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기에 있다. 복음과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이 결여됐고 성경적 가치는 훼손됐다. 세상적인 권력 의존과 정치 지향적인 교회 리더들은 무능하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대사회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배제의 언어와 대처를 보인다. 교회 사역자들의 일탈과 탈선으로 인해 몇 교회들은 내부 갈등과 대립으로 혼란스럽다.

정상적인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나 일부 물의를 일으킨 목사들의 경우, 대부분 은행 대출과 '빚'으로 얼룩진 교회 건물 유지의 자구책이나 심리적 동기에 주목해야 한다. 재정 확보를 위한 무의식적 긴박함과 초조감으로 내뱉는 비상식적 발언, 힘과 권력을 의지하는 친정권적 발언이나 아부, 비성경적 왜곡된 메시지가 노출되고 있다고 나름대로 분석한다.

언론이나 공신력 있는 사회 기관에서 이러한 교회의 부채 규모와 교회명을 밝히면 기독교계는 물론이고, 사회 평가와 판단에 의해 교회가 스스로 자기모순을 인정하거나 해체되어 올바른 교회를 중심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다. 오히려 이 시점에 적극적으로 교회가 새롭게 재편되는 것이 유일하게 살아나는 길인지도 모른다.

재정적 모순이 존재한 교회는 '성경적 교회론'을 벗어나서 오로지 구약의 성전 건물 중심 신앙에 치우치게 만든다. 은행 대출로 규모 있는 교회를 건축하고는 대외적으로 축복받았다고 허위 과장 광고를 한다. 그 비극적 결과는 헌금 압박과 무리한 전도의 강요를 통한 영혼들의 도구화로 드러난다. 교인들의 수평 이동이나 작은 교회의 와해를 가져온다.

여기에 시달리는 해당 교회의 영혼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이를 간파한 세상 사람들의 인지로 인해 크게 보면 교회의 순수한 복음 전도를 저해하는 역효과를 초래하게 된다.

▲ 한국교회는 현재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성경적 교회론을 벗어나 교회 건물을 만들기 위해 교인들을 도구화한다. 이는 교회 내 순수한 복음 전도를 막는다.

진정한 복음과 지향은 '갈릴리 예수의 길'

이 시대에 신실하고 깨어 있는 성도들의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실망과 절망감을 극복하는 방법. 진정한 복음과 교회의 성경적 지향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은 '갈릴리 예수의 길'이다. 물론 신학이나 신앙, 성품이나 리더십의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 현장은 '기, 승, 전' 갈릴리였고 '결'은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구속사였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후에 다시 갈릴리였다. 사람들의 사회적 통념과 달리 전통적인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서 갈릴리로 향하셨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자 멸시를 받던 갈릴리를 시발점으로 한 것은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예언을 이루는 길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의 언어인 히브리어, 일상 언어인 아람어, 갈릴리 사투리도 구사하셨을 걸로 짐작된다. 이방인들의 갈릴리,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졌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마 4:14-16)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 세 지역으로 분할되어 통치받았다.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했다. 예수님의 사역, 복음과 가치는 지역 출신 성분과 이로 인한 수치스런 열등감에 휩싸였던 갈릴리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자기 각성을 가져왔다. 자기와 타자에 대해 전인적(영, 혼, 육)인 존재로서의 주체성을 깨닫게 하고 세워 주었다. 그것은 자기와 타인에 대한 의식의 대전환이었고 존재 혁명이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예수님은 특별히 회당에서만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향했다. 때로는 자연환경을 비유로 삼아 쉽고 간결한 가르침을 전했다. 그 결과 갈릴리 사역을 통해 수많은 자들이 그분을 영접했고, 동시에 예수님의 세력을 시기하는 기존의 종교 기득권층들의 반발로 갈등과 대결국면은 점차 확대됐다. (요 5:16, 8:40, 11:48).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등장과 그가 할 중대한 일을 위해 길을 예비할 자가 나타난다고 예언했다. 바로 선지자 요한의 이야기였다. 요한은 광야와 사막에서 메시아의 출현과 회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 이 준비하는 자가 있어야 할 곳은 광야와 사막이었다.

