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 군의 큰누나 박보나 씨(23)는 참사 이후 유가족 부모님들과 함께 '일'을 해 왔다. 2014년에는 세월호를 비방하는 인터넷 게시물을 찾아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일을 했고, 이후에는 4·16TV를 도우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희생자 형제자매들이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현장에서 보나 씨는 거칠고 분노에 찬 모습이었다. 세월호와 관련한 집회에서 단상에 나와 "제발 기도만 하지 말고 행동해 달라"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페이스북에서는 하루에도 몇 십 개씩 세월호 소식을 퍼 나르고, 인터넷에 비방 글이 떠 있다면 제보해 달라고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최근 공식적으로 416가족협의회에서 맡은 일은 없지만, 희생자 형제자매들과 생존 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출간 기자회견을 하고 간담회에 참석하는 등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

▲ 지난 4월 5일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보나 씨. (사진 제공 창비)

참사 2주기를 눈앞에 둔 4월 12일 보나 씨를 만났다. 투사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대화를 나눠 보니 완전 딴판이었다. 행동거지도 조심조심하고 말도 조근조근 했다. 점심으로 찜닭을 같이 먹었는데, 하나 나온 다리를 자기가 먹었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똑 부러지게, 당차게 말할 줄 알았다고 하자 답한다.

"원래 남들 앞에 서는 거 안 좋아해요. 말도 잘 못하고. 근데 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들도 다 마찬가지잖아요. 평범한 분들이 다들 투사가 되셔서…."

여리고 착한 평범한 대학생을 투사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보나 씨와 사고 이전의 성호 이야기부터 이후 세월호와 관련한 일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안산에 있는 희생자 형제자매 공간 '우리함께'에서 했다.

▲ 가톨릭 사제가 되고 싶었던 성호. (사진 제공 박보나) 

빼앗긴 꿈

부모님과 네 남매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셋째인 성호는 특히 더 신심이 깊었다. 중학생 때부터 가톨릭 예비 신학교를 다니며 사제의 길을 걸었다. 진짜 사제가 되어야 할까 갈팡질팡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정했다. 신부가 되기로 했다. 주말에는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밤늦게까지 청소년부 아이들을 챙기고 돌아왔다. 신심이 깊었던 엄마는 "우리 박 신부, 박 신부" 하며 좋아했다.

성호는 가족들이 봐도 뭔가 특별한 아이였다. 어렸을 때 큰 사고를 몇 번이나 당했다. 두 살 때 오토바이가 치고 지나갔다. 머리를 찧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축구하다가 눈에 공을 세게 맞기도 했고, 차바퀴가 성호를 깔고 지나간 적도 있었다. 가슴 철렁한 상황이었지만 성호는 몇 군데 까진 것 말고는 이상이 없었다. 의사도 기적이라고 했다. 중학교 때는 높은 담에서 떨어졌다. 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높이인데, 인대가 좀 늘어난 것 외에는 멀쩡했다. 가족들은 그런 성호를 보며 정말 '주님이 지켜 주시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4월 16일,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성호는 살아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요. 주님이 지켜 주시는 아이였으니까요."

보나 씨는 성호가 꿈을 '빼앗겼다'고 말했다. 누군가 빼앗았다는 말이다. 그는 가해자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빼앗긴 거라고 생각해요. 성호가 돌잔치 때 실을 잡았어요. 귀도 크고. 어른들이 그런 사람은 장수한다고 하잖아요. 가족들도 '성호야 너는 진짜 오래 살 것 같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분명히 성호한테는 살아갈 시간이 더 많이 있었을 텐데. 이런 사고가 운명은 아니잖아요. 원래부터 이만큼 살고 갈 아이들이 아니잖아요. 운명이 있다면 차라리 오래 살 운명이었죠.

저는 첫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누군가 이 일을 꾸몄다는 걸. 사고 당일에도 부모님이 아프리카TV를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공중파에 나오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또 누가 16일 저녁에 세월호 사건으로 묻힌 일들을 정리해 놓은 걸 봤어요. 그때 느꼈어요. '아, 내 동생이 그냥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하고 있구나'."

