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하는 포럼이 열렸다. 포럼을 주최한 우종학 교수는 문자주의에서 벗어나고, 과학과 대화하며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우주 창조'를 주제로 과학자와 신학자가 만났다. 페이스북 그룹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가 주최한 첫 번째 오프라인 포럼이 5월 30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렸다.

창세기 1장 '천지창조'는 한국교회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창조과학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접근해 우주 나이가 6,000살이고 하나님이 하루 24시간 7일에 걸쳐 지구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지질학과 천문학의 발견으로 우주 나이가 140억 년, 지구 나이도 46억 년이라는 학설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과학계와 끊임없이 마찰하고 대립하고 있다.

이날 포럼은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와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의 기조 발제를 시작으로, 우리가 어떻게 창조 기사를 이해하고 어떻게 과학을 성경과 연관시켜 볼 것인지 고민하는 자리였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며,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300여 석을 가득 채웠다.

우종학 교수는 자연 세계 현상을 해석하는 학문인 과학과, 특별 계시의 텍스트인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 간 관계에 대해 말했다. 과학을 통해 밝혀진 놀라운 우주의 세계는 성경 텍스트를 뒤엎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발견과 신학적 해석을 토대로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구약에 나타난 우주와 세상 창조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발제한 김근주 교수는 "창조에 관한 대다수 본문이 시(詩)의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스라엘 민족 찬양의 중심 주제였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고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질서 있게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글자 그대로 믿었을 테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고대 세계관에 입각해 성경을 볼 것이 아니라고 했다.

김 교수는 창조과학이 "문자 그대로 창조 기사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노예제 찬성과 여성 안수 금지, 독재 권력에 대한 순종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 김근주 교수는 문자적이든 유비적이든 성서 자체가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씀의 메시지가 어떻게 다가오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이어진 패널 토의는 우종학 교수와 김근주 교수를 비롯해, 권영준 교수(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이택환 목사(그소망교회)가 이어갔다. 이날 주제는 '우주 창조'였지만, 중간중간 기독교인이라면 궁금해할 만한 질문들이 나왔다. 질의응답 식으로 진행된 패널 토의 사회는 이명희 CBS 아나운서가 맡았다.

-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고 되어 있다. 하루의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택환 / 하나님이 태양을 넷째 날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전 3일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하루라는 게 태양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나. 물리적인 '하루'가 아닌 문학적인 개념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창세기 1장 곳곳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반복하고 있는 게 그 힌트다.

창세기 저자가 24시간, 6일로 이해하고 창조 기사를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천문학적・지구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신학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루면 온 세상을 다 만들 수 있는데 굳이 왜 6일에 걸쳐 만드시고 7일째 쉬셨을까? 이것은 창조의 과정 가운데 안식일 신학이 들어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창세기 1장은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는 내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 성경 말씀을 문자적, 유비적으로 의미를 구분하는 게 목회자마다 달라서 혼란스럽다.

이택환 / 예를 들어 창세기 2장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의 코에 생기를 넣으셨다고 하는데,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하나님이 인공호흡을 하셨다는 것인가? 허파가 있으셔서 들숨과 날숨을 내쉬었다는 의미일까?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인간을 치밀하게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 같다.

우종학 / 창세기 1장 전체를 유비적으로 볼 것인지 문자적으로 볼 것인지, 어려운 점이 있다. 문자적이라는 게 뭐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빛이 있으라"를 어떻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까.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는 말도 사실은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 텍스트가 전하려고 했던 본래 의미를 파악해야지, 이것을 검증하려 한다든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건 문자적이건 유비적이건 틀릴 가능성이 높다.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메시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성경 저자가 믿고 표현한 내용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의미일까?

김근주 / 결론적으로는 그럴 것 같다. 다 받아들이지 않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가 성경 말씀을 취사선택해 오고 있다면, 본문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아전인수 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도 문자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일까?

이택환 / 예언자 발람에게 나귀가 말하는 내용이 민수기 22장에 있다. 나귀가 움직이지 않으니, 발람이 왜 안 가냐며 나귀를 죽이려 하자, 나귀가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못 가는 것"이라고 화가 나 얘기를 한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건 곧 부활을 못 믿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역으로 질문을 해 보자. 교회가 부활을 전하는 종교인가 아니면 나귀가 말하는 것을 전하는 종교인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발람 사건을 믿어서 구원받는가, 아니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믿어서 구원받는가?