이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선포하고 목격한다. 오늘날에도 현재 처해 있는 신앙의 기초가 광야와 사막이라면 은혜이다.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가진자이다. 이를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준비하는 자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40:3-5)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는 선명하고 담대했다. 성경에는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온다. 세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서 외쳤고, 누가복음 3장에서는 무리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제자들의 활동과 예수님의 사역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갈등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에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몰려왔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졌다"는 두려움 없는 과감한 메시지 선포는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세례요한의 세례 의식이 대중들의 반향을 끌자, 나중에는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그를 찾아왔다.

바리새인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은혜와 구원의 갈급함에 있었다. 세례 요한의 말은 이들 마귀의 자식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용케 그 피할 길을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발언이었다.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아, 예수님의 출현과 메시지 선포는 기득권층인 종교 권력과 크게 충돌한다. 그의 복음과 하나님나라 선포에 대해서 위기를 느끼고 이를 대적한 세력들은 크게  다섯종류의 권력이었다. 제사장(마 21:45), 바리새인(마 22:15), 헤롯 당(마 22:16), 사두개인(마 22:23), 율법사(마 22:25)였다.

▲ 예수님의 주 무대는 변방의 갈릴리였다. 부활 후에도 그는 갈릴리로 갔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변방을 벗어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권과 타락한 종교 권력, 세례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율법주의적인 교리들은 주로 이 바리새인들과 한 종파인 서기관들, 즉 율법사들이 제정하고 가르쳤다. 외적으로는 윤리적인 완성을 추구했고 많은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과 종교적 동기를 보시며  비판하셨다.

'회칠한 무덤'이란 바리새인들을 생명이 없는 '걸어다니는 시체'로 비유하신 것이다. 위선적 신앙을 비판한 대목이다. 이들은 자신은 행치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행할 것을 요구하며,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의를 나타내 보이려고 애썼다. 이런 사람들을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칭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 (창 3:15, 마 3:7). 그들이 장차 예수님의 증인인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고 한다. 이전에 악한 백성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모든 죄과에 대해서 징벌을 담당하게 될 것을 선언하신다.

유대교파 중 바리새파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지도자층이 많았다. 대표적 인물은 바울, 가말리엘, 니고데모이다. 이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자로 자청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성전을 지배하는데 반발하여 회당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회당은 백성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부활과 내세를 인정했고, 돈을 좋아했다 (눅 16:14).

서기관은 율법사, 랍비, 국가기관에 종사하는 일반 서기관은 주로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였다. 그들은 대부분 바리새인 출신이고, 그들과 경쟁적 관계에 있던 대제사장 계급은 대부분 사두개인이었다. 서기관들이 바리새인파에 대하여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직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 읽었으며 영혼의 존재, 부활과 내세를 부정했다.

사두개인의 어원은 '사독'이다. 제사장을 뜻한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주로 율법사로 일하는데 레위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유대교파 중 사두개파는 세상과 연합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헤룻궁이나 로마인 집정관들과 연합해서 정치적 권력을 소유한 집단이다. 성전을 장악하여 종교 활동을 했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에 천착하며 기득권 지키기에 혈안이었다. 모세오경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지 않은 유전은 인정하지 않아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했다.

예수님 시대에 종교의 타락을 엿볼 수 있다. 서기관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과부의 가산조차도 자신들의 지식과 지위를 이용하여 착취했다. 초대교회의 경우, 연보는 주로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대접하거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다. 성전 봉사자에 대한 재정 보조적인 성격과, 교회 공동체의 상호부조 및 자선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예수님 당시에 이미 유대교 안에서 종교세적 성격으로 걷었던 십일조와는 별개로 자율 헌금 제도이며, 초대교회 공동체도 이 제도를 수용하였다 (고전 16:1-2).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막 12:38-44)

유대인 속에는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경과 율법의 비밀을 잘 알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율법사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6장 12절에서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했다. 이들은 강렬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율법사와 서기관들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된다.

예루살렘은 종교 중심지였고, 메시아 운동의 적절한 무대였다.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갈릴리로 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방향이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 운동의 또 다른 전개 방식이었다. 그 새로운 질서의 전개, 변혁의 근원, 영적 질서의 대전환기의 지점, 그곳이 바로 갈릴리였다.

