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서평에서는 비기독교인을 고려한 저자의 뜻을 존중해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표기합니다. - 편집자 주

"신약성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 면에서 바울을 능가하는 신약성서의 저자는 없다." (227쪽)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기독교회에 사도 바울이 끼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신약성서 27권 중 13권이 바울서신이며, 이 서신들은 기독교 교리를 논할 때 주요 근거가 된다. 바울은 성경 어떤 인물보다 목회자·신학자들에게 친숙하다.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는 예수보다 바울을 연구하느라 전 생애를 바친 이들이 적지 않다"(14쪽)고 이야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반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 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 / 김학철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40쪽 / 1만 2,000원

바울은 기독교 최대의 전도자이자 신학자로 평가된다. 바울이 갖는 무게감을 생각한다면 타당한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마틴 루터, 장 칼뱅, 칼 바르트…. 교회를 뒤바꾼 신학자들 곁에는 언제나 바울서신이 있었다. 다른 부분을 논하지 않더라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장벽을 허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기독교의 보편화를 누구보다 크게 앞당겼다. 노예제도가 존재했고,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명확했던 당시 사회에서 연대와 평등의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우면서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고, 그대로 실천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 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문학동네)는 바울의 말과 글, 바울신학의 보편성과 급진성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책이다. 인문 교양 총서로 기획된 책이기에, 기독교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쓰였다. 바울이 살았던 1세기 로마제국의 사회 문화적 배경부터 그의 행적과 사상, 신학 하나하나를 다룬다. 사도 바울의 목소리를 통해 기독교를 뿌리부터 되짚어 보는 대중적인 바울 개관서다.

저자는 책 제목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을 바울신학과 기독교 핵심 메시지라고 말한다.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바울이 드러내는 성서의 급진성은 "사랑의 급진성, 절대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감으로써 발생하는 급진성"(12쪽)이다. 고린도전서 1장 26-28절에 바탕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고전 1:28) 하느님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선택하셨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었다.

열성 있는 박해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당시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구별된 존재였다.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을 섬겼고, 성경을 바탕으로 율법을 지켰으며, 선민의식이 있었다. 바울은 이들 중 기록된 경전과 구전 전승을 열성적으로 지키기 위해 힘쓴 바리새파에 속했다. 예수가 공생애를 보낼 때 가장 많이 부딪쳤던 이들이 바로 바리새파에 속하는 유대인들이었다.

바울은 바리새파 중에서도 열성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열심을 냈다. 문제는, 열성 있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정결' 기준에서 '부정'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위협하고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고쳐 놓으려 했다는 데 있었다. 이들은 거룩함을 빙자해 이방인, 죄인들과의 분리를 요구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로 전향하기 전 바울이 예수 운동을 적극적으로 박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n)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전향'(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 1601년 作).

더욱이 당시는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던 계급사회이기도 했다. 바울은 다소 시민권과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다소는 학문과 문화로 이름이 높은 도시였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명망 있는 랍비 가말리엘에게 배웠다. 잘나고 못남을 따진다면, 바울은 충분히 잘난 사람 측에 속했다. 당대의 문화에서도 엘리트였고, 바리새파로서 거룩에 대한 열성으로 자부심을 가졌던 바울이 하느님의 복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이들을 본격적으로 핍박하려 다마스쿠스에 가는 길목에서 예수와 만나고 회심하게 되면서 극적인 전환을 이룬다. 그는 혐오와 배제에 기초해 다른 이들을 분리하는 삶에서 돌아섰다.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사랑, 그것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들, 곧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못남, 지저분함, 하찮음, 그리고 '죄'를 탓하기 전에 먼저 그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길이 옳다는 것인가"(61쪽) 질문을 던지면서, 사랑과 포용으로 연대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이방인의 사도'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복음은 정치, 사회질서에 대한 이해를 뒤바꾼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현대사회가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돈과 명예 같은 세속적 우선 가치와 반대된다. 저자의 통찰에 따르면 당대와 오늘날 사회 모습은 어떤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저자는 특히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에 대한 것들을 유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대목을 옮기면 이렇다.

