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16일,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서 열린 기억식에서 공연하는 416합창단. 첫 줄 가운데(8번째)가 지성이 엄마 안명미 씨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어느 별이 되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새벽이 일렁이는 저 바다에
사랑하는 내 별이 뜬다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시민들로 구성된 416합창단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눈물이 차오른다. 얼마나 지옥 같은 고통을 이고 살고 있을까. 그래도 그들은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잊지 않겠다고, 살아 내자고 노래한다.

눈을 감으면 유난히 도드라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단원고 희생자 문지성 양의 엄마 안명미 씨다. 그의 목소리는 수십 년간 교회 성가대를 하며 다져진 것이다. 4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밖에 모르고 살던 안 씨였다. 주말에는 교회 말고 다른 데 가 본 적이 없고, 수요 예배, 금요 철야도 빠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새벽 기도를 가장 좋아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될 정도로 열심이었다. 우리네 엄마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교회에 열심인 아줌마였다.

2주기가 지난 4월 18일,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안명미 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기 전 그는 약을 한 뭉치 삼켰다. 무슨 약을 그렇게 먹느냐고 했더니, 당뇨, 빈혈, 갑상선, 무릎 등 몸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사고 전에는 건강했다. 이렇게 약을 달고 살 줄 몰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건 건강만이 아니다. 신앙적인 변화는 훨씬 더 크다. 인터뷰하면서 '비늘이 벗겨졌다', '반대편을 보게 됐다', '틀을 깨게 됐다'는 말을 많이 했다. 교회만 알던 지성이 엄마는 참사 후 시야가 더 넓어졌다. 그는 오히려 지성이가 자신을 키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딸 넷과 막내아들이 있었다. 지성이는 넷째 딸이었다. 아들을 기대하며 낳은 딸. 실망도 많이 했지만, 그래서 더 미안하고 애틋했던 딸. 지성이가 가고 나서 안명미 씨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인터뷰 내용을 그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았다.

▲ 4월 18일 안산 합동 분향소 앞 416TV 부스에서 지성이 엄마 안명미 씨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얼마나 교회에 열심이었는지

다른 유가족들이 그래요. '언니는 정말 순수하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느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그러더라고요. 교회를 떠난 유가족들이 많은데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체험을 많이 해서 도저히 없다고는 못해요. 원망은 많이 했어요. 그것도 안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저희 집안이 4대째 믿는 집이에요. 어릴 때부터 주말에 교회 가는 게 당연했죠. 주일학교에 개근상이 있다면 받아야 할 거야. 그렇게 살다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어요. 지성이 아빠는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잘 믿겠다고 해 놓고 교회를 안 가. 나 혼자 애들 들쳐 업고 다녔어요.

아이 둘 낳았을 때 지성이 아빠 사업 때문에 제주로 가게 됐어요. 가족도 멀어지고 아는 사람도 없다 보니 두렵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그때부터 정말 기도 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이전에도 교회를 꼬박꼬박 다녀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은 했지만, 제주에 와서는 정말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이럴 때였어요. 근데 왠지 아들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성경에 족보가 나오는 부분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다 남자고. 지성이 아빠가 기독교 집안이 아니어서, 그런 기독교 가문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임신을 한 후에는 진짜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 기도를 나갔어요. 정말 그렇게까지 기독교 태교를 잘한 아이는 없을 거야.

딱 낳았는데 딸인 거예요. 실망을 많이 했어요. 그때 기도 생활 열심히 하고 개인적으로 체험도 하면서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안 된 거예요. 배신감이 들어서 막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딸인 걸 감사하면서 살아라' 하시더라고요.

▲ 지성이는 5남매 중 넷째 딸이다. 엄마는 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 미안한 딸이었다. (사진 제공 안명미)

지성이는 그 다음 해에 생겼어요. 이제 별로 아이에 대한 마음이 없었는데 들어선 거예요. '하나님이 미안해서 (아들을) 주셨나 보다' 싶었죠. 태교를 열심히 했어요. 근데 또 딸인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었죠. 저번에 감사하면서 살라고 하셔서 뭐 원망도 못하고 그랬어요. 제가 너무 실망하니까 애 아빠가 늦은 밤에 어디서 노란 장미 네 송이를 사 왔어요. 그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죠.

그 사실도 잊고 있다가 지성이 장례 치르고 꽃 하나 놔 주려고 꽃집을 갔는데, 거기서 노란 장미를 보고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 애 아빠가 왜 하필 노란 장미를 사 줬을까. 노란 장미를 사서 지성이한테 놓고 왔어요.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하나님이 주신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성아 사랑해, 지성아 사랑해" 많이 해 줬어요.

저는 아이들에 대해 하나님께 딱 두 가지로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시라고. 그리고 한 아이도 하나님을 떠나는 아이가 없게 해 달라고.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아이들을 너무 옥죄는 것 같아 보여서요. 그냥 그렇게 기도했는데….


▲ 지난 3월 24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광장신학에서 안명미 씨는 지성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목사님 말이라면 껌뻑 죽었는데

지성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예뻤어요. 어렸을 때부터 탤런트 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지성이가 10살 때 안산으로 이사 왔어요. 중학생 때는 한 번씩 서울에 갔다 오면 연예인 기획사 명함을 받아오곤 했어요.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해서 계약까지 할 뻔했어요. 근데 얘는 연예인 되고 싶어 목매는, 그런 애는 아니었어요. 어려서부터 하도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별로였나 봐요.

