저항해야 하는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과 결과를 떠맡기는 무관심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병적 무기력을 조장하는 모든 사회 분위기의 암울함에 맞서 새로운 연대,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치열하게 논의하며 저항의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저항의 문화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보다 강렬하고 절박한 생의 의지를 보여 줘야 할 의무와 영적 숙명으로 버티고 있어야 하는 것이 사회 속에서의 교회, 세상 속에서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저항 정신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저항보다는 무기력의 심화를 찬양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병적 병리 현상을 오히려 세속주의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한 걸음 물러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찬양하고 있다. 갑을 사회가 잉태한 수습이 거의 불가능한 곪을 대로 곪아 터진 모순의 환부 앞에서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찬양과 구호만 반복하고 있다. 그와 함께 개인의 각자도생을 강조하며 개인의 삶에 대한 성공을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증거로 설정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저항하는 교회, 저항하지 않는 교회

교회의 두 얼굴에서 나타나는 매우 미묘한 차이는 세속주의와 종교적 성역 추구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으로부터 교회는 점점 저항의 대상과 범위를 상실해 가며 원하든 원치 않든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거나 아예 세속화의 길을 걷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세속주의의 한 흐름에서 우리는 세속주의라는 기준을 종교적 성역 추구의 잣대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세상이란 잣대를 종교적 성역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다움에 대한 보편성의 추구는 세속주의냐, 종교적 성역 추구냐는 경향 차이에 의해 판단되지 않는다. 인간다움은 세속이든 종교적 성역이든 그 어디서나 보편적 가치로 태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의 저항은 인간다움을 실현되지 못함에 대한 탄식과 공분의 연대를 존중해야만 한다. 이때의 저항에서부터 교회는 종교적 성역 추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세속 도시 한복판에서 인간다움의 보편성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특별한 구원의 모티베이션(Motivation)을 제공하는 복음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동시에 꺼내 놓는 이중 전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속 도시의 타락과 부패에 대해 비판하고 더 나아가 환멸을 성토하는 건 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회의 본질적 특성인 저항은 그 가치가 환멸의 성토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이때의 저항은 타락과 부패의 고리를 어떻게든 끊어 낼 수 있는, 끊어 내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소리치거나 그러한 외침을 통해 인간다움을 회복하려는 이들과의 유연하고도 느슨한 연대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렇듯 저항은 인간다움의 상실성에 대해 비종교적 연대에 있어서도 아쉬워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것이 종교적 성역과 패권주의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빈자(貧者)의 정신, 참된 가난한 자의 정신의 출현을 열망하는 데 헌신되는 저항이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렇듯 저항의 이중 전략에 치밀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얽혀 버린 한국 사회의 문화 사회적 병리 현상 앞에 선 교회는 저항의 이중 전략에 대해 일단 귀와 입을 틀어막는다. 그와 함께 불가능, 불가지의 미답으로만 존재하는 내세의 그 어느 곳에 대한 갈망과 신비 추구를 기독교 가치의 시작과 끝으로 설정하는 데 급급하다.

이러한 편협한 범주에 스스로 갇혀 버린 교회가 쏟아 낼 수 있는 사자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저항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현대 사회의 가학적 경쟁주의가 쏟아 내는 유령의 폐허 위에서 그들, 유령들을 위로하는 대증적 위무 기관으로만 머물고 말 것이다.

종교개혁 500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프로테스탄트의 본령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교회의 저항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또 한 가지, 교회는 왜 저항해야 하는가. 여기에 마지막 질문. 왜 오늘의 교회는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솔직한 답이 교회를 교회답게 이끌어 낼 것이다. 복음의 도상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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