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오직 인양. 은화 엄마 이금희 씨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뿐이었다. 세월호 참사 700일을 며칠 앞두고 이 씨는 병원에 입원했다. 평소 앓던 고혈압이 더 심해졌다. 당과 간 수치도 높아졌다.

이금희 씨는 어느 기자의 표현대로 '진도의 투사'다. 해양수산부장관이나 해경청장, 여러 정부의 고위층 앞에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배 안에 갇힌 아이들을 꺼낼 방책을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다. 그는 '동남아', 동네 남아도는 아줌마였는데 이제는 주변에서 "'꾼' 다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참사 701일인 3월 16일, 안산의 한 병원에서 입원 중인 이금희 씨를 만났다. 그는 2시간 반 동안 이야기하며 몇 번이나 차오르는 눈물을 억눌렀다. 표정은 참고 있는데 눈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평범한 아줌마에서 투사가 되어 버린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어떤 엄마라도 자기 자식이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면 이렇게 될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 2016년 3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701일이 지났다. 아직 세월호 안에는 뭍으로 나오지 못한 9명이 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미수습자 가족, 유가족, 생존자 모두를 살리는 길

이금희 씨는 서운한 게 많다. 뭐 하나 요구하지 않으면 알아서 해 주지 않는 정부는 말할 것도 없다. 힘들게 만든 세월호특별법에도 미수습자와 인양에 관련한 내용은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 416가족협의회가 제출한 특별법 개정안에는 인양 부분이 들어가 있지만,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서운한 게 많지만 하나하나 따질 수는 없다.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에 소극적인 정부를 비판한다. 하지만 미수습자 가족에게는 인양을 하는 주체가 정부이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대통령을 욕하기보다 대통령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다. 세월호를 인양해 은화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서 엎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새끼가 아직 맹골수도에 있는데 엄마라면 뭘 해야 할까요. 저는 인양 생각밖에 없어요. 정부가 올해 7월까지 선체를 인양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7월이면 될 거라고 아무도 확신을 못해요. 게다가 들어 올렸을 때 9명이 다 있을 거라고 아무도 장담 못해요. 저는 여야, 정치, 이념, 이런 거 몰라요. 사고다, 학살이다, 이런 것도 신경 쓸 겨를 없어요. 그냥 사람 찾자는 거예요. 그런데도 이렇게 미온적인 거 보면 미수습자 9명이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체를 인양하는 건 미수습자를 찾는 일이기도 하고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첫걸음이기도 해요. 그렇게 돼야 유가족들도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어요. 또 인양은 생존자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은화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는데 구조된 은화 친구들은 어떨까요. '그때 내가 데리고 나왔다면' 이런 생각 하지 않을까요? 그 트라우마가 언제 터질지 몰라요. 최소한 그런 생각에서는 벗어나게 해 줘야죠."

이금희 씨는 2013년 해병대 캠프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가 자살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남은 자식을 위해서라도 바득바득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도 그런 마음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고 했다. 당연히 배려받을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서 배려받지 못했을 때, '내 딸을 잃었는데 왜 이런 취급까지 당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 평범한 아줌마였던 은화 엄마 이금희 씨는 은화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자식 잃은 엄마는 평생을 아프고 그리워한다

기자를 만나자마자 세월호 인양에 대해 쏟아 내던 이금희 씨에게 이번에는 은화는 어떤 아이였냐고 물어보았다. 은화 이야기를 할 때는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이금희 씨는 즐거웠던 추억을 말하며 웃다가도 금세 가슴속이 미어지는 듯한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 은화의 명찰과 학생증. (사진 제공 이금희)

은화의 두 살 터울 오빠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성공 가능성이 적은 수술이었다. 다행히도 수술은 잘 끝났고 이금희 씨와 남편은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키우는 중에도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은화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였다. 어느 날 은화가 물었다. "엄마, 나 교복은 사 줄 거야?" 이금희 씨는 이 말에 아차 싶었다. 아들에게 신경을 쓰다 보니 그동안 은화가 어떻게 컸을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은화의 질문에 엄마는 많이 울었다. 그 다음부터는 은화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했다.

