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교인 한 명이 대뜸 내게 말했다. 

"목사님이 지난 주일에 했던 그 설교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표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 설교가 다른 사람의 설교를 표절한 것이라니? 도대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물어보니, 내가 한 설교가 어떤 인터넷 기독교 언론에 실린 글 80%를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했다.

내가 했던 설교의 제목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였다. 인터넷에 실린 글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아니다'로, 본문을 그대로 가져다 설교한 것이라는 게 그분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목사가 제대로 된 연구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남의 글이나 표절해 설교한 것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사실 제목을 그렇게 잡은 이유는 인터넷에 실린 바로 그 글 제목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종종 설교 제목을 잡을 때, 시의성이 있는 제목으로 잡곤 한다. 예전에 한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유행할 때에, 설교 제목을 '안녕들 하십니까'로 잡았다(2013.12.22.). 최근에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어, 제목을 '예수의 후예'로 잡았다(2016.3.27.). 

오후 예배 때 설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에야만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제목을 잡았다. 마침 인터넷 언론에서 비슷한 제목을 봤다. 그분의 글에 대한 응답적인 성격도 있었는데, 이것이 표절 시비로 비화된 것이다.

아마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글과 비교해 내가 표절했다고 보일만 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글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과 내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에 대한 관점에는 더더욱 큰 차이가 있다.

설사 백번 양보하여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설교를 표절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으로 설교한다면, 이미 그런 내용으로 설교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표절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표절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표절자로 판명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설교는 이미 작년(2015.5.10.)에 임직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표절로 판명된다면, 인터넷 언론에 글을 올린(2016.2.19.) 그분이 내 설교를 표절한 것이 되는 것이다.

설교 표절 사항은 학술 논문에서의 표절과는 좀 다르다. 학술 논문은 일일이 각주를 달아 그 아이디어와 표현들의 원작자가 누구인지를 밝혀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설교라는 장르에서는 사실 학술 논문에서 하는 것처럼 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게 밝힐 필요도 없다. 보통 설교에 유머나 예화를 사용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유머와 예화 출처들을 일일이 밝힐 수 없다. 

그럼 설교 표절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기준을 세우는 일은 설교학자들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내가 아는 한 설교학자들은 이 문제로 글을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결국 표절 문제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들이 표절하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표절 문제가 어떤 목회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게 아닐까? 설교라는 장르를 무시한 채, 너무 엄격한 잣대를 만들어 놓으면 결국 설교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설교학자들이 설교의 생동감을 살리는 방법으로 논의를 하면 좋을 것이다.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표절은 다음의 기준으로 판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다른 사람의 설교 원고를 거의 그대로 설교하는 행위. 

둘째, 다른 사람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인양 각색하여 설교 안에 집어넣는 행위. 

셋째, 충분히 누구의 책에서 보았다고 말할 수 있고 누구의 설교에서 나온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낸 창작물인 것처럼 표현하는 행위. 

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은 표절이라고 판명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첫째, 널리 알려진 예화나 유머를 사용하는 것은 설교의 흐름상 필요하다면 출처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중들도 그러한 것이 설교자의 창작이 아니라 누군가의 것을 가져와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라고 알려진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가능할 것이다. 설교자는 진리를 독특하게 깨달아서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의 진리를 배워서 그대로 잘 가르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어떤 독특한 관점을 누군가에게 크레딧으로 돌릴 수 있다면 권장할 사항일 것이다.

어렵다. 옛날에는 복음서의 기자가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사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표절이 아주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설교자는 어느 단계에 올라가기까지 다른 설교자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하고, 그렇게 배운 것들이 자연스럽게 설교 속에 녹아서 표현된다. 우리는 이젠 그것이 표절이 아닌가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그동안 여러 선배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서 많이 배웠다. 내가 정말로 믿고 신뢰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서 배운 것이 정말 많다. 언젠가 내가 그분이 목회하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떤 집사님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목사님 설교는 우리 목사님 설교랑 스타일이 아주 비슷한 것 같아요."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을 너무나도 존경해 왔고, 그리고 그분을 닮기 위해서 무척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설교는 내가 스스로 연구하고 깨달은 바를 전한 것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남의 설교를 베껴 본 적이 없다. 목회 초년병 때 다른 사람의 설교 원고를 가지고 몇 번 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옷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직접 준비해 설교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에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사울왕의 백전백승 갑옷을 입기보다는 스스로 준비한 물맷돌이 내겐 더 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 내가 했던 설교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설교할 수도 없다. 내용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시 설교 노트에 손으로 원고를 써야지만 겨우 설교를 할 수 있는 게 내 약점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원고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그냥 애드리브로 설교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나는 그게 안 된다. 그런 내게 설교 표절자라는 낙인이 잠시라도 찍혔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난 그게 나를 채찍질하는 좋은 경고라고 믿고 싶다. 두 눈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더욱 철저히 해야 하겠다는 그런 다짐을 또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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