근본주의・문자주의의 문제는 성경에서 무엇이 진짜로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구분을 못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것은 다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그럼 나귀가 말하는 것과 예수 부활도 똑같다는 것인가? 발람 이야기를 우화나 비유로 이해하면 부활도 그렇게 여긴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는 게 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김근주 / 복음서에 보면 부활의 목격자, 증인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부활 사건은 본문 자체를 보면 목격자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요나 물고기 뱃속은 목격자 없는 게 문제가 되나? 요나서 전체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요나와 그에 비해 뜻밖의 사공들 니느웨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요나서 연구할 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사실 여부로 신앙이 왔다갔다한다는 게 말이 될까? 예수 부활은 목격자가 관건이고, 증인도 수도 없이 나온다.

출애굽기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떻게 홍해가 갈라져 벽이 되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건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부활 메시지 자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종학 / 이런 내용을 의심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과학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 전지전능하시다. 나귀건 말이건 다 말하게끔 하실 능력이 있다고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데, 이 사건에서 실제로 나귀가 말한 것인가 아니면 우화적으로 쓴 것인가. 우화적인 것이라고 선택한다면 그런 선택 자체가 하나님의 전능성, 기적을 베푸실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 하셨냐 안 하셨냐는 다른 것이다.

▲ 패널로 나선 네 사람은 기독교가 과학과 충돌하거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아 보이는 부분에 대해 토의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성년창조론의 문제는?

우종학 / 매력적이긴 하다. 하나님이 6,000년 역사의 지구를 만드셨는데 46억 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지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을 지난주 창조하시면서 서른 살로 창조하셨다는 얘기다. 그래서 성년창조론이라고 부른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다면 아담이 1~29살까지의 기억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우주를 볼 때는 지구 생성 이후 46억 년의 역사를 거쳐 온 과정이 앨범처럼 다 있다. 그런 내용을 봤을 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건인데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보이는 것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거다. 그러한 점에서 성년창조론은 신학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권영준 / 성년창조론은 기본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우주가 아니라 박제된 우주로 가둬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을 죽여서 박제하면 모양만 남아 있지 기능은 없다. 예를 들어 우주를 6,000년 전에 만들었다고 한다면 138억 년은 박제된 것이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뿍 담긴 밥과 국, 반찬 먹는 거랑 3분 카레에 즉석 밥 먹는 것 중 어느 쪽 식사에서 사랑이 더 느껴지느냐고 묻는다. 하나님이 박제된 우주를 만들어 놓고 여기 살아라 할 때의 사랑과, 138억년간의 과정을 통해 자연 세계를 만들고 때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셨을 때의 사랑 중  어디에 정성이 더 담겼겠는가? 나는 후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 과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과학을 성경보다 더 위에 두는 것 아니냐.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많다.

권영준 / 물이 끓는 걸 보고 왜 끓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누구는 끓는 점에 도달해서, 누구는 배가 고파서 라면을 먹으려고 불을 켜서라고 대답한다. 모두 답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답을 찾아야 할 때 자연과학을 아무리 뒤져도 신학적 답이 안 나온다. 그런 경우 과학이 신학의 권위를 누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들은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잘 모르면서 좋은 내용이니 무조건 부르고 본다는 식은 곤란하다면서, 먼저 지도자들이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알 수 있도록 총회나 선교단체에서 프로그램을 열어 교육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는 말자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진화의 특징, 기본 요소로 말할 수 있는 적자생존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성품과 너무 다르지 않나? 하나님이 진화를 주관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우종학 / 진화라는 게 우발적이고 우연적이다. 자연법칙하고는 굉장히 다르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드러낼 수 있다. 자연법칙은 굉장히 기계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진화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자연법칙과 반대의 가치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내적 풍요하심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신학적 측면에서, 진화를 하나님이 가진 놀라운 능력의 또 다른 채널로 보면 훨씬 더 풍성하다. 진화를 통해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오셔서 왕이 된 게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기를 비우시고 고난과 고통의 길을 걷지 않나. 그렇게 준비해 오신 창조의 작업 속에는 진화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진화를 보면 이해할 수 없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닮아가는 과정으로 만들어 가는 역사로 본다면 더 풍성한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김근주 / 진화 자체가 '생명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과학자들의 발견이다. 우리 인간도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최초의 모습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사람이지 않다. 진화가 아닌 시간에 따른 변화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원숭이를 보면서 '쟤가 진화해서 사람이 됐다고?' 이렇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 계속적 창조는 창조의 미완성을 의미하는가? 종의 창조는 종의 진화를 의미하는가? 성경은 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했다고 하는데.

