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외침' 이정기 목사는 교회와 집회 '현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고 시작한 노래는, 어느 순간부터 타자를 향하기 시작했다. (사진 제공 청년외침)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오산시 양산동에 칼바람이 불던 2005년 초봄, 그를 처음 만났다. 살가운 성격에다 권위 의식도 없고, 노래까지 잘해 선후배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신학대 안에서는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연예인'으로 통했다.

그의 주특기는 CCM이었고, 활동 무대는 교회였다. '가객'과 'REASON'이라는 CCM 그룹 멤버로 활동하며 앨범도 냈다. 좋은 선배였지만, 나와는 농구를 빼고 공유할 게 없었다. 종종 터지는 학과·학교 문제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3년 전 우연히 그를 만났다. 교회에서 마이크 잡고 찬양 예배를 인도해야 할 그는 '집회' 현장에 있었다.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를 위한 촛불 기도회에서 그는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찬양이 아닌 민중가요를.

이후로도 집회 '현장'에서 종종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쌍용자동차, 씨앤앰 해고 노동자 집회, 일본군 '위안부' 수요 집회, 세월호 집회까지. 찬양과 교회밖에 몰랐던 이가, 현장에 발을 디딘 이유가 궁금했다.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지기 위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따스하고 훈훈한 봄바람이 불던 5월 25일 분당에서 이정기 목사(35)를 만났다.

말끔한 양복 차림을 한 모습을 떠올렸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헐렁한 검은색 티셔츠에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반바지를 입고, 최신 농구화를 신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행색이 왜 이러냐고 따지듯 묻자 "오늘은 쉬는 날"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수요일에 쉬는 부목사가 어디 있냐고 다시 묻자, 자신은 금·토·일만 출근하는 '준전임(파트타임 목사)'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출근하는 날이 적으니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도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목사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쉬는 날에는 주로 '현장'을 찾거나, 교인들을 만난다고 했다. '현장'과 '교회'는 새의 양 날개와도 같은 것이어서,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갈증' 그리고 '기지촌'에서 만난 '예수'

▲ '현장'과 '교회'는 새의 양 날개와 같다. 이 목사는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이 목사는 초등학생 때부터 동네 형들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형들이 기타 치며 찬양을 부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자리에 있든, 찬양하는 자리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마침 한신대 신학과에 들어가면 찬양을 실컷 부를 수 있다는 모교회 부목사의 말을 듣고, 진로를 결정했다. 2001년 한신대에 입학했다.

신학과는 예배 시간 찬양뿐만 아니라 민중가요도 함께 불렀다. 투박한 분위기와 시비조 가사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어느 날이었다. 선배들이 갑자기 찾아와 집회에 나가자고 설득했다. 이 목사는 할 일이 있다며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터진 직후였다.

"그때만 해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죠. 그냥 도망쳤어요.(웃음) 내 안에는 세계 최고의 예배 인도자, 그러니까 커크 프랭클린이나 천관웅 목사보다 유명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왜 그런 현장에 나가야 하는지 생각조차 안 했어요. 거기에 나가는 신학생들은 나와 길이 다르구나 여겼죠."

변화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 이 목사는 '괴리감'을 느꼈다. 학교와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가 달랐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 속 예수는 '만왕의 왕'이었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예수는 '밑바닥' 사람들 친구였다. 간극이 너무 컸고, 고민도 깊어졌다. 그러다가 하는 일에 회의감도 느꼈다. 찬양 집회를 인도하며 페이를 받는 게, 꼭 예수 팔아 돈 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회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2011년 겨울에 일어났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동두천 기지촌 여성을 돕는 두레방센터였다. 기지촌 여성들을 위해 성탄 예배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교회 행사 준비로 바빴기에 적당히 하고 와야 겠다는 생각으로 찾았다.

허름한 데다가 심하게 비좁은 공간에, 필리핀 여성 예닐곱 명과 두레방센터 관계자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가져온 건반을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작고 초라한 현장에서 '카이로스'를 경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이 목사는 말했다.

당시 예배를 인도하던 장빈 목사(두레방센터운영위원장)는 찬송가 대신 '섬집 아기',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를 불렀다. 이날 이 목사는 누구보다 큰 위로를 받았다. 노래에 '할렐루야'와 같은 단어가 들어 있지 않아도, '찬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배 도중, 앉아 있던 여성 옆의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바구니 안에는 세상 걱정 모른 채 잠자고 있는 갓난아기가 보였다. 여성과 결혼을 약속한 주한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이었다. 주한미군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고 한국을 떠났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곳에서 아이를 보니까, 예수님이 떠올랐어요. 누추한 곳에서 태어났던 아기 예수님이… 그리고 순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이 들렸어요. 이 말씀이 가슴에 확 새겨진 이후로 제 인생과 사역 방향성이 바뀌었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지극히 작은 자들이 너무 많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해고 노동자들, 세월호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끌던 찬양팀을 설득해 현장을 찾았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노래와 위로밖에 없었다. 처음 찬양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자기 스스로를 위한 위로 때문이었다. 이제 그 위로는 타자를 향하고 있다.

▲ 2014년 12월 29일, 씨앤앰 해고 노동자 문제 해결 촉구 3대 종교 기도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정기 목사. (사진 제공 청년외침)
▲ 이 목사는 세월호 집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려고 한다. 대한민국의 시간이 멎었던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왜 그런 것을 달고 다닙니까?"

