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을 정면으로 응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명령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의 원수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그윽한 경지에 오른 수도사들이 죄인들에게 보여 준 사랑,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에게 보여 주었던 신부님의 한없는 용서를 예수님의 인생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장로들의 전통을 집요하게 비판하셨다. 또한 율법의 완성과 완전한 제자 됨, 그리고 막연한 보상을 이야기하며 제자들에게 극히 부담스러운 선택을 요구하셨다. 의지적으로 무리를 흩뜨리시며 세력화를 포기하시기도 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나누고, '이사야의 예언'과 '다윗의 도래'를 구분하셨다. 로마제국을 상대화했고, 다윗의 자손 이상의 구세주임을 선언하셨다. 그리스도,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이토록 철저하게 모든 것을 비집고 들어갔다.

적대자들, 전통을 수호하며 동시에 기득권에 집착하는 자들, 하나님의 계시와 율법을 무시하며 자기 멋대로 복음을 해석하는 자들, 권력에 빌붙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조금도 따를 생각이 없으면서 민중의 신심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리는 자들…. 예수님은 이들의 죄악에 정면으로 응시하시며, 권력과 권세 앞에서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악을 단숨에 심판하셨고, 부활을 통해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비추어 주셨다. 이것이 그분께서 실제로 보여 주시고 실천하셨던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다.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롬 12:18)

할 수 있는 대로? 가능한 만큼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하란 말인가, 그렇다면 가능한 만큼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북한은 위험하다. 우리가 거듭 노력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대남 도발을 자행했고, 핵무기에 미사일까지 만들었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동성애는 위험하다.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고, 기독교가 추구하는 성적인 이상을 심각하게 뭉개뜨린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이슬람은 위험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이교도이며,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북한과 대화를 하자고? 우리도 잘못이 있다고? 남북 대화가 평화로 가는 길이라고? 세상에 이렇게 순진한 사람들을 봤나. 혹시 남파 간첩에 포섭된 사람들은 아닌가. 북한이 쏘아 올린 게 미사일이 아니라 위성이고, 북한 경제가 성장하고 있고, 중국이 북한을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미국이 문제라니?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건가.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해서는 어떤 대화도 시도할 필요가 없다. 어찌 됐건 죄가 아니던가. 그러니 사랑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교회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북한은 한 민족인가, 원수인가. 북한은 우리와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인가, 사탄의 나라인가. 손쉬운 용어들이 판친다. 북한 인민들이 아니라 북한 정권과 공산당을 미워하는 것이다. 구분이 가능한가?

체제라는 것은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북한의 경우 1946년 토지개혁으로 확실한 정권의 토대를 닦은 이후, 무려 70년간 유지되어 왔다. 어디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고, 어디까지는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남한 사람들의 머리에 있는 관념적인 주장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한국교회의 자기모순

한국교회의 사고방식에서 학문적인 연구,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성찰, 관점의 다양성과 주류 언론이 아닌 다른 입장에 대한 이해를 시도조차 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이 나온다. 48회를 맞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소강석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남북이 극한의 대치를 이루고 있다. 오죽하면 정부가 개성공단 중단 조치까지 하겠는가. 큰 틀에서 볼 때 그것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북한의 변화와 한민족 평화를 이루기 위한 그랜드 디자인이다."

"통일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될 줄 믿는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전시체제와 같은 상황을 희망찬 화해 모드로 바꿔야 한다. 한국교회가 선구자, 중보자가 돼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다. 소강석 목사는 설교에서,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한 강력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정부의 강대강 전략에 대해 적극 지지하고 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그랜드 디자인'은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써 오던 보수 진영의 통일 어젠다 아닌가. 김대중-노무현식 햇볕정책을 거부하고, 먼저 핵무기를 포기하고 협상을 하자는 새로운 발상이다.

이에 대한 숱한 비판이 지난 8년간 계속되고 있다. 그 비판들을 옮기면 이렇다. 이미 9·19 공동성명 등 확실한 북미 협상이 있었기에 그것들을 먼저 이행해야 한다. 북미 협상에서 북한도 신뢰를 깨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 하지만 미국 역시 못지않아 남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북한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을 때, 현실적으로 당장 핵미사일을 포기하는 것은 구조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먼저 남북한 관계 개선을 통해 장기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중국 의존도가 매우 높아져서 이 부분을 고려하며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미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분명히 북한은 개성공단 문제를 다룰 때는 온건한 태도와 개방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부분에서 남한 역시 북한과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관계 유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 8년간 남북 관계는 끊임없이 경색돼 왔고 당장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 할 정도로 전쟁의 위기 앞에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소강석 목사 설교에는 이에 대한 수많은 비판이나 다른 생각들에 대한 고려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토로하듯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결론은 황당하게 한국교회가 남북 관계를 화해 모드로 바꿀 수 있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겠다

▲ 원수는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 무슬림, 동성애자는 사랑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겠다는 말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랑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소강석 목사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 건국과 정체성을 왜곡하는 역사 교과서 내용은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 기독교 선교사와 한국교회 역할을 빼고 어떻게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기술할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그 내용은 수정되고 첨가해야 한다."

