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수가 같은 소리굽쇠 두 개를 함께 울리면 하나를 울렸을 때보다 소리가 부쩍 커진다고 한다. 이것은 소위 공명(共鳴)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공명 현상이란 진동수가 같아서 진폭이 큰 폭으로 증가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의 울림통이 악기 소리를 크게 키우는 원리가 바로 이 공명 현상에 있다.

공명 현상은 물리 실험실이나 악기를 연주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책 속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작가의 책을 읽는데, 그와 결이 같은 또 다른 사상가의 사상이 그 책 속에 녹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 독자는 책 속에서 진동수가 같은 사상이 자기 가슴속에 공명되어 부쩍 큰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을 경험한다. 이번에 대장간 출판사에서 개정되어 나온 박철수 목사의 <축복의 혁명>을 읽으면서 필자 역시 그와 같은 커다란 울림을 경험했다.

▲ <축복의 혁명> / 박철수 지음 / 대장간 펴냄 / 336쪽 / 1만 5,000원

저자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던 첫 번째 음성은 욥의 음성이었다. 욥. 그는 고난받는 이의 대표자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이 땅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이가 욥이 아닐까 싶다. 고난은 복과 거리가 멀다. 욥도 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강단에서 축복을 설파하는 목사들이 회피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마도 욥일 것이다. 가끔 욥이 인용되는 경우는 마지막에 욥이 배나 더 복을 받았다는 구절(욥 42:10)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욥을 소수의 복받은 자 목록(아브라함, 야곱, 욥)에 끼워 넣고 있다. 그 욥의 음성은 저자의 목소리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욥을 다룬 장은 9장이다.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책이 그러하듯 신구약 66권을 관통하며 지나는 성서의 일관된 메시지를 추적하고 있다. 그래서 서론격인 1~3장을 빼면 4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을 향해 줄기차게 전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11장도 빼야겠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저자는 특이하게도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대심문관을 끼워넣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저자는 구약과 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통전적 관점에서 성서가 말하는 참된 '축복(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적하고 있다. 그 와중에 저자는 9장에서 '욥의 복'이라는 장을 배치해 두었다.

기복신앙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논리'

저자가 9장 '욥의 복'이라는 장에서 의도한 바는 통속적인 기복신앙의 논리적 메카니즘을 파괴하려는 데 있었다. 이 때문에 9장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9장은 기복신앙의 밑바탕이 되는 기초를 향해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축복 설교라고 하는 것들 이면에는 늘 동일한 논리가 작동한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지적한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인과응보의 논리란 무엇인가? 신이 인간에게 복을 주면 인간은 신을 경외한다는 것인데, 그 역도 참이다. 즉 인간이 신에게 비위를 잘 맞추면 신도 인간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가 저주에도 적용된다. 신이 인간을 저주하면 인간은 신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고, 역으로 인간이 신을 경홀히 여기면 신도 인간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다.

통속적 기복신앙 기저에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인과응보의 논리를 저자는 '사탄의 논리'라 단언한다. 사실 욥기 초반에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참소하는 근거가 바로 그 논리였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여기서 '까닭'을 저자는 인과응보로 풀어 설명한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사탄의 논리는 "당신(하나님)이 욥을 사랑하고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당신을 사랑한 것이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당신을 경외하겠습니까?"이다(181쪽). 그런데 이러한 인과응보의 논리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고 부정하게 만든다"(181쪽).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주고받는 (상업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183쪽). 그리고 이것이 기복신앙이 '반(反)하나님적' 신앙인 이유고, 사탄적 논리라고 규정하는 이유다.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하나님적' 신앙은 무엇인가? 저자는 욥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 "(전략)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는가?"(욥 2:10) 하나님은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 아니고, 화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신앙이 바로 올바른 야훼 신앙이다. 이것이 기복신앙과 욥의 신앙의 결정적 차이다.

기복신앙의 전제는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잘 대해 드린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욥이 온몸으로 드러내 보여 준 야훼 신앙은 '하나님은 우리가 잘 대해 드리든 그렇지 않든 당신의 뜻대로 인간에게 복과 화를 자유롭게 내려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만일 기복신앙인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는데도 재앙을 겪는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모르긴 해도 그는 기꺼이 하나님을 버릴 것이다. 그러나 야훼 신앙으로 무장했던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나님과 논쟁했을까? 그가 하나님과 논쟁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통을 주신 이유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욥은 "좋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에게 얼마든지 화를 내리시고,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이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고난 자체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제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항의한 것이다. 분명 욥은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불평했다. 하지만 기복신앙인과는 달랐다.

