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는 학교마다 슬로건을 내거는 규칙이 있다. 해야 할 세 가지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일인 3행 3무가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 초등학생 시절 3행은 '인사 잘하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선생님 말씀 잘 듣기'였던 것 같다. 3무는 '지각하지 않기', '따돌림 하지 않기', '수업 중 딴짓하지 않기'였던 것 같다. 정확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대강 이런 규범들이었다. 이것들을 잘 지키면 선생님께 칭찬받는 착한 어린이가 될 수 있었다.

어릴 적 난 제법(?) 혹은 엄청 사고뭉치였다. 그래서 저 규칙들을 꽤나 영악하게 이용했다. 인사 잘하는 척했고, 선생님이 볼 때만 싫어하는 친구와 잘지내는 척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또한 지각했을 때는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출석부에 지각으로 기록되는 것을 피했고, 싫어하는 친구들과 겉으로는 잘지냈으나 은연중에 따돌렸고, 선생님께 걸리지 않는 딴짓을 열심히 개발했다.

이랬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제법 모범적인 학생으로 인정받았고 개근상과 다수의 표창장은 물론 부반장과 반장, 전교부회장, 전교회장까지 하며 초딩판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건대 저런 감투와 칭찬이 내게 자랑이 아니라 수치였음을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람들의 환심과 칭찬을 사는 일은 쉬울지 몰라도,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내면의 성장을 단절시키는 끔찍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초딩 때는 남에게 '규칙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나의 행동 규범이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이것들은 철없고 영악했던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을 볼 때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느끼는 부끄러움과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 현대 기독교판 3행 3무가 있다. '예배 참석, 헌금, 전도'의 3행과, '술, 담배, 제사'의 3무이다. 이 3행 3무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대개는 믿음 좋은 신앙의 모범이 된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런 신앙 규범을 배워 왔으며 또 실천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보고 또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해 열심히 손가락 드는 모습을 보면서 3행 3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그 사람들은 대개 3행 3무를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3행 3무의 신앙 규범이 문제인 이유는 이것이다. 교회판 3행 3무는 단순히 윤리적 틀이 아니라 사영리 수준에서 끝나버린 구원파적 구원론 한 스푼, 고대 영지주의 구원론 한 스푼, 중세 카톨릭의 공로주의 한 스푼, 지금은 힘들지라도 끝까지 전념하라는 사후 상급 신학 한 스푼, 저것들을 잘 지키면 옆 동네 재개발 예정인 금싸라기 땅이나 재건축 아파트 분양권을 얻게 된다는 번영 신학 한 스푼, 비나이다 비나이다 샤머니즘 한 스푼, 규범을 잘 지켜야 거룩한 신앙인이라는 바리새파적 경건주의 한 스푼, 목회자의 야망을 위해 성도들을 가둬 놓는 우민화정책 한 스푼이 섞이면서 괴랄스럽게 변해 버린 교조주의, 율법주의, 근본주의의 다른 양태라는 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앙 규범들을 지켜 내면서도 자신의 탐욕을 다스리지 못해 약자를 착취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거짓으로 거짓을 덮고, 사회의 갈등과 고난을 증대시키는 사람들을 '개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는 개독이 끊임없이 양산되는 교회 실태의 문제점은 단순한 3행 3무의 충족만을 요구하는 요상한 가르침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 규범(이라 알려진 괴랄한 규칙)을 좀 안 지키면 어떤가? 바울도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냐'는 물음에 두 가지로 답하지 않았는가? 중요한 것은 고기를 먹느냐 마냐의 신앙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알고리즘상 덕을 세우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우선한다는 점이다. 3행 3무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다.

가장 본질적 정신이 사라진 신앙 규범을 율법주의라고 한다. 옆에 앉은 집사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을 만큼 싫어하면서 꼬박꼬박 참석하는 새벽 예배가 얼마만큼 진정성이 있을까. 복음의 정수인 낮아짐을 외면한 채 날선 비난이 만연하고 3행 3무처럼 단편적인 윤리 규범을 외치는 일은 겉으로는 영적 전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도그마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정의에 심취해서 폭력을 자행하는 십자군 전쟁의 모습임을 직시해야 될 듯하다. 신앙인의 행동 규범은 정해진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운 관계와 사랑 안에서 성숙하게 판단해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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