이 말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는 지난 수개월간 폭로되었다. 당장 답답하면 <역사 전쟁>(생각정원) 달랑 한 권만 사서 읽어 봐도 해결될 일이다. 역사학자와 역사 교사 중 거의 대부분이 나섰고, 이미 서점에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이 출간되어 있다.

소강석 목사의 발언은 국정화 반대가 절정이던 날, 황교안 국무총리가 발언했던 내용과 꼭 같다. 다른 견해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되뇌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체성을 왜곡하는 것은 뉴라이트들의 정치적 주장이지, 기존의 역사 교과서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와 한국교회 역할이 한국사 교과서에 없는가? 친절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그 이상을 바란다는 것은 한국을 강제로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역사 왜곡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주장하는 바는 결국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할 수 있는 만큼'에 누가, 얼마큼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같은 문화를 향유하며,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듣기 좋은 소리 하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본인들 편한 대로 사랑하겠다는 발상 아닌가.

과연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던가.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롬 12:14)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롬 12:21)

바울은 본인이 인간임을 철저하게 자각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과 달리 '단언'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복음을 설명하는 데는 여지가 없지만, 바울 본인이 일구고 있는 목회의 현장이나, 본인이 만들어 가고 있는 교회에 대해 말할 때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예수님과 바울 사이에서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가.

'대한민국당'과 '예수당'이 일치할 수 있나

소강석 목사는 자신을 여당도 야당도 아닌 '대한민국당', '예수당'이라고 말했다. 이미 이 주장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일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일치했던 때가 로마제국이나 중세 전성기 아닌가. 그때의 교회가 정상적이었던가.

영국 국교회나 청교도가 국가와 이해관계가 일치되던 시점에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인도를 약탈했다. 대서양을 누비면서 노예무역을 통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공장을 세워서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바로 그 시점이다.

예수당이면 예수당이고, 대한민국당이면 대한민국당이다. 이 두 가지는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 밖에 없지만 일치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간극 가운데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합당하다.

기독교 민족주의자 우치무라 간조는 러일전쟁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비판하며 모진 핍박을 감내했다. 청교도들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찰스 1세와 치열하게 싸웠고, 다시 장로파와 수평파 그리고 디거파로 나뉘어서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가를 두고 각각의 정치적 이상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쳤다.

소강석 목사는 "한국교회의 영적 부흥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이 잘살 수 있게 됐다. 성도들이 새벽마다 차디찬 교회 마룻바닥에 눈물을 쏟으며, 나라와 민족 그리고 대통령을 위해 기도했다"고 강조했다. 이것도 역사 왜곡이다.

한국교회 부흥과 대한민국 경제성장 그래프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안창호를 비롯하여 숱한 인재들이 쏟아져 나올 때 조선의 구한말 역사는 비참했다. 영적 부흥으로 잘 살게 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의 결과가 배부른 이들을 양산하는 것이었던가. 예수님이 단 한 번이라도 부자였던 적이 있던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배고픔에서 벗어났던 적이 있던가.

교회를 맹렬히 비판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영국 공리주의 사상가 스튜어트 밀조차 초대교회의 모습을 긍정하며 <자유론>을 써 내려갔다. 그들은 이웃을 자신의 몸 같이 사랑했다. 전쟁 중 동료가 야만족에게 잡혀가면 사재를 털어서라도 구해 왔다. 당시 로마제국의 문화와 극히 다른 형태로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바울의 저 부끄럽고 소박한 '할 수 있는 대로'의 정신이 이루어 낸 결과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랑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전라도가 복음화율이 가장 높다. 30~40대 진보적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크리스천이 교회에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목사들은 복음과 별 상관없는 자신들의 치기 어린 주장을 설교단에서 마구 내뱉으며, 젊고 진지한 크리스천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들이 100만이 넘었고, 교회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비신자가 신자가 되는 일은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만큼 희귀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들을 사랑하기에 급급하다. 이것이 어떻게 바울의 뜻을 따르는 것인가. 이런 모습을 두고 어떻게 예수님을 운운하는가.

기독자유당의 주체인 전광훈 목사는 "교회 비판의 배후에 종북 세력이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과연 그런가. 이제 이런 망언들은 큰 화제가 안 된다. 그만큼 일반적이 되어 버렸다. 역사 왜곡, 권력에 의한 억압은 정치나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일반적이 되었다.

다윗 시대의 찬란함은 이스라엘 사회의 상상력을 마비시켰다. 다윗 왕국 이후 모든 노력은 오직 다윗 시대의 찬란함으로 회귀하는 데 있었다. 그러한 태도를 비판했던 선지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윗 시대가 돌아왔던가.

하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새 일을 시작하면서 예언을 완성하셨고, 예수님은 특별히 다윗의 자손임을 극구 부인하면서 본인의 그리스도 되심을 강조하였다.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여, 원수 사랑에 대해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교회여. 그래서 남는 것은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사랑 이야기인 것을 언제쯤이야 깨달을까.

심용환 / 역사 강사, 깊은계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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