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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문제, 해법은 없는가

성경적인 방법으로 돌아가자

이국진   기사승인 2016.02.16  09: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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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는 2월 15일, 이국진 목사의 '오정현 목사 강도사 사칭 의혹, 근거 없다'에 대한 김범수 목사(시애틀드림교회)의 반박문을 게재했습니다. 이에 이국진 목사가 반박문에 대한 답을 보내왔습니다. - 편집자 주

진영 논리 유감

내가 오정현 목사의 강도사 사칭 의혹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쓰자, 예상했던 대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포화를 맞았다. 내가 저쪽 진영에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대로 나를 좀 알고 있는 이진오 목사는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고, 혹시 내 글이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악용될 우려가 있으니 사실관계를 좀 더 파악하여, 글을 내리거나 수정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글 하나 때문에 나는 하루아침에 악한 자와 함께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은 몇 년 전 사랑의교회 부목사로부터 험한 말을 들었던 씁쓸한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오정현 목사 표절 문제가 불거졌을 때, 모교의 은사에게 이 문제를 학교에서 정당하게 처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외국에서야 누가 표절을 하든 말든 학교의 명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한국에서는 개인의 잘못은 곧 학교의 잘못으로 직결되는 진영 논리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개혁위원회 진영에 속한 사람이라 판단한 사랑의교회 부목사로부터 아주 험한 말을 들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우리는 진영 논리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의 목표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악을 미워하는 것이 옳다면, 단순히 편을 나누어서 우리 편이 아니면 무조건 비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우리가 대적해야 할 것은 악 그 자체이고, 악은 아쉽게도 우리 편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편이기 때문에 무조건 감싼다면 그것은 악에 동조하는 일이 될 것이고, 저쪽 진영에 선이 있는데도 무조건 비난한다면 악한 일이 될 것이다.

임시설교권과 정식 강도사, 목사 안수 취소 문제

내가 쓴 글에 대한 반론으로 김범수 목사의 글이 실렸다. 그런데 그 글 제목이 참 묘하다. 제목은 '오정현 목사 임시설교권 얻었을 뿐 강도사 아니었다'이고 부제는 '북미주개혁교회(CRC) 교단 헌법 43조 설교권 규정은 목사 안수 위한 게 아냐'이다. 이러한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내 생각에 이 제목은 저자가 붙인 제목은 아닐 것이고, <뉴스앤조이>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조금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첫째, CRC는 강도사 제도 자체가 없다. 그런데 이 기사 제목과 부제는 마치 강도사 제도가 있는데, 오정현 목사는 그런 정식 강도사가 아니었고, 임시로 설교권을 얻었을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렇지 않다. CRC 교단에서 목사가 아니면서 설교하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헌법 조항에 따라 설교를 하든 그 사람은 강도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강도권을 허락받은 사람일 뿐이다. 한국의 강도사와 그런 점에서 다르다. 한국에서의 강도사는 목사가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직책'이다. 하지만 CRC에서든 PCA(미국장로교단)에서든 강도권은 목사가 아닌 상태에서도 설교할 수 있는 면허증일 뿐이다.

둘째, 43조에 의한 설교권을 한국말로 '임시설교권'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물론 이 설교권은 제한된 기간 동안에만 설교할 수 있기 때문에 임시라고 붙이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한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 총회에서는 위임목사가 아닌 상황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사람들을 '임시목사'라고 불렀다. 이것은 완전히 위임을 받아 영구적으로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위임목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즉 매년 갱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맞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담임목사가 아니라는 의미로 법원에서 받아들여질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최근 임시목사라는 표현 대신에 시무목사라는 표현으로 바꾼 바 있다. 이와 비슷하게 43조에 의한 설교권을 임시설교권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맞다. 제한된 기간에 설교하도록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치 CRC에 강도사라는 제도가 있는데, 그런 강도사 직책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로 비추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부족한 번역이라 하겠다.

