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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다시 보기3] 차라리 사랑하지 말자

무슬림과 같이 살아야 하는 한국교회, 공존과 평화의 가능성은?

구권효 기자   기사승인 2016.01.27  17: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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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교수 벤자민 카플란(Benjamin J. Kaplan)은 그의 책 <유럽은 어떻게 관용 사회가 되었나>(푸른역사)에서, 구교와 신교, 이슬람이 소용돌이쳤던 16~18세기 유럽 사회에 '관용'(tolerance)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기술한다. 벤자민 카플란에 의하면, 관용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포용'이나 '보편적 인류애'의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 유럽은 피로 얼룩졌다. 가톨릭이 국교인 사회에서 이단, 이교는 공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단자를 박멸하고 이교자를 개종시키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벤자민 카플란은 말한다. "전 유럽에서 막판까지 싸움을 벌인 후, 무력으로는 상대방을 개종시킬 수 없음을 최종적으로 깨달았다." 관용은 사랑이라기보다 차라리 무관심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서로 죽이지 않기 위해 서로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화를 위해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다. 현재 이슬람을 위기로 인식하는 한국교회 교인들도 한번쯤 곱씹어 볼 만한 말이다. 이슬람에 대한 섣부른 시선은 자칫 무슬림을 적으로 만들 수 있다. 관용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차라리 서로에게 관심을 끄는 편이 낫지 않을까.

   
▲ 무슬림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한국의 이슬람화?

한국은 빠른 속도로 다국적 사회가 되고 있다. 국내에 있는 외국인이 200만에 육박한다. 이 중에는 무슬림도 있다. 무슬림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한 말이다. 이전 기사에서 살펴봤듯이, 국내에 무슬림이 유입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필요 때문이다. 이주 노동자가 계속해서 공급되지 않으면 국내 산업이 위태로워진다.

'이슬람=악마'로 보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슬림의 존재는 여전히 위협이다. 한국을 동북아의 거점으로 삼아 2020년까지 이슬람화한다는 말은 이런 두려움을 부채질한다. 이 말은 이슬람 전문가를 자처하는 여러 사람의 저서에도 등장하는데 정작 이게 어디서 시작됐는지 찾을 수가 없다. 중동 전문 저널리스트 김동문 목사는 이미 수년 전부터 "도대체 한국을 이슬람화한다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며 한국의 이슬람화 플랜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했다.

만약 국내에 있는 무슬림들이 다른 사람을 전도한다 해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그들은 이슬람을 진리로 생각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뿐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그것도 포교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개신교가 뭐라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해외 선교 차원에서 보면 더욱 할 말이 없다. 한국교회는 이슬람권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적나라하게 '중동 지역의 기독교화'를 기도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없는 지역에는 직업을 속여(?) 잠입하기도 한다. 교회는 선교사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그들은 한국교회의 귀감이 된다. 한국의 중동 선교는 헤드쿼터 없는 '한국의 이슬람화'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다.

이주민 센터를 운영하는 한 목사는 "한국 사람은 이슬람 문화를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실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슬람이 밀고 들어온다 치자. 그것에 무너질 만큼 우리의 복음이 무력한가. 개신교가 사회에서 설득력을 잃었다면 신뢰 회복을 위해 내부를 개혁할 생각을 해야지, 외부에 적을 만드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 국내에 유입된 무슬림들은 대부분 단순 직종 노동자다.

테러 이면에 깔린 차별적 시선

한국의 이슬람화와 함께 '이슬람은 테러의 종교'라는 인식이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 국립외교원 인남식 교수는 "어느 종교나 극단주의적인 사람이 10% 정도는 있다. 그리고 그중 10%는 극단주의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고 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IS(이슬람국가)에 동의하는 무슬림은 1%도 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는 그들의 교리보다는 서방국가와 아랍권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빚어낸 비극이다.

나이로비복음주의신학교(Nairobi Evangelical Graduate School of Theology) 김철수 교수는 무슬림에 대한 비서구적 시각을 계발해야 한다며 "이슬람 공동체를 상처의 공동체로 볼 수 없을까"라고 제안한 바 있다. 이슬람을 "굴욕과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아픔과 분노를 표출하는 거인"으로 묘사한 김 교수는, "단순히 통념적인 의미에서의 '선교적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진정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치료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을까"라고 말했다.

한국에 온 무슬림들은 대부분 단순 기능직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다. 자국에서는 미래를 그리기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해 들어왔다. 월급을 받아 매달 생활비를 가족에게 보낸다. 말이 통하지 않아 산업 현장에서 재해를 입어도 구제받기 어렵다. 김포이주민센터 박천주 소장은 "이주민 대부분은 한국인 사장을 굉장히 무서워한다. 불법 체류자 같은 경우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디 이야기할 데가 없다"고 말했다.

이주민 사역을 하는 목사들은 말한다. 이주민들은 조금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도 마음을 활짝 연다고. 좋은 사장, 좋은 남편을 만나지 못해 힘든 삶을 사는 이주민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구촌사랑나눔 김해성 목사는 "교회는 이들을 끌어안을 생각을 해야 한다. 한국에 대해, 교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줘야 전도도 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을 배격해서, 이들이 불만을 품고 돌아가면 한국교회는 적을 만드는 셈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무슬림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테러의 가능성을 높인다. 파리 테러의 비극을 겪은 프랑스는 사실 2002년부터 9번이나 테러 경보를 내린 바 있다. 아프가니스탄 군대 파병 후 프랑스 정부는 부르카(무슬림 여성이 입는 옷) 착용을 금지하는 등 반이슬람 정책을 폈다. 대선을 앞두고 우파 정치인들이 민족주의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할랄 음식을 걸고넘어진 일도 있었다. 테러 단체에 잘못이 있다는 건 자명한 일이지만, 그 배경에는 무슬림에 대한 따가운 시선과 공격이 있었다.

   
▲ 대규모 군사 침공으로 테러 단체를 박멸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악질적인 테러 단체가 생겨났다.

공존의 사회, 기독교의 배타성이란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개신교인들은 좋든 싫든 무슬림과 같이 살아야 한다. 서두에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서로 신경 끄자고 얘기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하지만 무슬림을 포용과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야 한다는 것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교회도 이슬람 테러의 상처가 있다. 김선일, 배형규, 심성민의 희생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무력에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할 뿐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바다. 테러 위협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이상적으로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짐 월리스(Jim Wallis)나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등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그럼에도 칼로 칼을 막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든 보이지 않는 폭력이든 마찬가지다.

누구는 기독교가 배타적일 수밖에 없어 다른 종교와 절대 타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김두식 교수는 "기독교의 배타성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원수까지 사랑한다든지 오른뺨을 맞으면 왼쪽까지 돌려 대는,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양식이 기독교 배타성의 진의라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배제하는 것으로 배타성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교회를 왕따로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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