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박물관에는 평화박물관이 없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평화박물관의 풀네임은 '사단법인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평박)다. 말 그대로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해 세워진 단체다. 평박 정관 제2조 '목적'을 보면 명확하다.

"본 회는 전쟁과 폭력의 고통을 기억하며, 생명·인권·평화의 가치와 철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평화박물관 건립을 목적으로 한다."

평박이 시작된 지 17년째, 법인화한 지는 11년째다. 후원으로 진행되는 일이다 보니 진척 상황이 더딜 수 있지만, 이 기간이면 평화박물관 건립에 대한 어느 정도 윤곽은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언제까지 얼마의 기금을 모아 어디에 어떤 규모로 박물관을 지을 것인지 계획을 담은 마스터플랜(master plan) 말이다.

하지만 현재 평박에는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사업이 '없다'. 계획에 미달한 게 아니라 아예 계획 자체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박물관 건립이 추진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은 반헌법 시대

평박은 지금 한홍구 교수가 주도하는 '반헌법 행위자 열전'(반헌법) 편찬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반헌법 사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권력을 동원해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조작 및 각종 인권유린 등 우리 헌법의 가치와 정신을 파괴한 이들의 행적을 기록해 역사에 남기는 작업이다. 한 교수는 작년부터 이를 준비해 왔으며, 10월 평박 차원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를 공식 출범했다.

평박이 반헌법 사업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평박은 그동안 평화를 위한 각종 사업을 해 왔다. 정관에도 △평화 증진을 위한 교육 및 조사 연구 사업 △기타 본 위원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을 수행한다고 나와 있다. 반헌법은 평화와 한 번에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 지향점을 볼 때 큰 틀에서 평화와 관련한 사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대에 이런 작업은 더욱 빛을 발한다.

▲ 반헌법 사업은 작년 10월 공식 출범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페이스북 갈무리)

문제는 사실상 반헌법 사업을 빼고 다른 사업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재 평박에서 반헌법팀 활동가는 16명, 사무처 활동가는 3명이다. 이마저도 활동가 한 명이 6월 1일 자로 퇴직하면서 사무처 활동가는 2명이 됐다. 이사회는 5월 3일 35차 이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사무처 폐쇄를 명령했다. 사실상 반헌법 사업을 제외한 다른 사업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한홍구 교수의 뜻이다. 지난 3월 28일 열린 34차 이사회에서, 한 교수는 이사들끼리 다툼으로 장내가 소란한 가운데 "평화박물관 사업을 없앨 것"을 제안했다. 이유는 평박 후원이 계속 감소 추세에 있다는 것이었다. 평박 후원 약정서에는 △평화박물관 △반헌법 △손잡고 △베트남 중 어느 사업에 투자할 것인지 체크하게 돼 있다. 2015년 1년 동안 '평화박물관' 후원자는 94명이 줄어든 반면, '반헌법' 후원자는 1,998명 늘었다.

반헌법 사업 후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평박 후원 유치의 상당 부분을 한홍구 교수가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한 교수가 반헌법 사업에 집중해 모금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실제로 한 교수는 사무처에 반헌법 사업만 기재돼 있는 후원 약정서를 만들게 하고 그것으로 후원을 받았다.

한홍구 교수와 이사장 이해동 목사는 어떤 사업 하나가 잘나가면 그 사업을 중심으로 단체를 재편하는 건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무처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예 사무처를 새로 꾸릴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사무처의 사업은 일시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 이사회는 5월 3일 회의에서 사무처를 폐쇄하고 반헌법팀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건물로서의 박물관이 아니다?

반헌법 사업이 시기적절하고 대중의 공감을 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평박 입장에서 반헌법 사업에 집중할 수 있고 집중해야 한다. 이는 사무처 활동가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반헌법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을 모두 정리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이사회 결의라지만, 이해동 목사의 묵인 아래 한홍구 교수 뜻대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평박 이사였던 가수 홍순관 씨가 사임한 까닭도 평박에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사업이 없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홍순관 씨는 2005년부터 10년간 '춤추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100회 넘게 공연했다.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일이었다. 공연에서 평박을 소개하며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후원을 요청해 왔다. 그랬던 그가 평박 이사에서 물러났다는 점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심장하다.

이해동 목사와 한홍구 교수는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사업이 없다는 문제 제기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홍순관 씨의 사임과 관련해서도, 그가 실제로 평박에 기여한 부분이 별로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해동 목사는 기자와의 대화에서 "평화박물관 건립은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니다. 땅도 사고 건물도 지어야 한다. 당장 돈이 없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라고 되물었다.

한홍구 교수는 "처음부터 건물로서의 박물관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평박이 진행하는 활동들을 해 나가면서 박물관은 자연스럽게 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이번에 반헌법 행위자 열전이 편찬되면 이후에 국가 폭력 희생자들에 대한 평화 기념관도 세워질 수 있다. 종로 한복판에서 종자금 까먹지 않고 사무실을 차리고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게 건립 과정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무처 활동가들은 한홍구 교수와 이해동 목사에게 평화박물관 건립 의지가 없으며, 이는 10년 넘게 후원해 온 회원들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평박의 재정과 운영, 인사, 그리고 방향성마저도 한홍구 교수 입김에 좌우지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평화박물관의 미래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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