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라 하면 대부분 연예인 하리수 씨를 연상한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길 원하는 트랜스젠더보다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꾼 트랜스젠더가 더 눈에 띈다. 하지만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서 MTF(Male to Female,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바꾼 트랜스젠더를 지칭함)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트랜스젠더는 성 소수자 그룹(LGBT) 내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MTF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울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편견 때문인지, 꾸준히 외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그 모습 그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지난달, 남성에서 여성이 되길 원했지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치유 사역을 경험했던 연희 씨(가명) 사건을 취재할 때였다. 집에 감금된 상태로 아버지와 목회자에게 폭행당하던 연희 씨는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도움을 청한 곳은 서울 청소년 성 소수자 위기 지원 센터 띵동이었다. 띵동은 위기에 처한 성 소수자들을 상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하는 단체다.

▲ 박에디 씨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현재 여성으로 살고 있는 MTF 트랜스젠더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성 정체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띵동에는 여러 상담가가 상주하고 있는데 연희 씨를 만난 이는 박에디 씨였다. 그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현재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MTF다. 위기에 처한 성 소수자를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3월 31일 <뉴스앤조이> 기자는 박에디 씨를 만났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그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들었다. 아래는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박에디 씨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숨죽이고 살며 교회 다니던 어린 시절

어떤 트랜스젠더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면 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성에 눈뜨던 2차 성징이 지난 후에 성 정체성을 고민한 것 같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가재 잡고, 물장난치고 노는 게 훨씬 재밌었다. 그렇게 놀 때는 여자, 남자 구분도 없었다. 시골이라 성별 같은 것 안 따지고 다 함께 어울려 놀았다.

중학교에 간 후에야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을 보면 마음이 설레는지 좀 알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남성이란 걸 알고 '난 동성애자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몸이 변하는 걸 보면서 이건 내가 원하는, 내 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런 고민을 계속했지만 확실한 답은 못 내렸다. 내 주변은 그런 생각 자체를 죄라고 말하는 환경이었다. 성경에 그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내 생각보다 나에게 영향을 끼치던 주변 신앙인들의 존재가 더 컸고, 그들의 말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생들과 마찰이 많았다. 왕따도 당했다. 나름대로 내 본모습을 감추려고 한 건데 감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걸 단번에 알아 봤다. 주변 남학생들에 비해 말하는 것도 그렇고 거친 장난을 별로 안 좋아했다. 야동(야한 동영상) 보러 같이 가자는 말에 싫다고 거절하면 남자애가 왜 싫어하느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남성성과 정반대 모습들이 밖으로 표출됐던 것 같다. 그래서 왕따도 당하고 밥도 늘 혼자 먹었다.

왕따를 당하면서 힘들 때 교회에 가면 좋았다. 그때는 종교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나라는 사람을 받아 주는 곳이 있었으니까. 정체성만 밝히지 않고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숨기기만 하면 속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정체성은 꼭꼭 묻어 놓고 간간이 거짓말하면 되는 거니까.

사실 나는 모태 신앙인이다. 가족 모두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태어났을 때부터 따라다녔다. 다른 종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종교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에서 성경 통독도 하고 봉사도 하고, 남들 다 하니까 그렇게 살았다.

내 성 정체성을 알고 난 후 계속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꼭 정체성과 관련해서만은 아니었다. 종교 안에 있으면 계속 어떤 잘못에도 죄책감이 들게 하는 것 같다. 교회에서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면에 '성 소수자는 잘못됐다. 병이다' 라는 인식이 심겨서 그런지 나 자신을 자연스럽게 부정했던 것 같다. '나는 병에 걸린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게 스무 살까지 계속됐다.

▲ 박에디씨는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강압적인 전환 치료를 못 이겨 집을 탈출했던 연희 씨 상담을 맡았다. 기자회견에서 상담 과정을 요약, 보고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광풍이 불어닥친 이십 대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내 마음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공부를 못했던 것도 아니고 학창 시절 육상부 선수로 뛰면서 상도 받았다. 돌아보면 성 정체성 고민을 제외하고는 별 문제없이 살아 왔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민의 끝은 늘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이었다. 성 정체성을 속이고 있으니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살면서 겪는 일, 경험하는 많은 부분에 대해 항상 거짓말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봐도 솔직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생각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얘기했다.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하니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 삶이 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그동안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니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졌다. 머리도 많이 빠졌다. 그렇게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아 이렇게 살면 위험하겠구나', 불이 켜진 것 같다. 꾹꾹 눌러 왔던 모든 것이 폭발한 느낌이었다. 초·중·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았는데 대학 갔더니 취업 고민만 했다. 복학생 선배들 보며 '난 이 삶을 지키기 위해 또 어떤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 답도 못 하겠더라.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두려움이 용기가 됐다. 먼저 20년 동안 다녔던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어머니는 내 성 정체성을 모를 때였는데도 흔쾌히 알았다고 하셨다. 먼저 교회를 안 다니겠다고 한 후 갈 길을 찾기 시작한 것 같다.

