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삼동 공용 화장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묻지 마 살인'인지 '여성 혐오 살인'인지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모 신문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고문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이번 주간 여름 학기(intensive course) 강의를 맡고 있고, 써야 할 논문과 여러 편의 강연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이나 SNS를 잠깐 살펴보면서, 이 논의의 방향 자체가 우려스럽게 생각되어 짧게라도 단상을 나눈다.

우선 이 사건을 '묻지 마 살인'인가 또는 '여성 혐오 살인'인가 라고 묻는 양자택일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선 가해자는 이미 소위 '묻지 마 살인'을 했다. 동시에 불특정 다수 중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것이 '우연성'이든 '고의성'이든 생물학적 여성을 자신의 폭력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이미 '여성 혐오'의 결과물이다. 자신 스스로 나는 '여성 혐오자가 아니다'라고 하든, 경찰 조사가 결론을 어떻게 내리든지 상관없이, 그는 여성을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또는 함부로 하고 싶은 존재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미 '여성 혐오'를 작동시킨 것이다. 따라서 양자택일적 논의 방식은 불필요한 '편 가르기'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할 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여성 혐오'가 어떻게 수많은 다층적 얼굴을 지니고 있는가를 사회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나는 바란다.

2. '여성 혐오(misogyny)'라는 개념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닌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inferior being)라는 것과 여성은 위험한 존재(dangerous being), 즉 남성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이 두 가지 인식은 노골적인 비하, 배제, 증오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매우 은밀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누가 '여성 혐오 사상'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드러내는가를 판가름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치밀하고 비판적인 분석과 조명이 요청된다.

3.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누가 '여성 혐오' 사상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흔히 '남성'만 여성을 열등하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는 인식으로서의 여성 혐오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 혐오 사상'으로부터 면역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즉 여성 혐오가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고 교육받고 사는 여성들은 가부장제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열등성과 남성을 유혹하는 유혹자로서 위험성을 지닌 존재라는 여성 혐오 사상을 지속시키고, 강화시키고, 정당화시키면서 유지된다. 따라서 남성만이 여성 혐오 사상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도 여성 혐오 사상을 내면화한다.

4. 페미니스트 연구에서 보여진 바, 자신의 수술을 주도하는 의사, 자신이 탄 비행기의 기장,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 등 소위 '지도자'로서 누구를 원하는가를 물으면 다수의 여성이 '남성'을 원한다. 그들 속에 '어쨋든 (somehow)' 남성이 여성보다 더 '믿음직'하고 실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여성 혐오의 자취이다.

강간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강간 희생자인 여성에게, 여성들이 우선 묻는 것도 '네가 도대체 어떻게 행동했기에 또는 무슨 옷을 입었기에 그런 일을 당했는가'이다. 즉 남성의 '유혹자'로서 '위험한 여성'이라는 생각이 여성들 속에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잠재해 있다. 이렇게 '여성 혐오'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또는 노골적인 방식으로 우리 현실에 침투해 있다. 가부장제 사회의 딸들, 어머니들, 할머니들은 이러한 여성 혐오를 내면화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여성 혐오의 기제를 작동시키고 있다. 21세기 한국 드라마는 여전히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에 의한 여성 혐오의 다층적 얼굴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5. 내가 이번 역삼동 살인 사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려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묻지 마 살인'인가 '여성 혐오 살인'인가에 대한 양자택일적 논의 방식의 한계다. 양자택일이 위험한 이유는 이 두 축 사이 얽히고 섥힌 복합적 관계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둘째, '여성 혐오'에 대해 지극히 제한적인 몰이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 혐오'가 마치 살인이나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만 실행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여성 혐오'는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얼굴만이 아니라,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운 은밀한 방식으로도 작동되고 있다. 여성을 매우 우대해 주는 것 같은 소위 '신사도'의 근원적 인식의 출발점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즉, 열등한 존재로서 여성 이해) 은밀하지만 강력한 '여성 혐오'이다.

여성혐오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 또한 여성 혐오는 노골적인 방식으로만 아니라 은밀한 방식으로 도처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학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위 기사는 강남순 교수(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강 교수의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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