역사적으로 갈릴리 백성들은 그들의 생각이나 인격, 삶이 아니라 지역으로 범주화되고 판단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떨어진 소외 지역, 이방인들이라는 범주 존재에 의해 구속돼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갈릴리 사람들과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존재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복음을 통해 하나의 실존적 인간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개별적 인간이 독립된 인간으로 비로소 자기들의 영적인 정체성을 찾게 됐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드러내고 대표하는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우리는 이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메시아를 바라는 백성들의 관심은 달랐다. 민족적 대망인 메시아가 도래할 곳은 갈릴리가 아니라 찬란한 도시인 예루살렘 성도(聖都)였다. 그러나 갈릴리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의 생애에 3대 고난과 고통이 있었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당하시던 고통,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같은 땀을 흘린 기도의 고통,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고통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미리 앞일을 아셨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같이 흐르는 결사적인 기도를 드리고 각오와 결단을 하신다. 그러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 22:43).

▲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와 사역을 세상 질서에 맞추려고 하지 않으셨다. 아예 새로운 방식의 하나님나라 질서를 선보였다.

타락한 종교 권력과 시대를 극복, 갈릴리 예수

갈릴리 사역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제자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대적들의 손에 팔리셨고(마 26:15-16),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마 27:11-26). 하나님의 독생자(the One and Only)이시며, 죄인들의 구주로서 사람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가 십자가에서 운명을 다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이로 인해 제자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나타내 보이셨다(마 28:1-20). 신앙의 예수님은 '메시아', '태초의 말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본다. 십자가 처형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부활이 성취되었다. 제자들은 부활의 권능을 힘입고 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바,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순교까지 불사하면서 하나님나라 확장 사역에 임하게 된다(행 1:6, 2:47).

예수님은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기록이 있으나 대부분의 생활은 주로 이스라엘의 변방인 북쪽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했다. 갈릴리 지역 나사렛 동네에서 자랐고 30년의 지상에서의 삶을 이곳에서 사셨다(눅 2:39-51).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이전하여 이곳을 복음의 전진기지로 삼고(마 4:13)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으로 왕래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며 사역하셨다(눅 23:5). 이 덕분에 갈릴리라는 변방의 사람들은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9:1-2) 유대지역의 기득권과 전통에 묶여 있던 유대인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할 수가 있었다(마 4:12-16).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세상의 질서에 부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항이 아닌 새로운 메시지의 선포였다.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며 세상의 통치에 대립하는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은 세상의 질서와 다른 것임을 선포했다. 누가복음은 성령이 어떻게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끌었는가를 말해 주고, 사도행전은 어떻게 교회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전파되어 갔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 사역과, 그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화해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매우 상징적인 행보로,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를 지나가셨다.

사마리아는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놓여 있던 지름길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도 사마리아인들을 피하려고 더 먼 길을 택했다. 기존 관습과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시는 상징적인 행로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은 민족, 성별, 계층과 신분, 경계를 초월하고 극복한다. 예수님의 초점은 사역의 목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려는 의도로 유추한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와 이방 민족들의 잦은 침략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경원시했다. 순수 혈통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7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라고 되어 있다. 사마리아를 관통하던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복음을 전했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감당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골고다 언덕(Golgotha)은 예루살렘 성 다메섹 문 북동쪽 230m 지점에 있는 약 20m 높이의 작은 언덕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처형 장소로 사용되어 해골이 많았거나 혹은 그 지형이 해골처럼 생긴 데서 이런 지명이 유래한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존재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외면하고, 그 메시아를 처형할 성전 중심의 신앙은 몰락하게 될 것을 선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 직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하게 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탄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돌이키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으며, 마침내 그 아들까지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예수님 이후 A.D.70년에 로마의 침공으로 신앙의 기반이었던 예루살렘 성은 처참하게 무너진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의 고난을 예언하면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라고 전했고 부활 후에는,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무덤에서 만난 여인들에게도 "형제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전하라"고 명하셨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자가 되셨고,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롬 5:6)이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않은 자(롬 5:6)였을 때,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7-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 제자들은 절망 가운데 흩어졌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던 군중들은 금세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다른 두 제자는 엠마오로 떠났다. 또 다른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 낚는 일을 그만두고 고기 잡는 일을 시작했다. 어떤 제자는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숨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인간의 구원과 영생의 메시지를 전파한 제자들에 의해 발전했는데, 제자들 중바울(Paulus)은 기독교를 유대인들의 종교에서 민족과 국경을 초월한 세계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시각과 신앙적 시각의 균형은 중요하다. 진리의 영인 성령은 신자에게 진리이신 역사적 예수님을 알도록 인도하신다.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이해란 성령의 조명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리고 장사 된 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온 세상의 인류에게 영원한 구세주가 되신 사실을 선포하셨다.

