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목사의 손과 입이 바빠졌다. 나무를 처음 만져 봤을 수도 있는 신대원생들과 함께 가구장을 짜는 수업 중이었다. 1밀리미터의 오차만 있어도 계획이 모두 틀어질 수 있다. 신대원생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목사 이중직. 이제는 낯설지 않은 주제다. 교인은 줄어들고 목회자는 넘친다. 남 부럽지 않게 받는다는 대형 교회 목회자도 있다지만, 전체에 비하면 소수다. 교단에서도 현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이색 강의가 개설됐다. 수업 이름은 '선교와 목공 예술'. 성경 한 구절, 신학 책 한 줄 더 보기 바쁜 신대원생들에게 목공을 가르치는 수업이다. 신학교에서 목공이라니, 이중직을 적극 권장하는 수업인가? 궁금증이 일었다.

현장을 찾았다. 강의실로 쓸 곳이 마땅치 않아 기숙사 지하실을 실습장으로 바꿨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진지한 자세로 목재를 재단하는 안 목사를 바라본다. 톱밥이 날리고 나무 잘리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학생들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이날 수업은 공구장을 짜기 위해 목재를 재단하는 시간. 몇 명씩 돌아가며 정해진 길이에 맞춰 목재를 잘랐다. 보기에는 쉬워도 막상 하려니 어려웠다. 1mm 오차도 곤란하다. 이제 갓 목공을 배우기 시작한 신대원생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제대로 나무를 자른 학생은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학생들 이야기를 들어 봤다.

"앉아서 하는 공부보다 활동적이다. 예수님도 목수시지 않았나. 나도 목수 일을 배우며 예수님 마음을 알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수업을 듣고 있다. 시골에서 목회하려면 뭐든 다양하게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여러 방면에서 좋은 수업이라고 생각한다." - 오이새 학생

"힘을 들여 일하다 보니 노동의 기쁨과 즐거움을 알게 된다. 목공은 내가 작업한 대로 나온다. 거짓 없는 결과를 내는 목공 노동을 통해 여러 가지를 느낀다." - 최인범 학생

▲ 딱 맞게 대고 자르면 될 것 같지만, 보기와 다르게 쉽지 않다. 일자로 민다고 미는 데도 뜻대로 안 된다. 목공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노동의 대가가 정직하다는 걸 배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목수의 고백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고?
교회는 건물이다!"

수업을 이끄는 이는 '안 목사'다. 목사가 목수 수업을 가르친다. 안 목사는 왜 신학생들에게 신학이나 성경이 아니고 톱질을 가르치고 있을까.

199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뛰어들었다. IMF를 겪으며 가세가 기울었다. 목회 대신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세차, 운전기사, 문구 장사 등을 했다. 직장 생활도 꽤 길게 했다. 스스로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장모님이 "그러다 평생 하나님 떠나게 된다"고 말하셔서 2004년 목회의 길로 돌아섰다. 일산에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

목공을 시작한 이유가 뭘까. 안 목사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었다"고 답했다. 개척교회 목사다 보니 공사할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교회 카페 공사를 인부들에게 맡겼다. 800만 원 예산으로 시작한 공사는 보름 만에 1,200만 원으로 비용이 늘어났다. 그마저 일꾼들은 작업을 60% 정도만 진행하고 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안 목사가 팔을 걷어붙였다.

선생님도 따로 없었다. '구글'을 스승으로 모셨다. 열정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 작업을 완성했다. 동네 '마을목공소'라는 작업장에서 하나하나 만들어서 교회와 카페를 꾸몄다. 교회 공간을 손수 공사하며 신념이 하나 생겼다. 안 목사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는 말에 반대한다. 무슨 취지인지는 알지만, 건물을 배제한 교회가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 얘기가 왜 나오는지는 알아요. 교회가 대형화되고 건물 중심으로 목회하니 그걸 우려해 나온 말이죠. 그래도 건물의 중요성, 교회의 공간성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공간을 말도 안 되게 해 놓고 예배만 드릴 수 있나요?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건물 곳곳에 목사와 교인들 손때가 묻어 있는 교회는 일반 교회와 다르다는 것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성'이라는 가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전문 목수보다 실력은 안 좋을지언정 '내 교회'라는 마음으로 손수 지었으니 애착과 감성이 다르다.