기복신앙인은 그런 경우 미련 없이 신을 버린다. 그러나 욥은 도리어 하나님께 달려갔다. 하나님을 찾아 천지 사방을 헤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고통당하는 의미를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항의했다. 그리고 항의 중에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궁극의 신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바로 이 지점이 욥의 음성과 저자의 음성이 공명되는 지점이었다.

▲ 기복신앙이 지향하는 상업적 관계는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신앙인은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온몸으로 쓴 책

저자는 자신이 밝힌 대로 섬유근육통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28쪽). 언젠가 필자가 저자의 다른 책 서평을 쓰면서 밝힌 바 있다. 그 희귀병 때문에 저자는 "빛이며, 소리며, 종류가 무엇이든 몸에 다가오는 모든 자극을 버거워한다. 안대와 귀마개로 자극을 차단해 내지 않으면 하루를 무사히 보내기도 어렵다. 전화도 조금만 길어지면 금세 탈진이다. 밖을 나다닐 수도 없고, 누군가와 속 터놓고 한담을 나눌 수도 없다. TV나 인터넷도, 그 좋아하는 책도 오래 못 본다. 자판을 두드리거나, 연필로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현재 용인 변두리 정적이 감도는 아파트에 연금 아닌 연금 상태로 있다. 극도의 무료함만이, 반갑지 않은 그의 친구다."

이런 처지에 있는 저자가 '축복'을 논하다니… 어불성설이다. 통속적 기복신앙의 논리를 따른다면, "저자는 지금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박 목사가 고난당한 이유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일 것이다. 목회를 잘못했거나, 그가 평생토록 써낸 책들이 비성서적이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박 목사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런데 박 목사가 책을 냈다고? 그것도 축복에 대해 논한다고? 저주받은 자가 축복을 논하다니… 참으로 주제넘지 아니한가. 자신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지금 누구더러 훈수를 두고 있단 말인가!" 이런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진액을 짜내고 손끝으로 전해 오는 고통을 감내해 가면서 한 자 한 자 자판을 두드려서 <축복의 혁명>을 완성해 냈다. 그 와중에 여러 명의 도움이 필요했다. 욥이 고난 중에도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했듯이, 저자는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참된 복을 논증하고자 진액을 짜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책의 축복에 대한 논증은 강력하다. 단순히 논리가 아니라, 저자 자신의 온몸으로 입증하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욥이 궁극의 성화를 바라보았듯이 저자도 이 책을 통해 육신의 고통을 넘어선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 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참된 복이 주어진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욥의 음성과 공명되어 부쩍 큰 울림을 준다.

하나님인가, 바알인가

저자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던 두 번째 음성은 엘리야의 음성이다. 엘리야는 저자가 이 책에서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저자의 모습과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제사장과 대결했던 엘리야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잘 알려져 있지만 엘리야가 활동하던 당시 북이스라엘은 아합 왕이 다스리던 때로 비교적 잘 나가던 때였다. 오므리 왕가 집권기 동안 정치적으로는 안정되고, 경제는 발전하고, 외교는 큰 진전을 이뤘다. 하지만 그 사이 바알 신을 비롯해서 온갖 형태의 이방 신들이 북왕국을 서서히 점령해 버렸다. 이런 현상은 아합왕이 페니키아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더욱 심해졌다. 참된 야훼 신앙은 이교 신앙으로 빠르게 오염되어 버렸다. 급기야 엘리야 외에는 공공연히 야훼 신앙을 고백하는 이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서 바알 제사장 450명과 아세라 제사장 400명을 불러 맞대결을 신청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든 가운데 850대 1의 대결이 진행된다. 850명과 싸우는 엘리야는 혼자다. 갈멜산의 엘리야에게는 이중의 사명이 주어졌다. 첫째는 이교 신앙은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둘째는 야훼 신앙이 참 신앙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 두 가지 사명을 완수한다.

먼저 850명의 이방 제사장이 신의 이름을 부른다. 하루종일 신의 이름을 불렀으나 신은 대답치 않았다. 미친 듯 신의 이름을 부르고,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찔러 피까지 내 보았으나 허사였다. 이로써 바알과 아세라 신앙은 거짓임이 입증되었다. 엘리야의 첫째 사명이 완수되었다.

엘리야는 나뭇단 주변을 고랑을 파고 아예 나뭇단과 제단에 물을 끼얹어 버렸다. 그 물이 흘러 고랑을 가득 채웠다. 그런 다음 엘리야는 기도한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저들이 알게 하소서."(왕상 18:36) 그 기도가 끝나자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젖은 나뭇단과 제단,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에 가득찬 물까지 다 말려 버렸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증했다.

