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진이는 당찬 아이였다. 밝고 활발하며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했다. (사진 제공 박유신)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예진 엄마 박유신 씨는 언젠가부터 안산 합동 분향소 기도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목요 기도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분향소에서 드리는 성탄절·부활절 예배에도 참석한다. 예진 엄마가 기도를 올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사실 예진 엄마는 세월호 참사가 나기 전까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결혼하기 전 몇 번 간 적은 있지만 신앙생활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지난 4월 5일 만난 예진 엄마는, "제가 믿음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아서 할 얘기가 있을지 모르겠네요"라며 멋쩍어했다. "그래도 기도회에 꾸준히 나오시던데요" 하니 말한다.

"예진이가 교회 열심히 다녔어요. 나는… 나중에라도 우리 예진이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예진 엄마와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햇볕이 따스해 굳이 부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에는 연두색 풀이 올라오고 곳곳에 벚꽃이 피었다. 꼬마들이 선생님과 손잡고 소풍을 왔다. 엄마 눈에는 다 예진이다. 예진이 어렸을 때, 예진이가 뛰놀던 곳, 예진이가 좋아하던 꽃….

박유신 씨와 나눈 대화를 그녀의 시점에서 정리해 보았다.

▲ 박유신 씨를 4월 5일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서 만났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이제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게

예진이는 한마디로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였어요. 나서고 주목받는 걸 좋아했어요.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스타일이었죠. 예진이를 포함해 13명의 친구들이 함께 다녔어요. 다들 단원고 1학년 9반에서 만나 이름을 '금구모'라고 정했더라고요. 금쪽같은 9반 모임. 예진이는 친구를 좋아했고 친구들도 예진이를 좋아했어요.

예진이는 꿈이 확실한 아이였어요. 중학생 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 했어요. 방학이나 주말에는 친구와 함께 서울까지 공연을 보러 다녀오곤 했어요. 멋진 무대를 보며 꿈을 차곡차곡 쌓아 갔어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학원을 다니며 노래와 춤, 연기를 준비했어요.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연습해도 내 차에 타면 또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 걸 너무 좋아했어요. 수학여행 가서 공연해야 한다며 친구들과 늦게까지 춤 연습하고 그랬는데….

저는 예진이와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닌데 서로 성을 냈죠. 예진이나 저나 감정이 오래 가는 타입은 아니에요. 금세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고 떠들었어요. 아내와 딸이 이래서 아마 남편이 좀 힘들었을 거예요. 예진이와 친구처럼 지냈어요.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남편은 나를 타박했지만 예진이는 언제나 내 편을 들어 줬어요. 서로 힘든 일이 있으면 토로하는 그런 관계였죠.

이런 이야기를 이제 과거형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너무 슬퍼요. 금구모 아이들 중에 두 명밖에 살아오지 못했어요. 희생된 11명의 엄마들이 금구모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요. 아이들이 갔던 곳에 가서 아이들과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어요. 우리 예진이가 친구들과 같이 갔던 곳, 먹었던 것을 똑같이 경험하고 싶어요.

▲ 예진이의 꿈은 뮤지컬 배우였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연기 학원에 다녔다. (사진 제공 박유신)

마른 옷 입혀 데려오려고 했는데

2014년 4월 16일, 저는 일을 하다가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었어요. 학교로 갔더니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뜨더라고요. 진도로 내려가자는 부모님이 많아서 저도 내려갔어요. 애 아빠는 그날 천안 출장 중이었어요. 자기도 온다고 하기에, 예진이 동생이 집에 있으니 그냥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예진이가 물에 빠졌다 나와서 추울까 봐 옷이나 사 입혀서 데려와야겠다 생각했어요. 달랑 카드 하나 들고 갔어요. 정말 옷 한 벌 사 주려고 간 거였는데.

예진이는 없었어요. 남편과 아들이 내려왔고요. 하루, 이틀 지나도 예진이가 올라오지 않았어요. 현장은 아수라장이었죠. 머리가 멍해졌어요. 아들은 정신을 놓은 것 같았어요. 예진이는 4월 22일에 올라왔어요. 그날은 우리 아들, 예진이 동생의 생일이었어요.

너무 후회되는 게 있어요. 4월 16일 오전 9시 44분에 예진이에게 전화가 왔어요. 기울어 있는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나는 말 잘 듣고 개인행동 하지 말라고 말했어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빨리 친구들과 뛰쳐나오라고 했어야 했는데….