비싼 대학 등록금 내고 수업 시간에는 계속 딴생각을 했다. 또 내 정체성 고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했던 고민을 바보같이 또 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왔다. 걱정을 시작하면 더 깊게 고민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루는 드로잉 수업 시간에 스케치북을 펴서 원하는 사람이 됐을 때 잃을 것, 얻을 것을 나눠 적었다. 울분을 토해 내며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리스트를 작성한 후 살펴보니 잃을 것들은 이미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계속 거짓말 해야 하니까 나중에 또 잃게 될 것들이었다.

어떤 여성을 속이고 결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다 얼마나 불행해질까. 반대로 얻을 것들은 정말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그때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20년을 거짓으로 보냈으니 나머지 세월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 보자는 생각이 시작됐다.

▲ 그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아직 1번으로 시작한다. 그는 아직 모든 외형 수술을 거치지 않았는데, 국가는 이런 그의 모습을 여성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군대도 다녀왔지만 예비군은 좀…

사람들은 내가 군대에 다녀왔는지 궁금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군대 가기 싫어서 그렇게 여자인 척하고 다니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대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군대를 갈 당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나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지 확신은 없었다.

또 군대는 온전하게 남성의 세계니까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원했다. 증명하고 싶은 마음 반, 확인하고 싶은 마음 반으로 갔다. 육군 공병이었는데 나중에 행정병으로 차출됐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확실하게 내가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 알게 됐다. 수술을 결정한 것은 군대 다녀오고 나서다. 내 성 정체성이 확실해졌다. 트랜지션(변화)을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호르몬 주사부터 맞기 시작했다.

트랜지션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수술받아야 할 곳이 남아 있다. 한국 사회는 모든 외형 수술을 마쳐야 주민등록번호를 수정할 수 있다. 현재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1로 시작한다. 외국에서는 굳이 수술까지 안 해도 되는데,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번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예비군 훈련도 다 받았다. 훈련 갈 때마다 사람들이 내 사진을 몰래 찍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군대는 그럴 때 전혀 나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됐기에 예비군 5년 차에는 안 갔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해 예비군 제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제 민방위 훈련받을 나이가 됐는데 얼마 전 민방위 훈련에 참여하라고 연락이 왔다.

▲ 그는 성 소수자 그룹에서도 몇 안 되는 트랜스젠더 활동가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활발한 그에게 이 일은 적격이다. 2015년 열린 성 소수자 인권 문화제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박에디 씨. (사진 제공 박에디)

"우리 딸 소개할게요."

군대 다녀오고 나서 가족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숨길 수 없는 거니까. 가족들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아빠는 트랜스젠더가 무슨 뜻인 줄도 몰랐고 엄마는 너 '홍석천 되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언니는 알았다고 열심히 살라고 얘기해 줬다. 우리 가족이 그렇게 돈독한 정을 나누거나 자매 간에 사이가 좋은 집은 아니다. 그래도 지지해 준다는 것이 중요했다.

커밍아웃 한 번에 가족 모두에게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언니도 '너는 비정상'이라고 하다가 동생이기 때문에 이해한다고 했다. 이해는 앞으로 내가 잘 사는 것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 말로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동네에 40대 미혼 여성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돈이 많고 한 명은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 시선이 너무 달랐다. 돈 많은 사람에게는 미혼이라는 상황이 장점이 되었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는 단점이 되었다.

어느 날 엄마가 흑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동성애자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이해가 됐다.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정당성이 없는 편협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자유로워졌다. 내가 가족들, 사회 구성원을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대외적인 활동도 많이 하고 외모도 더 가꿨다. 3년이 지난 뒤에야 엄마는 "그래 네가 잘 살면 된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렇게 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동안 내 손을 아예 놓으신 것도 아니지만 매번 아들, 아들 부르셨는데 결국 인정해 주셨다.

엄마와는 일부러 대화도 많이 하고 기회가 될 때 용돈 부쳐 드리고 고민 들어 드렸다. 큰 효도는 못 해도 힘들 때 응원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엄마 주변에 속 썩이는 자식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잘 살고 있었다. 엄마가 그럴 때 "아 얘가 어디 가서 나쁜 짓 안 하고 굶어 죽지 않고 잘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이제는 엄마가 사람들한테 나를 딸이라고 소개한다. 너가 잘 살면 된다고 말하시는 단계다. 가끔 부모님 걱정에 자신을 속이고 사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았는데 나중에 부모님 돌아가시면 참아 온 내 인생은 어떡하나. 거짓말하면서 살아 온 경험자로서 말하는데, 거짓말하면서 사는 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억' 소리 나게 돈은 벌지 못하지만 잘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다.