아무튼 CRC에는 강도사 직책 자체가 없다. 그러나 한인 교회에서는 강도권을 받은 사람을 한국교회 전통에 따라 강도사라고 부르고는 한다. 그건 PCA도 마찬가지다. 강도사라는 직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달리 강도사 직책을 거쳐야만 목사 안수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CRC 헌법 제도에 대한 설명을 통해 43조에 의한 강도권은 다른 강도권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 점에서 강도권이 다른 교단에서 충분히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 논지는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PCA는 같은 목사를 받을 때에도 그냥 섣불리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회에서 엄격하게 심사한 후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보충하도록 요구하고, 때로는 가입을 거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오정현 목사가 계속해서 PCA에서 강도권을 인정받은 것은 그만큼 그의 신학적 소양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백번 양보해서 오정현 목사의 강도권을 인정할 수 없다 할지라도, 목사 안수를 받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PCA 노회에서 목사 자격이 있다 판단하면 목사로 안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PCA에는 우리 한국 교단처럼 총회에서 실시하는 강도사 고시 같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냥 노회에서 인정하면 충분히 목사로 안수할 수 있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강도권에 문제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의 목사 안수는 무효가 될까? 그렇지 않다. 우리 교단에는 장로로 임직하기 위해서는 6개월의 교육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봄 노회 때 장로 인선 허락을 받고 선거한 후에 교육해서 가을 노회 때 장로 고시를 보는 게 일반적이다. 엄격하게 따지면 6개월의 교육을 못 받은 것이다. 5개월 정도 교육받고 장로로 안수받는 데 그럼 절차상의 문제로 장로 안수가 무효가 되는가?

우리 교단 헌법에는 30세 이상만 목사로 안수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30세가 되기 한 달 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면 그 사람의 목사 안수는 취소되어야 마땅할까? 예장합동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식으로 졸업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목사 안수는 취소되어야 할까? 교육부에서는 수업일수를 정해 놓고 있는데, 데모를 해서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방법으로 학점을 받았다. 그러면 그 사람의 졸업장은 취소되어야 할까?

사랑의교회 문제의 해법

사랑의교회와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 사이에 길고 긴 공방이 벌어지고 그 다툼이 오래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되는 분쟁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을 없애고 서로 진영 논리에 빠지게 만들었다. 우리 편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상대편은 절대적으로 악하다고 하는 그런 논리 말이다. 더 나아가 문제의 해결이 오직 상대편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옳지 않다. 우선 상대편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미 각각 진영이 상당수의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편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진영 논리에 빠져 싸우고 있는 당사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상대편이 그렇게 악하거나 우리 편이 온전히 선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1-8)

잘못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잘못을 교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 법정으로 달려가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책망했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6-7)

나는 이런 점에서 경향교회 성도들이 보여 주었던 성숙함에 찬사를 보낸다. 비록 그 교회의 분열 과정에 성경적이지 못한 모습이 없지 않았으나,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세상 법정으로 달려가지 않기로 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나는 어느 한쪽 편을 들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교회든 갱신위든 성경적인 방법에 귀를 기울이길 촉구한다.

비록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의 공적인 재판이 편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더라도 세상 법정으로 달려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후에 조용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옳다. 이 세상에서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잘못된 일이 바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지금 이 순간에 자신들의 잘못을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훨씬 낫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전병욱 목사 건에 대해 글을 쓰지 않는다. 교회 내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교회 안에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젠 세상을 향해 나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심판을 맡겨야 한다. 물론 총회에 상소해서 노회의 편파적인 것 같은 판결을 뒤엎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도 더 이상 해결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손에 그 판결을 맡겨야 한다.

양측이 서로 만나 건설적인 해결책을 찾고,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협력하는 방법을 찾아볼 것을 촉구하고 싶다. 같이 갈 수 없다면, 서로 분립하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5-18)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음을 위해 함께 협력할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이유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좀 부족하고 잘못이 있는 성도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고 같이 영적인 전투를 해 나가야 할 동지들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과 허물을 들추어내면 계속 나올 것이다. 그리고 아주 심각한 잘못들은 그냥 지나가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처럼(요 17:11),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나가 되기 위해 부족한 것을 감싸 주는 일은 필수적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느 쪽에서든지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도 글을 쓴다.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은 성경적인 원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상대방을 향해 비난하고 자신들의 악행을 덮기 위한 면피용으로 사용하든지, 아니면 철저하게 자신의 잘못을 보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든지, 어느 것이든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이 글은 사랑의교회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갱신위가 유리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볼 게 아니고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내용에 집중하시라. 그게 살 길이다. 우리는 모두 잘못을 한다. 하지만 회개할 수 있다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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