빈소를 차렸는데, 도무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남편은 나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어요. 쓰러지더라도 일 다 끝나고 쓰러지라고. 저는 그냥 멍했어요. 잠깐 자고 일어난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며 걱정했어요. 생각을 하면 복장이 터질 일이라서 정신을 놔 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누가 왔다 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 나요. 삼우제를 했나 안 했나 헷갈릴 정도로.

예진이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과 몇몇 분이 집으로 찾아왔어요.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위로해 주러 온 거였겠지만, 그 상황에서 무슨 위로를 받을 수 있겠어요. 친척들에게도 연락이 왔어요.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다음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애 아빠를 통해 문자메시지도 보내지 말라고 전했어요.

참사 100일이 지난 후 고비가 또 찾아왔어요. 그때 시청광장에서 100일 집회가 열렸는데요, 난생 처음으로 경찰과 대치해 봤어요. 광화문까지 가겠다는데 왜 길을 막지? 왜 우리를 못 움직이게 가두지? 구해 내지 못한 건 당신들이면서 왜 우리를 죄인 취급하는 거지?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졌어요. 난장판 속에 있다가 새벽 3~4시쯤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 나라가 너무 무섭더라고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어요. 잠도 오지 않고요. 술을 마셔야만 간신히 잠을 청할 수 있었죠. 그렇게 한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예진이 곁으로 가고 싶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얼핏 들었던 '자살하면 안 된다'는 말이 생각났어요. '마시다 보면 죽겠지. 이건 자살은 아니잖아?'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계속됐어요.

당시 유가족들이 서로를 체크하고 다녔어요. 가족 중에 혹시나 나쁜 맘 먹을까 봐. 내가 갑자기 안 보이니 다른 유가족 엄마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어요. 문을 열어 주지 않아도 계속 오더라고요. 그 엄마와 만나면서 다시 밖으로 나가게 됐어요. 나도 참 독하지. 차라리 미쳐 버렸으면 맘은 편할 텐데 미치지도 않고 이러고 있어요.

▲ 예진이는 참사 일주일 만에 올라왔다. (사진 제공 박유신)

나중에 예진이 만날까 싶어서...

예진이가 교회를 착실하게 다녔어요. 나도 나중에 예진이 만날까 싶어서 기독교 부스 기도회에 나가요. 아직 다른 교회는 못 나가겠어요. 믿음 생활 오래 안 해서 신앙 이런 건 잘 몰라요. 근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직 원망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저는 몰라도 애한테는 잘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진이 동생은 아예 마음 문을 닫았어요.

"누나가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돼?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래도 목요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 주시는 많은 목사님, 기독교인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기독교인 유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어요. 수요일에 우리끼리 하는 성경 읽기 모임이 너무 좋아요. 우리끼리 있으니 할 얘기 못 할 얘기 다 나와요. 기독교인 유가족 언니들은 다들 너무 착해서 제가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내 가족이죠.

2주기가 다가오는데 해결된 건 하나도 없고 사람들은 이제 잊은 것 같아 속상해요. 우리는 지금까지 다 졌어요. 특별법, 시행령, 학교 교실 문제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는 한 가지도 되지 않아요. 가족들도 많이 지쳤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어요. 이번 청문회 보면서 더 느꼈어요. 도대체 좁쌀만큼이라도 좀 아귀가 맞아야 할 텐데 너무 이상한 정황이 많아요.

여전히 힘들어요. 얼마 전에 남편이 새벽에 들어와서 엉엉 울었어요. 너무 억울하고 보고 싶어 죽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답답하고 미쳐 버리겠다고. 원래 눈물이 없는 양반인데 그랬어요. 저도 불쑥 불쑥 그런 게 올라와요.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건,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 예진이를 못 본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을 때는 거울을 보면서 예진이를 찾아요. 예진이가 저와 많이 닮아서 제 안에 예진이가 보여요. 예진이를 심장에 새긴다는 의미로 왼쪽 가슴 위에 예진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문신으로 새겼어요. 'Jeong ye jin mors sola'. 라틴어로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한 몸'이라는 뜻이에요.

▲ 엄마는 예진이를 품고 산다. (사진 제공 박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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