엘리야는 이 무모한 대결에서 그곳에 모여든 백성들을 향해 촉구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바로 이 지점이 저자의 음성과 엘리야의 음성이 공명을 일으키는 지점이었다. 저자는 먼저 한국교회 상황과 엘리야 당시 북이스라엘 상황을 일치시킨다. 그는 한국교회가 바알과 맘몬 신앙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일갈한다. 특히 10장 '바알과 맘몬 신'에서 그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바알 신이 구약시대 이교 신앙의 대표라면, 맘몬 신은 신약시대 이교 신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저자의 문제의식 속에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맘몬 신앙에 물들어 있고, 그 맘몬 신앙의 뿌리는 결국 그 옛날 북이스라엘을 오염시켰던 바알 신앙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맘몬 신과 맞짱 뜨는 저자가 바알 제사장들과 맞대결을 펼쳤던 엘리야와 오버랩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축복의 혁명>은 기복신앙과 잘못된 축복 설교의 가면을 벗겨 내는 책이다. 거짓 신앙의 허상을 폭로하고, 기독교인이 지향해야 할 축복의 자리를 되짚는다.

거짓 신앙의 허상 폭로

엘리야는 바알 신앙의 전파자들에 맞섰다. 마찬가지로 저자도 기복신앙 전파자들과 맞선다. 하지만 저자는 기복신앙 전파자들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박득훈 목사는 그의 <돈에서 해방된 교회>(포이에마)에서 맘몬 종교의 사제 이름과 그들의 경전을 열거하고 이를 분석한다.

<오중 복음과 삼중 축복>(서울말씀사)의 조용기, <야베스의 기도>(디모데)의 브루스 윌킨스, <깨끗한 부자>(규장)의 김동호, <긍정의 힘>(두란노)의 조엘 오스틴, 그리고 최근 뜨고 있는 <왕의 재정>(규장) 김미진 등이 박득훈 목사가 지적하는 그릇된 신앙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박철수 목사가 맞대결을 펼치고 있는 맘몬 신앙의 사제들도 아마 이들일 것이다. 비록 저자가 이름을 세세히 열거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의도는 바알주의와 맘몬주의라는 이교 신앙의 전파자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가 그랬듯이 저자는 그들에 비해 너무 왜소하다. 그들이 써댄 책들은 수만에서 수백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든다면, 저자의 책은 기껏해야 수천 부다. 아마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 저자의 책의 구독자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그들에 비해 가난하고, 나이 들었고, 병들었다. 이는 마치 "나만 남았습니다"라며 소외감에 벌벌 떠는 엘리야를 닮았다.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는 엘리야의 목소리와 더욱 공명된다.

엘리야처럼 저자는 먼저 거짓 신앙의 허상을 폭로한다. 그는 신구약을 오가며 소위 축복 설교의 내적 논리들을 분쇄하고 있다. 그가 5장에서 십일조에 대해 논할 때, 그는 십일조를 축복받는 수단으로 인용해 왔던 이교 사제들 설교를 정조준하고 있다. 6장에서 그가 성전에 대해 다룰 때, 성전을 축복의 표징으로 간주하거나, 한술 더 떠서 성전 건축하면 복받는다는 식의 통속적 축복 설교를 겨냥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복을 다루는 7장과 8장 역시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를 논술함으로써 아브라함과 야곱 본문을 축복 설교에 피상적으로 인용해 왔던 이교 사제들을 공격한다.

이때 사용한 저자의 전략은 '맥락 속에서 성서 읽기'다. 즉 구약과 신약을 통전적으로 읽고, 맥락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성서 문자에 충실한 듯 하지만 성서 본문을 따로 떼어서 제 편한 대로 인용하는 통례들을 뒤엎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축복의 혁명'

즉 저자는 신구약성서에 흩어져 있는 여러 축복 본문들을 신구약성서 전체 맥락 속에 위치시켜 재해석함으로써, 본문이 말하는 참된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즉 그는 신약성서의 프리즘으로 구약성서를 유기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성령의 눈'으로 성서를 본다고 말한다(64쪽). 이러한 시도는 4~6장 '구약과 신약'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두 번째 사명이다. 곧 그가 성서 전체를 통전적으로 보게 하고, 참된 성서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확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략은 저자가 다른 책을 쓸 때에도 종종 사용하는 전략이다. <성경의 제사>(대장간)에서도 유사한 전략을 구사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으로, 드러난 본문의 참된 의미는 이교 사제들의 그릇된 성서 해석의 기망을 폭로함으로써 그의 첫 번째 사명을 더욱 완성도 있게 성취한다.