내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이유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하고 가족들에게도 솔직하게 얘기하고 난 후 종교를 더 의지하게 됐다. 공허한 마음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때 하나님께 기도한다. 교회를 떠났던 것은 어떤 교회도 나 같은 사람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미워한 건 아니었다. 20년이나 믿었는데 하루아침에 신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대신 목사, 장로들이 내 삶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듣겠다고 작정했다. 뭐든지 하나님께 직접 응답을 듣고 싶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일에도 기도하고 정말 기도를 많이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물론 다른 기독교인들은 나에게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만 나는 신앙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트랜스젠더들이 술집이나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은데 나는 그렇게 못 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중에 하나님이 날 판단하실 것이라 생각하니 삶을 열심히 살아야 했다. 건전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지만, 내 행동의 절대적 기준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일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소개도 받았다. 지금은 청소년 성 소수자 위기 지원 센터 띵동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 놓인 성 소수자 친구들을 상담한다. 연희 씨를 상담하면서 나는 그렇게는 못 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속이고만 살았는데 연희 씨는 더 용감한 친구였다. 띵동 활동가는 활동비를 받는다. 내가 쓸 만큼은 벌고 있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다들 술집이나 성매매 업소에 나가는 줄 안다. 하지만 이쪽도 사람들은 다양하다. 그런 분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다. 자기가 일하는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분들이 먼저 나서서 '나 트랜스젠더'라고 알릴 이유는 없다. 남 험담 잘하는 나라에서 그런 것 알려져 봐야 좋을 것도 없다.

▲ 에디 씨는 총신대학교에서 동성애 예방 콘서트 반대 피켓 시위를 기획했다.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과거가 생각나 총신대 내에서도 숨죽이고 살고 있을 성 소수자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박 씨가 이렇게 용기낼 수 있는 것은 그와 함께하는 교회 사람들, 그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사진 제공 박에디)

교회는 또 다른 가족

나는 원래 굉장히 활달한 성격이었다. 숨기기만 하고 살았던 지난 세월이 조금 억울하다. 한편으로는 그때 억압된 채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때는 힘든 일 있으면 전화해서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눌 친구가 없었다. 힘들고 답답할 때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원래 사람 만나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도 그랬다.

군대 제대하고 호르몬 주사를 맞기 시작하며 중성적으로 변했다. 사회적 시선을 이기기에는 내가 약했던 것 같다. 길에서 어떤 할아버지는 대놓고 "여자야, 남자야" 물어보기도 했다. 자꾸 사람들을 기피하게 됐다.

한국에 더 있다가 내가 어떤 일을 벌일지 두려웠다. 성 소수자를 존중하는 나라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작정 호주로 갔다. 그곳에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외국인 친구들이 쉬(she), 허(her)라고 불러 준 게 큰 도움이 됐다. 계속 그렇게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아 나도 내 자신을 안 숨겨도 되는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민폐가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에디(Edhi)라는 이름도 그때 만났던 친구들이 지어 준 이름이다.

호주에서 생활하면서 혼자 조용히 교회에도 갔다. 신앙심은 내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교회 가서 뒤편에 앉아 조용히 기도만 드리고 오기도 했다. 마음 한구석 공허한 마음이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호주에서 정말 열심히 한 기도가 있다. '한국에서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들을 만나고 싶다. 그들과 함께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주어진 삶을 더 열심히 살고 싶다'고 기도했다.

그러던 차에 한국에 돌아와서 만난 곳이 이태원에서 예배하는 열린문공동체교회다. 재밌는 건 퀴어 문화 축제에서 알게 됐다는 거다. 그때까지 한국 모든 교회가 나를 거부하는 줄로만 알았다. 열린문공동체교회 식구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어도 못하는데 가면 예뻐해 주신다. 3년을 다녔는데 이제는 또 다른 가족이 됐다. 그분들의 지지와 사랑이 있었기에 대외적 활동도 가능했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이야기를 마치고 싶다. 집이 가난해서 왕따를 당한 친구가 있었다. 못살고, 옷에서 냄새난다고 왕따가 됐다. 착한 친구들까지도 '쟤는 좀 아니다'라며 그 친구를 왕따시켰다. 부끄러운 건 나도 거기에 가담을 했다는 거다. 내가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그 친구를 위해 나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내가 살아오면서 왕따도 당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욕도 먹고 해 보니까, 그때 그 친구를 따돌리는 데 가담했던 것에 아직도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그 친구의 하나뿐인 유년 시절을 짓밟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니까.

아직도 그 친구를 떠올리면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동성애 반대 운동하고, 성 소수자 인권은 인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 보면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성경에 나온 몇 구절을 들고 하나뿐인 남의 인생을 짓밟고 부정하는 행동은 이제 그만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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