이정기 목사는 허공에 팔을 저어 가며 쉴 틈 없이 이야기를 쏟아 냈다. 그의 오른 팔목에 걸려 있는 노란색 세월호 팔찌가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의 시간이 멎었던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월호를 기억하려고 한다. 이 목사는 교회 안에서도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닌다.

'노란 리본'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들도 있다. 하루는 원로장로가 이 목사를 불러 세우고 "왜 그런 것을 달고 다니느냐, 4월 16일 지났으니 떼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목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 가족들은 여전히 힘들어 하고,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그들을 위해 기억하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최근 노회에서 열린 목사 안수식에서 이 목사는 축가를 불렀다. 노란 리본을 옷깃에 단 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란 찬송을 불렀다.

"슬프고도 기쁜 일이 뭔 줄 알아요? '노란 리본'이 뭔지도 모르는 분들이 많다는 거예요. '정치적이니 떼라'고 하는 분들은 그나마 세월호 사건을 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우리 교회 집사님이나 권사님들 중에는 '옷깃에 단 거 뭐냐'고 물어요. 대화를 나눠 보니 정말 모르시더라고요. 찬찬히 설명해 드리니까, 자기도 (노란 리본을) 달겠다고 하더라고요."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세상 됐으면

이 목사가 찾은 집회 '현장'은 분노가 서려 있고 어둡다. 때로는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 목사는 현장에서 찬양 대신 '다행이다', '조율'과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 목사는 세월호 집회를 자주 참석하면서 마땅히 부를 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주변 음악인들의 도움을 받아 '메아리'라는 노래를 지었다.

흔들리는 자네 어깨
풀려 버린 자네 두 눈
도대체가 그냥 둘 수가 없어
그래 아무도 듣지 않는
자네 한숨 자네 절규
거 내가 다 받아 주겠네
우리 마주 앉지
그대 맘껏 울어
내 노래는 메아리야
그래 한껏 부르짖어
내 노래는 메아리야
그대 맘껏 울어
내 노래는 메아리야
그래 한껏 부르짖어
내 노래는 메아리야

영상으로 딱 한 번 들었을 뿐인데도, 멜로디와 노랫말이 기억에 남았다. 노랫말은 민중신학자 서남동이 제시한 '메아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서남동은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신학자들의 '메아리'가 민중신학으로 형성되어 간다. 신학함의 진정성의 정도를 메아리의 모델로 가늠했을 때, 그 신학의 진정성·민감성이 판명된다"고 했다. 이 목사는 "지극히 낮은 자들의 부르짖음이 '메아리'로 울려 퍼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노래는 '청년외침'의 네 번째 곡이기도 하다. 이 목사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청년외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청년외침'은 청년 예수의 외침의 줄임말로, 청년 예수의 정신으로 현시대를 향한 하늘의 뜻을 가락에 담아내는 것을 말한다.

누구를 향하여 서 있는가

▲ 이 목사는 세월호 집회를 자주 참석하면서 마땅히 부를 노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주변 음악인들의 도움을 받아 '메아리'라는 노래를 지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이 목사는 일요일 오전 8시 30분이 되면 교회가 아닌 백화점에서 예배한다. 교회 근처에 대형 백화점이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사내 직원들과 예배한다. 처음 교회가 백화점과 협약식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달갑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잘살게 해 달라고 축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예배에 나온 이들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줌마, 아저씨였다. 남들처럼 일요일에 쉬고 싶어하는, 교회에 나가 맘 편히 예배드리고 싶은 게 소원인 소시민이었다. 이 목사는 자기 선입견이 부끄러웠다. 회개 기도를 올렸다.

"판교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데, 처음에는 백화점 임원들을 위한 예배인 줄 알았어요. 마치 국가조찬기도회처럼.(웃음) 그런데 가서 보니까 예배에는 제일 밑바닥에 있는 분들만 나오더라고요. 식품점 같은 곳에서 일하는 분들 있잖아요. 쉽게 해고당해도 말도 못 하는… 아! 여기서도 내가 할 역할이 있겠구나 싶었죠. 주일뿐만 아니라 수시로 찾아가서 안부도 묻곤 하는데 다들 고마워하세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가도 중하지만, 누구를 향해 서 있느냐,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현장'과 '교회'라는 양 날개를 펼친 채 살아가는 이 목사를 응원하는 이들은 많다. 교회에 매인 선후배들은 SNS로 현장 소식을 전하는 이 목사에게 늘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 목사는 다른 목회자들도 자신과 같이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자기 신념과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투적이지만, '비전'이 무엇인지 물었다.

"앞으로도 현장에 계속 다니며 노래 부르고 싶어요. 아직 전 베짱이예요. 한 번 와서 노래 불러 달라고 할 때 가서 기웃거리는 베짱이. 진짜 활동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서 노래할 때만 가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아픔의 현장에 가고 싶어요. 그게 저의 노력이고 다짐이에요. 요 근래 시끄러운 옥바라지에 후배 신학생들이 가 있는데 보쌈 사 들고 방문할 거예요."

▲ '현장'과 '교회'라는 양 날개를 펼친 채 살아가는 이 목사를 응원하는 이들은 많다. (사진 제공 청년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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