이 모든 것에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고 선언했듯이, 저자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여호수아의 입을 빌어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촉구한다(201쪽). 또한 그는 자끄 엘륄의 입을 빌어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독자를 압박한다(221쪽).

저자의 주장은 이것이다. '언제까지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겠는가? 한국교회 성도들이여, 이제 맘몬과 하나님 중 한 신만 섬기라!' 그가 14장 '십자가'에서 제자의 대가에 대해 상기시킬 때, 독자들에게 만일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잘 따져 보라는 말까지 부연하고 있다.

세 번째로 본서에서 필자는 저자의 음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본 서는 구약에서 시작해 신약을 향해 달려간다. 구약은 7~10장까지 할애되었고, 신약은 12~15장에 할애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신약 4개의 장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만 의존하고 있다. 12장은 팔복에 대해, 13장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받는 비결, 14장은 십자가, 그리고 15장은 하나님나라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바울이나 여타 신약 저자들 교훈에 기대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주신 가르침을 직접 원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히 저자가 12장에서 팔복을 다룰 때, 예수 그리스도의 팔복 메시지와 저자의 주장이 너무도 잘 조화를 이루어서 필자에게 큰 울림이 있었다. 팔복의 특징은 한마디로 '전복'(upside down)이다. 도대체 어떻게 팔복을 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대체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받은 자이고, 어떻게 서럽게 우는 자를 복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팔복은 자연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교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축복의 혁명>이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이러한 전복적인 축복을 논술하는 것이다. 책 제목이 '축복의 혁명'인 것도 그 때문이고, 한완상 선생이 추천사를 쓰면서 "축복의 혁명적 메시지"라는 제목을 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선언한다. "참으로 '축복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26쪽).

가난이 복이라고? 마조히즘인가?

지금 한국교회에 유통되고 있는 기복신앙은 오복(五福)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장수, 부, 육체적 건강과 심적 평안, 명성, 그리고 보기 좋게 죽는 것이 바로 오복이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 교인들은 이런 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바로 이런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복을 혁명적으로 전복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축복을 다루는 책에서 '욥'을 복받은 자 목록에 넣을리 없으며, '십자가'를 축복받는 길로 소개할 리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축복의 혁명>과 팔복은 놀라울 정도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관의 전복 작업은 질문을 제기한다. 가난이 복이라고? 서러움당하고, 슬피 우는 것이 복이라고? 얻어맞고, 고난당하는 것이 복이라고? 고문 형틀이자, 사형틀인 십자가를 숭배하다니, 이 무슨 변태스러운 난장판이란 말인가. 마광수가 말한 대로 기독교인은 마조히즘(피학적 음란증)인가?

▲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복은 전복적이다. 하나님나라와 연결된다.

사실 기독교의 전복적 축복관은 하나님나라 사상 안에서 비로소 제자리가 잡힌다. 25년 만에 전면 개정된 본서의 마지막 장이 하나님나라로 끝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욥의 고난, 예수의 십자가, 바울의 환란을 복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나라가 복이다!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저자는 이번 전면 개정판을 하나님나라 관점으로 다시 썼다(27쪽). 하여 이러한 관점은 본서 전편에 깔려 있다. 예컨대, 그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에 대해 설명하면서 "의와 공도는 하나님나라"라고 했고(149쪽), "구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되는 기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와 바로 연결된다"(151쪽)고 주장했다. 또 팔복에 대해서 다룰 때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복은 철저하게 하나님나라 중심인 것"(250쪽)이라고 했고, 14장 '십자가'에서도 십자가와 하나님나라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여러 차례 주장한다(290쪽).

하나님나라가 답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가르침의 중심에 하나님나라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저자의 축복관 중심에도 하나님나라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왕국을 전복하는 왕국(upside down kingdom)이다. 같은 이치로 하나님나라 복은 세상 복의 전복(upside down blessing)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저자 박철수 목사는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차게 외쳤던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소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공명을 일으켜 부쩍 큰 울림을 전해 주는 이유인 것이다.

언뜻 보면 저자는 이 책으로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기복신앙과 싸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교회 강단을 점령하다시피 한 기복신앙과 축복 설교를 향해 정면으로 '아니오!(Nein)'라고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 가면서 독자는 저자의 의도가 21세기 한국교회를 향해 다시금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단순히 축복관의 교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2장 '복(축복) 논의의 중요성'에서 밝혔다시피 신앙의 본질을 새롭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그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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