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학의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신학은 이중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첫째, 신학은 신학으로만 존재합니다. 서구 사회에서 신학은 여러 학문 분과 중 하나입니다. 즉, 철학과 인문학과 신학이 같은 사유 방식 안에서 분화되었고 학문 간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 몰트만 같은 신학자들 역시 결국 성서신학, 현상학적 실존주의 그리고 에른스트 블로흐 같은 학자들과의 상호작용 가운데 발전했습니다. 절대적인 영역처럼 분류되는 개혁주의 신학이나 신칼빈주의의 경우에도 결국은 서구라는 종합적인 역사 과정 안에서 여러 문제들과 조우하면서 발전하였고요.

이는 학문이 기능하는 영역이 상호작용적이었으며, 충분히 정치사회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통이 불가능한 학문으로 고립되어 있고, 그만큼 절대화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둘째, 신학이 사용되는 영역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신학적 사유가 통용되는 공간은 신학교와 교회가 유일합니다. 문제는 교회조차도 초보적인 입장에 있고, 몇몇 특정한 사유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활발한 지적 작용이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신학교나 교회 밖으로 한 발짝 나가기만 하면 이 학문은 조금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차라리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 그리고 종교적 온정주의나 종교적 실천력만이 존중받을 뿐입니다.

신학은 매우 고립되어 있습니다.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이 되며 학문성은 경직되고, 교회 안의 사고 범주 정도에 머무르고 마는 것입니다. 신학이 의미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제자로서 세상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신학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2. 성서신학과 역사학은 통합니다

사실 신학과 역사학은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습니다. 결국 조직신학이 중세 아퀴나스의 방법론을 계승하는 가운데 철학적 사고와의 연관성 속에서 발전했다면, 성서신학의 경우는 근대 역사학이나 고고학의 방법론과 조우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성서신학이 밝혀내는 구약의 역사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구되는 고대 근동의 역사와 지근거리에 있습니다.

문서설이라던지, 역사 비평 같이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성서신학적 사고방식의 경우에는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역사 자료는 불완전하며, 모든 역사 자료는 검토되어야 합니다. 또한 텍스트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글쓴이의 입장, 당시의 정황 그리고 분석가능한 구조적 이해를 결합하여 인식하고 사고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 사건을 모형론적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합니다. 성서를 알레고리나 특정 신학 입장에서 재단해서 마치 출애굽 사건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원형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극히 부분적으로 타당할 뿐입니다.

히브리는 히브리 민족이 되기 이전에 충분히 사회 하층민, 유목민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출애굽 과정은 정치사회적 저항성과 사회변혁적 기능이 수반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텍스트에 담겨 있는 여러 내용은 문헌학적 비교를 통해 본다면 여러 오류들이 있을 수 있고, 문자 그대로에 비해 다소 초라해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서 출애굽 사건이 지닌 역사적 가치가 반감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마르틴 노트, 존 브라이트, 발터 아이히로트, 폰 라트 등의 학문적 연구는 역사학계가 역사를 바라보는 학문적 태도와 결코 배치되는 사고도 아닐 뿐더러 이런 식의 학문적 사고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해치는 것 또한 분명 아닙니다.

그런 식의 사고를 은혜롭지 못하다고 규정하며 학문적 연구 성과를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역사 가운데 넘치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오심과 하나님의 신비가 있으며 성서신학이 그것을 밝혀내는 귀한 빛이 되듯 역사학 역시 일반 학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학문이 지니는 가치 그 자체가 빛을 내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일 뿐입니다. 굳이 신학교에 왔다는 것은, 그리고 신학교가 신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학문성이 가진 위대함을 성취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3. 시대적 사명에 부응해야 합니다

사회 현실은 기존의 목회적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교회의 타락과 무능력함은 극도에 달했고, 세월호 사건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위기 가운데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드디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반성적인 비판 그리고 역사적 책임에 대한 최소한의 마음가짐. 안타깝게도 이런 것들은 진지한 출발선이 될 수 있을 뿐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특정 분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적 능력과 탁월한 실력, 그리고 투철한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서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본질적인 위기는 실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신학생들이 목회 현장에서 신학이 아닌 그간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얼룩진 관행과 기껏해 봤자 목회적 효과를 발휘하는 행태에만 의존해서 목회를 한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사실상 별 의견도, 준비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거나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 있고요. 더구나 목회자의 독점적 위치를 활용해서 성도들을 견인하기보다는 성도들을 독점하며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역사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단박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 가운데 더 깊숙이 드러나는 심각성이 역사적 문제들과 엮여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주로 철학적 사고에 의지한 교리적 사고가 지배적인데, 역사학적 사고는 어떤 학문보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신학생, 전도사님들, 그리고 목사님들. 지금은 역사를 공부해야 할 때입니다. 구령의 열정으로 강대상에서 아무리 피를 토하며 손바닥을 탕탕 친다고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도덕적이 되고 양심적이 된다고 해서 사회가 도덕적이 되고, 역사가 바뀌는 것 또한 아닙니다. 디트로이트의 뛰어난 목회자이자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인 라인홀드 니버가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의 동생 리처드 니버가 문화를 변혁하자고 외친 책이 이미 20여 년 전에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으로 들어왔고, 온갖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모조리 실패한 지금. 우리는 철저하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함께 손잡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갔으면 합니다.

'심용환의 쟁점으로 짚는 한국현대사' 강좌가 5월 11일부터 6월 8일까지 매주 수요일 2시에 열립니다. 장소는 장신대학교 소양관 606호이며, 수강료는 3만 원(5월 11일 강좌는 무료)입니다. 신청, 문의 및 자세한 사항은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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