사춘기 때에도 은화는 엄마와 친밀했다. 학교가 끝나면 엄마에게 전화하고 버스에 타서도 전화했다. 하굣길에 오빠 몰래 엄마를 집에서 불러내 주꾸미 볶음을 먹으러 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꼭 엄마 밥공기에 주꾸미를 올려 주던 은화였다. 알아서 잘 커 준 아이. 늘 미안한 마음이 컸던 아이였다.

"제가 스물네 살 때 오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맞아서 죽었는데 범인을 찾지 못했어요. 이후 저희 엄마가 수십 년을 고통 속에 살다 갔어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어떻게 사는지 엄마를 지켜봐서 알아요. 2014년 3월 18일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장례 다 치르고 제가 딱 두 마디 했어요. '엄마, 이제 안 아파?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오빠는 만났어?'

저도 그래요. 밥을 먹다가도 은화가 좋아하는 반찬을 보면 그 자리에서 무너져요. 아마 평생 아프고 평생 그리워할 거야.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엄마한테 했던 말을 제가 죽어서도 들을 것 같아요."

미수습자 가족의 가난한 마음

참사 이후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이금희 씨는 안산의 한 교회 집사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은화가 두 살 때 이 씨의 몸이 갑자기 아파 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러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었다. 엄마의 권유로 교회에 나갔다. 목사의 말대로 새벽 기도부터 교회에서 하는 모든 예배에 참석했다. 이상하게 그때부터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몸도 그렇지만 그 시절 이금희 씨는 하나님을 만난 감격에 젖어 살았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했다. 입에서는 찬양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 만난 하나님을 자식들에게도 알게 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착실히 교회를 다녔다. 두 아들딸도 엄마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후부터,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 교회들을 보며 실망도 적잖이 했다. 교회들이 보여 준 태도에는 그의 아들이 더 먼저 반응했다.

"엄마,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잖아. 가난한 사람 찾아가라고, 소외된 사람 찾아가라고 쓰여 있잖아."

은화의 오빠는 지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가끔 사람들이 물어봐요. 은화 엄마는 종교가 뭐냐고.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 좀 어리둥절해 해요. 제가 세월호 터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걸걸하게 욕하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 또 인양을 위해서 간담회 하러 절도 가고 성당도 가고 하니까. 근데 저는 은화 찾고 나면 다시 교회로 돌아갈 거예요."

▲ 금희 씨는 진도 앞바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딸의 생일상을 차렸다. (사진 제공 이금희)

이금희 씨는 미수습자를 기억해 주고 옆에 있어 준 기독교인들도 많이 만났다. 참사 700일째였던 3월 15일,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와 손달익 목사(서문교회)가 병상에 있는 이 씨를 찾아와 기도해 주었다. 이 씨는 이 목사에게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기독교 방송사 기자가 이영훈 목사와 동행해 취재도 했지만, 어쨌든 잊지 않고 선체를 온전하게 인양해야 한다고 말해 준 게 고맙다는 것이다.

"이영훈 목사님이 정치적으로 어떤 성향이고, 또 이렇게 미수습자 가족을 찾아오시는 게 어떤 의도인지 저는 잘 몰라요. 그래도 세월호 인양에 대해 확고하게 말씀해 주시고, 제가 은화 찾은 다음에 다시 신앙생활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솔직히 세월호에 대해서 이런 행보를 보이시는 거에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이 일로 그 많은 교인 중에 몇이라도 세월호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저는 그걸로 감사해요."

교회들이 어떻게 미수습자 가족들을 도울 수 있을까. 이금희 씨는 기독교인들이 세월호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미수습자 가족들을 교회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어 소통하는 게 가장 좋고, 그게 어렵다면 주보에라도 미수습자 9명의 이름을 적어 주었으면 했다. 여유가 된다면 팽목항에 찾아와, 외로워하는 미수습자 가족들 옆에 있어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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