"바울은 도시 고린도에서 죄와 악의 지배를 읽었다. 그곳은 욕망에 휘둘리고, 지혜를 얻어 서로 위에 서려고 경쟁하며, 강자에게 굴복해 강자를 중심으로 패거리를 짓고, 신마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동원하여 결국 승자 독식을 당연시하는 도시, 고통을 느끼는 이들을 위무하고자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무력한 철학자들의 도시,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더욱 가중시킬 뿐 어떤 뚜렷한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바울은 출구 없이 사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신음과 착취, 그리고 억압 위에 세워진, 그러나 '겉보기엔 멋들어진' 도시 고린도에서 죄와 악의 지배를 목격했다. 이는 단지 고린도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다른 헬라 도시들도 이기적 욕망과 경쟁, 약육강식, 종교와 사상의 부패와 무능, 약자의 시체 위에 세워진 문화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절실히 구원을 원했다." (126쪽)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이라는 복음에 대한 가장 큰 모본을 삶으로 보여 줬다. 몸소 '하느님의 형상'에서 십자가에 죽는 '아무것도 아닌 자리'까지 내려왔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버려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바울의 행적과 메시지는 이런 예수의 '자기 비움'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앞서 언급한 당대 문화적·사회적 질서와 충돌을 낳을 수밖에 없다. 단지 개인의 신념으로만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복음은 그저 사적인 기쁜 소식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뜻을 갖는다"(105~106쪽)는 저자의 지적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평등과 연대의 공동체 '에클레시아'

▲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의 '사도 바울로 분한 자화상'(Self - portrait as the apostle Paul, 1661년 作).

바울은 참된 평화가 로마(팍스로마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통치, 연대와 평등의 공동체 구현에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울이 추구한 교회는 노예제도, 가부장적 질서, 로마제국의 위계질서를 따르지 않는 혁명적인 공동체였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다. 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교회가 형성된다. 서로를 '유사 가족'이라 인식한 이들의 삶은 제국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이런 믿음은 '인간의 기준'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출발점에 섰던 교회는 사회에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공동체였다.

"바울이 전하려 한 복음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은 이 세상의 질서를 상대화시킨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이 되는 복음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체제를 가변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여기게 한다." (163쪽)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스스로를 구분 짓는 한편, 그 안에서는 여성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종과 노예가 자유인처럼 행동할 뿐 아니라 간혹 해방되기도 했다. 바깥 사회에서처럼 부자와 지체 높은 사람이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존중받았다." (216~217쪽)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복권'을 지향하는 복음이 만약에 개인의 구원이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사실상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등 당대에 지혜를 추구했던 헬라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들은 "죄와 악이 어지럽힌 세계를 향해 변화를 요청하기보다 기존 세계와 부대끼지 않는 개인의 안락과 평안을 추구"(135쪽)했다. 바울은 "지혜의 추구가 어떻게 인간의 욕망 속에 자리 잡아 인간을 기만하는지, 또 죄와 악의 세력에 맞서기에 얼마나 무능력한지"(135쪽)를 밝히 보여 준다.

바울을 총평하는 저자의 말로 글을 맺는다.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예수와 자신이 믿었던 하느님에게 성실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한껏 용기를 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과 예수의 삶을 통해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과 동기애를 나누었다.

죄와 악, 죽음과 고통의 세력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새 세상이 올 것을 믿었던 바울은 그 꿈에 설레면서 전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또한 공동체 간의 연결망을 세우고, 함께 고통의 바다를 건너고자 했다. 악한 세력이 앞을 가로막으면 때로는 명민하게 에두르고, 때로는 정면으로 부딪혀 상처를 얻었지만 그 상처는 오히려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표지가 되었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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