우종학 / 전통적으로는 무로부터 유의 창조가 일어났고, 하나님은 이후부터는 보존하신다는 개념이 우세했다. 그런데 근대과학이 등장하고 우주 나이를 알게 되면서, 그 긴 과정 동안 하나님께서 계속 창조하고 있다는 개념이 중요해졌다.

현재 우주에서 전혀 없던 게 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미 있는 에너지가 물질이 된다든지 하는 변화 과정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말 그대로 없던 물질과 에너지가 생겨야 하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다. 그 이후, 계속적 창조라고 하는 것은 뭔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가시고 우주 전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경륜하시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창조과학, 올바른 신학 아니지만 감정적인 대응 자제해야"

패널들은 창조과학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교회가 창조과학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탈(脫)창조과학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대화를 이어갔다.

- 한국교회에 창조과학이 득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조과학에 대한 평가는?

이택환 / 3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초기 창조과학자들은 근본주의자였고 문자주의자였지만 신앙과 스펙이 화려했다. 박사, 의사, 교수고 신앙생활도 반듯하게 잘했다. 그러니 교회에서 볼 때는 저 사람은 신앙적으로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모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한때 교회와 선교단체 수련회에서 특강하면 나중에 창조과학 시간이 제일 좋았다고들 했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제대로 된 과학도 아니고 올바른 신학도 아니다. 유령 과학이자 유령 신학이다. 교회와 선교단체가 배회하는 유령 과학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권영준 / 우리나라 사람들은 쉬운 답을 빨리 외우려는 면이 있다. 수업을 해 보면, 치밀하게 준비해 짜임새 있게 강의하면 "강의 잘 못한다. 어렵다"고 하는데, 열심히 농담하다가 마지막에 1.2.3 요점 정리해 주면 "명강의다"고 한다.

깊이 고민하기 보다 문자적으로 믿으면 되니까 득세하는 것 아닌가 싶다. 창조과학이 좋은 점은 창조 역사를 문자적으로 변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다. 그 창조과학으로 뭐 한 게 없다. 창세기 변증 외에 인류에게 어떤 유익을 끼쳤는지 잘 모르겠다.

김근주 / 원체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쉬운 대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다 보니 성경절대주의나 문자주의가 우리 교회 전체에 퍼진다. 창조과학뿐 아니라 여성 안수나 권력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 교회가 줄기차게 선택해 온 것 역시 '문자 그대로'다. 그대로 믿으면 고민할 필요 없는 것이다.

우종학 /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다. 하나님을 언어로 다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명확하게 알고 싶어 한다. 창조과학은 그런 면에서 화끈하고 매력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문자 안으로 하나님 끌어내려서 인간의 생각 범위 안에 하나님을 가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참 하나님의 모습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전능하지만 정의하기 어려운 하나님, 잘 풀리지 않는 하나님, 과학으로 정의되지 않는 하나님을 그대로 믿으면 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참석자들은 창조과학에서 벗어나려면 교단 총회와 선교단체 등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목회자들도 창조과학에 대해 잘 모르면서 '좋은 것'이라는 소리만 듣고 강사를 불러다 강의를 시켜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다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창조과학자들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우종학 교수가 주도해 만든 과신대는 '창조과학'의 문자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이성에 기반해 성경을 합리적으로 보고, 둘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그룹이다. 온라인상에서 활발한 논의를 이어가던 차에 마침 새물결플러스에서 번역한 <창조론자들>의 출간을 기념해 첫 번째 오프라인 포럼을 열었고, 20일 만에 300명이 참가를 신청했다.

참석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집중해 강의를 들었지만, 아직도 기존 가치관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한 참석자는 "구원받았는지, 구원은 무엇인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대답해 달라"는 질문을 네 명에게 던지기도 했다.

우종학 교수는 포럼을 연례 행사로 발전시키려 구상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6월부터는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더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 교수는 "과신대를 통해 과학과 신학을 다 인정하면서 서로 대화하는 흐름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흐름이 약하고, 주로 창조과학식으로 과학을 부정하는데 머물러 있다. 과학자들 중에도 크리스천이 많은 만큼, 이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성경과 자연을 읽어 가고 기독교를 변증하며 무신론의 다양한 공격에 대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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