성격이 톡톡 튀는 아이였어요. 절대 지지 않고, 자신감 있고. 친구들도 많았어요. 친구들이 써 준 편지를 보니까, "너의 그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냐"는 말도 있더라고요. 초등학생 친구 중에는 지성이랑 다른 중학교에 입학하게 돼서 엄청 우는 친구도 있었고요. 얘가 10살 때까지 제주에 살아서, 수학여행 갈 때도 옛 친구들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했어요.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고 해요. 스스로 꿈을 정하니 해야 할 것도 찾더라고요. 수학여행 가기 전까지 영어 스터디를 열심히 했어요. 지성이가 스튜어디스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가족들끼리 '그러면 우리 공짜 표도 나오고 그러는 거야?' 농담도 자주 했어요.

▲ 지성이의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스스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중에 세월호를 탔다. (사진 제공 안명미)

참사 이후에는 정말 죽겠더라고요. 새벽 기도 가서 펑펑 울었어요. 도대체 왜 그러셨냐고. 두 달 정도 지났나. 아는 전도사님 소개로 유명한 금식 기도원에 갔어요. 기도원에 가면 왜 왔는지 쓰라고 하거든요. 거기에 솔직하게 다 썼어요. 나는 세월호 유가족이라고, 하나님이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다고. 그 다음 날 목사가 강단에 서서 그러는 거예요.

"거기에 분명 살아 돌아온 아이도 있다. 살지 못한 아이는 부모님이 기도를 많이 안 해서 그런 거다."

그 길로 나왔어요. 그때가 3일 금식한 상태였는데, 바로 국회로 가서 다른 부모님들과 단식투쟁에 들어갔어요. 12일을 더 금식했네요.

지금 다니는 교회에도 서운한 점이 많아요. 목사님이 어느 날 그러시더라고요. "세월호는 정치적인 부분이 있어서 언급하기가 좀 그렇다"고.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했어요. 이 교회에도 희생자가 네 명이 있고, 그중 저희를 포함해서 두 명은 부모님이 함께 다녔거든요. 저는 당시 이 교회 온 지 9개월 정도밖에 안 됐고, 다른 한 가정은 20년 정도 다녔더라고요. 그분은 교회를 떠났어요.

작년 1주기 때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교회에서 세월호 유가족 위로 음악회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때 유가족들이 시행령 폐기를 주장하면서 삭발하고, 경찰과 대치하고 치열하게 투쟁할 때였잖아요. 싫다고 했어요. 그런 가슴에 스치기만 하는 위로는 싫다고. 하려면 세월호 얘기는 빼고 하라고. 아니면 나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음악회를 했는지 안 했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목사님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에는 목사님 말씀이면 껌뻑 죽었죠. 마치 목사님이 하나님인 것처럼 살았는데. 오히려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지? 어떻게 사셨지? 근데 지금 교회는 왜 이러지?

돌아보니 사고 이전에는 정말 교회 일만 하면서 살았더라고요. 교회 일만 신경 쓰기도 바빠요.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참여하다 보니 만날 입이 부르터 있는 상태였어요. (두 손을 양 눈 옆에 갖다 대면서) 딱 이렇게 산 거예요. 다른 데 시각을 돌릴 수도 없고 돌리지도 못하게 하고.

근데 '교회 안에만 신앙이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대한민국 사람인데, 대한민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 없고 교회 일만 신경 쓰는 게 과연 맞는 건가요? 저희 말고도 고통당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데. 교회 프로그램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비늘이 벗겨진 거죠.

교회 생활을 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투쟁하고 와서 또 수요 예배를 가야 하나? 녹초가 된 상태로 금요 철야 예배에 가야 하나? 구역 모임도 못해요. 제가 괜히 분위기 깨는 것 같아서. 그때부터 다른 건 다 정리하고 지금은 주일예배에서 성가대만 해요. 그래도 지성이 갈 때 교회에서 잘해 줘서 그거 때문에 다니고 있는 거예요.

▲ 지성이가 가고 나서 엄마는 열심히 싸운다. 지성이와 같은 아이들, 그들의 부모님들을 위해서다. (사진 제공 안명미)

교회도 달라질까

엊그제 동생한테 전화가 왔어요. 누나 투쟁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좀 챙기라고요. 그래서 그랬어요. "이 나라가 달라지면 세월호 때문에 바뀐 줄 알아라". 저번에 소명학교에 일일 교사로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느꼈어요. 이 아이들, 이 부모님들을 위해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저는 원래 말을 잘 못해요. 워낙 예전부터 이 사회의 관습, "여자가 나서면 안 좋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자라서요. 근데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요.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라도 꾹꾹 눌러 담았거든요. 이제 지성이 때문에 할 말을 하게 돼요. 교회의 반대편 모습도 보게 되고, 나를 가두어 두던 틀도 깨게 되고. 오히려 지성이가 날 키우는 것 같아요.

2주기 때 힘을 좀 얻었어요. 분향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올지 몰랐거든요. 광화문에도 비가 그렇게 오는데 정말 많이 오셨더라고요. 우리가 죽자 살자 뭐라도 하니까 되는구나. 아직도 우리 곁에 함께할 사람이 많구나. 방송에도 우리 소식이 조금씩 나가기 시작하고요. 이제야 좀 뭐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 좀 달라지고 있달까. 사실은 그게 정상인데 말이죠.

'교회도 좀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에게 진짜 위로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는 일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특별법이든 특검이든 정치인들이 받아 줘야 하는 건데. 정치가 아니면 풀 수 없잖아요. 그런데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를 꺼리고 유가족을 매도하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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