▲ 성호는 네 남매 중에서도 특별한 아이였다. 맨 왼쪽이 성호, 그 옆이 보나 씨. (사진 제공 박보나)

성호는 마음이 여리고 순둥이처럼 착했다. 보나 씨보다 더 느긋한 성격이었고 화도 잘 내지 않았다. 가족들은 성호를 '나무늘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랬던 성호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키도 훌쩍 크고 성격도 어른스러워졌다. 엄마 장바구니를 들어 주고, 누나들이 늦게 들어올 때면 마중도 나갔다. 성호와 함께 걸으면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이제 좀 듬직해졌는데, 보나 씨는 그런 성호를 빼앗긴 것이 아프다.

2년이 지나 더욱 슬픈 것은 이제 성호의 얼굴, 목소리, 성호와 함께했던 일상이 점점 잊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생활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기에 그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이 모두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보나 씨는 망각의 기능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에게 이야기하고, 간담회에 참석해 이야기하고, 기자를 만나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투사가 되었다

보나 씨는 참사 이후 엄마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가족대책위 일을 하게 됐다. 전국으로 서명도 받으러 다녔고, 국회·광화문·청운동에서 노숙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부모님들보다 인터넷에 익숙하니 세월호 관련 온라인 게시물을 모니터링하는 일을 했다. 그중에서도 정신적으로 특히 더 힘든 일, 세월호 가족들을 비방하고 희생자들을 욕하는 글을 찾아내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일을 했다. 가족들이 특별법을 요구할 때 그들을 조롱하는 비인간적인 글이 급증했다.

"시민 중에 모니터링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는데 어차피 고소를 하려면 가족들이 직접 봐야 하거든요. 부모님들이 보기보다 그냥 제가 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처음에는 악플 보면 손도 떨리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적응이 됐어요. 그런 글을 올리는 사람은 패턴이 비슷하더라고요. 개개인들에게 분노하기보다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이 참사의 주범들에게 더 화가 났어요.

힘들 때는 도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 건가 고민도 했어요. 근데 분향소 다녀와서 아이들 얼굴 보고 하면, 너무 미안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다시 들더라고요. 저도 단원고를 졸업했어요. 다 제 후배들이고 실제로 희생된 분들 중에는 저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도 계세요. 부모님들과 희생자 형제자매들, 친구들, 단원고 후배들, 생존 학생들도 저에게 제보해 왔어요. 그러면 또 '내가 더 먼저 찾아내서 이 사람들이 그런 걸 못 보게 해야겠다' 싶었어요."

▲ 보나 씨는 참사 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했다. (사진 제공 미디어오늘)

비방 글 모니터링 후에는 416TV에서 일했다. 416TV는 세월호 유가족이 직접 현장을 찍어 전하는 매체다. 여러 현장을 다니느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을 재판하는 법정에 가서 진술도 했다. 부모님 대신 집회 단상에 서기도 하고 간담회도 갔다. 1주기 때는 희생자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명서를 만들어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갓 스무 살이 넘은 보나 씨에게는 모든 게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도 가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했다.

"성호가 시킨다고 생각했어요. 누나가 이거 하라고. 한번은 성호의 페이스북이랑 트위터 계정이 갑자기 해킹당한 일이 있었어요. 그걸 계기로 다른 희생자 아이들 계정을 찾는 일도 하게 됐어요. 성호가 그렇게 시키는 것 같았어요. 우리 후배들 위해서 일 잘하고 오라고. 성호가 다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열심히, 더 잘하려고 애썼어요."

원래 내성적이고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라 더 힘들었다. 사실 보나 씨는 어렸을 때 몸도 많이 약해서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 게다가 항상 부모님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기 어려웠다. 화가 나도 참는 성격이 더 심해졌다. 힘들고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지만 계속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코앞에 두고 보나 씨는 계속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축적된 분노와 스트레스, 슬픔의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저 하루하루 닥친 일들을 소화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호와 가족들이 다닌 성당에서는 누군가 사제가 된다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성호는 성당에서 귀한 존재였다. 참사가 일어나고 성호가 올라왔을 때, 안산 시내에는 이미 장례를 치를 공간이 없었다. 성호의 장례는 성당에서 '레지오장'으로 치러졌다. 원래 성인이 아니면 레지오장을 할 수 없지만, 성당 측 배려로 가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호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도를 많이 해 주어서 신부님과 교인들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여름이 되고 특별법 제정이 이슈로 부각되면서 성당은 관심을 껐다. 성호의 엄마가 가족대책위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언론에도 많이 나왔는데, 정작 온 가족이 다녔던 성당에서는 아무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성호가 그렇게 헌신하고 사제의 꿈을 키웠던 성당에서 오히려 "유가족들이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세월호 유가족이 보상을 엄청나게 받았다는 유언비어가 돌아다녔다. 위로한다며 던진, "하느님이 너무 사랑해서 데려간 것"이라는 말은 비수가 되어 박혔다.