그런 마음으로 힘을 모아 예배 공간을 꾸미고, 카페를 장식했다. 이 과정에서 안 목사는 '도심 속 수도원'을 발견했다. 과거 수도원이 속세를 떠나 고독한 장소에서 노동을 했다면, 지금은 도심 속에서 수도적인 가치를 갖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도가 나와요. '저를 이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세요' 이런 기도가 아니라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런 기도가 나오죠." 안 목사는 이런 절박함을 신학생과 나누고 싶어 강의를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목수 출신 예수님이 겪었을 노동의 고통, 거기에서 나오는 직관적인 언어, 어렵고 현란한 말이 아닌 직설적인 말, 목공을 통해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려고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다녔죠. 요즘 목사님들 그랜저 타고 다니면서 복음 전하는데, 둘이 과연 같을까요? 절박함이 달라요."

▲ 안 목사는 '달려라 커피'라는 이름으로, 커피가 필요한 이웃이 있으면 달려간다. 2년 전,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그는 진도에 8주간 내려갔다. (사진 제공 안 목사)

고난받는 이웃 찾아 삼만리
달려라 커피

재주꾼 안 목사가 구글 선생님에게 배운 게 또 하나 있다. '커피'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없지만 동네에 카페를 만들고 이웃들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카페 목회' 열풍이 불기 훨씬 전인 7년 전 얘기다. 멀리 서울에서도 찾아와 하나둘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찾아오는 손님을 받던 그가 커피를 들고 바깥으로 나선 건 세월호 참사 이후였다. 안 목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고통 당하는 이들 옆에서 커피라도 내리자는 마음에 차량을 개조하고 달려갔다. 8주간 진도에서 가족들 옆자리를 지켰다. 커피와 와플을 만들었다.

"아이들 떠나보낸 엄마잖아요. 커피와 와플을 드리면, 그 순간만큼은 소녀처럼 좋아하시더라구요. 엄마들이 그 순간만이라도 근심을 덜고, 슬픔 속에서 잠시나마 위안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세월호 후로 커피차를 몰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안산을 찾아 희생자 가족들을 만났다. 생존자 학생들에게 멘토링을 했고, 광화문에도 자주 달려간다. 기자에게도 "갈 만한 곳 있으면 함께 가자"며 도울 수 있는 현장을 알려 달란다.

▲ 안 목사네 교회와 카페 앞에는 달려라 커피가 준비돼 있다. 마음의 안식을 찾으러, 신앙 이야기를 하러 그를 찾아오기도 하고, 안 목사가 직접 가기도 한다. (사진 제공 안 목사)

'열정'과 '구글'만 있다면

3월부터 신학교 강의를 시작하면서 안 목사는 목사, 목수, 선생, 바리스타까지 사중직을 하게 됐다.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바쁜 일정인데, 아직 열정이 넘친다.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하고 싶은 게 많다. 목공을 전문적으로 하는 신학교를 세워서 신학생들에게 노동의 중요성을 전하고 싶다. 달려라 커피 사업도 계속하고 싶고, 교회 일도 더 열심히 하고 싶다.

안 목사는 1주일 전 대구에서 목수 시험을 봤다. 결과가 썩 좋지 않아서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할 판이라고 멋쩍게 웃었다. 전문 지식 없이 어떻게 강의하고, 교회 작업을 하냐고 묻는 말에 안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구글 보면 할 수 있어요. 그걸 실천에 옮기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죠. 일에 대한 관심, 열정,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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