▲ 교회 건물을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도구이자 수단이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떠난 교회는 한낱 건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대신 예수님이 먼저 가신 그 길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교회와 세계 변혁의 기원과 그 지점, 갈릴리 예수

신앙인으로서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은 대위임령(大委任令, The Great Commission)의 실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go)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baptize)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teach) 지키게(make disciples)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 18-20)

기독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를 통해서 지중해에서 세계종교로 발전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기록이 있으나 대부분의 생활은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 등을 중심으로 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도바울이 등장하면서 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돋움하게 됐다.

기독교는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점차 널리 전해졌고, 그 세력은 점차 커져갔다. 마침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탄생, 그 이전은 BC(Before Christ)이다. 그 이후를 AD(Anno Domini, 주(主)의 해)라고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 의인들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복락을 얻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초림 때에는 제자들과 여인들, 일부에게 현현하셨다. 그러나 재림 시에는 온 인류가 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다.

'새 예루살렘'(new Jerusalem)의 도래, 성경에 다시 오실 예수님이 미리 알려 주시고 제시한 나라이다.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뤄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계 3:12, 21:2), 죄와 아픔과 눈물이 없는 영원무궁한 하늘 예루살렘(히 11:10, 12:22), 천국(계 21:4), 거룩한 성(계 21:2)으로도 불린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위험 사회, 불안 사회라고 한다. 사회적 갈등으로 분노 사회라고도 한다. 미셸푸코는 인간의 처한 환경과 힘이나 권력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권력에 속해 있다."

이는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나라의 가치와는 충돌한다.

여러 가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들이 다가온다. 현실을 이겨 내고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예언자적 사명도 중요하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부조리한 현실, 세상을 보는 구별된 성도들의 관점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 예언과 그 성취의 관점에서 종말론적 구속사로 조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교회 건물은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도구이자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떠난 교회는 한낱 건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구약의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은 남유다의 멸망과 함께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민족은 포로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은 70년 포로 생활 후에 귀환해 스룹바벨 총독의 지휘하에 B.C.516년에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

솔로몬 성전은 제1 성전, 앞서 언급한 이 성전은 제2 성전, 또는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르게 된다. 학개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열악한 환경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신다. 초라한 성전, 그런데 학개 선지자는 이 성전이 솔로몬 성전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 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 건물 문화를 보면 많은 점을 시사한다.

갈릴리 예수님의 중요한 의미는 복음의 핵심이자 신앙과 사역, 리더십의 롤모델이다. 소년 예수, 청년 예수는 갈릴리 바다에서 천국 복음을 선포했다. 3대 사역인 전도와 교육과 치유 사역의 현장이었고 사역의 원형이었던 장소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국가나 사회적으로 인간소외나 지속적인 차별과 배제의 상태에서는 공동체 내에 냉소와 무관심, 불안과 공포, 갈등이나 폭력을 초래하게 된다. 성경이 대안이다. 가장 낮은 신분들, 아니 부자나 가난한 자나 신분의 귀천이 없이 모든 죄인들, 창기와 세리,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고 함께했던 갈릴리 예수님의 길이 구원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이 시대 교회변혁의 길이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3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치유와 기적과 축제(밥상 공동체)로서의 하나님나라의 생명운동이었다. 오늘의 현실에서 과거의 갈릴리 예수와 맞닿아 있는 그 기원과 지점, 복음의 근원을 드러내야 한다. 오늘의 시점에 과거의 기록을 되살려야 한다. 곧 그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진보이며 변혁 운동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예수님은 시대와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 내셨다. 우리가 갈릴리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의 오늘을 사유하고 이해하며, 한계를 극복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와 시대를 변혁하고 승리하기 위함이다.

크리스천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보화를 담는 질그릇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심장과(빌 1:8), 그리스도로 옷 입고, 흔적(갈 6:17)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고후 2:14)와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를 풍기며,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로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와 사랑을 세상에 흘려보내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영혼들과 함께 가야 하는 길, 바로 갈릴리 예수님의 길이다. 시대를 초월해서 유일한 대안이다.

길 위의 인간, 그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황준배 / 목사 · <기도와 크리스천 리더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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