▲ 성호는 세월호 침몰 후 8일 만에 올라왔다. (사진 제공 박보나)

보나 씨도 매주 미사를 드리기는 했지만, 둘째인 예나 씨와 성호, 그리고 막내가 성당 일에 더 열심이었다. 예나 씨와 막내 동생은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성당에 나가 열심히 활동했다. 어른들은 상처를 줘도 청소년들은 세월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성당에 가야 성호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나 씨도 성당을 떠났다. 막내 동생은 요즘 미사만 드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예나 씨가 성당에서 겪은 이야기는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 이야기가 최근 웹툰으로도 제작되었다. 바로 가기)

"교회나 성당이나 유가족들에게 '극복'을 강요하는 거 같아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거잖아요. 이건 304명의 생명이 죽임을 당한 일인데, 어떻게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조용한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이들은 진짜 주님을 만나러 오는 게 아니구나. 진짜 종교란 뭐지? 신앙이란 뭐지? 저 신부님은 도대체 뭘 믿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성호가 참사를 당하고 보나 씨도 신앙적인 회의가 들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성호가 올라오기 전에는 매일 미사를 드렸다. 주님께 더 많이 기도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호를 구해 주시지 않았다. 주님이 왜 그러셨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아직도 쌓여 있다. "그래도 지금 성호에게 잘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밖에 없잖아요." 지금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원망, 온 가족이 다녔던 성당에 대한 실망으로 신앙을 버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보나 씨는 유가족들이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던 신앙인들도 만났다. 거리의 신부들이 거리 미사를 드려 주었다. '진짜 기도가 이런 건가. 2,000년 전 주님은 정말 이렇게 하셨겠구나' 생각했다. 보나 씨는 성당 밖에서, 거리에서 진짜 예수를 보았다.

지난 4월 11일, 정의구현사제단이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2주기 미사를 올렸다. 70여 명의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고 800여 명의 가톨릭 교인들이 참여했다. 성호도 정의구현사제단에 관심이 있었다. 전에 성당을 담당하던 신부가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이어서, 시국과 관련한 일들을 자주 설명해 주었다. 성호는 이다음에 신부가 되어서 정의구현사제단도 해 보고 싶다고 했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투신할 사제 한 명을 잃은 것이다.

▲ 성호는 착하고 듬직한 아이였다. (사진 제공 박보나)

하느님도 아들을 잃었다

보나 씨는 종교인들에게 "기도만 하지 말고 행동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특별법 제정이 난항을 겪을 때, 자식을 잃은 가족들은 국회에서 청운동에서 풍찬노숙을 하는데, 교인들은 교회에 성당에 들어가 앉아 기도만 하고 있는 게 답답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해 달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곁으로 와 달라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말이었다.

2주기가 다가오는 지금, 보나 씨의 기대는 더 낮아졌다. 기독교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해 달라고 하니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제 기도도 안 하니까…. 잊지 않고 기도라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가족들이 이해가 안 될 때는, 예수님을 잃으셨을 때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참사 희생자 형제자매들과 생존 학생들이 입을 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실린 <다시 봄이 올 거예요>(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가 4월 11일 출간됐다. 희생자 형제자매 15명과 생존 학생 11명의 육성 기록집이다. 성호의 누나들, 보나 씨와 예나 씨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이 책을 보면, 형제자매들은 부모님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을 겪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젊은이들, 아이들을 쉽게 무시한다. 어른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아이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세월호 세대' 아이들에게는 더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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