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동성애자 주교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은 몇몇 대학에서 상영할 때마다 논란이 됐다. 감신대·고려대·서울대·서울여대·숭실대에서 영화 상영을 예고했다가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봉착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는 처음으로 성공회 주교 자리에 오른 진 로빈슨(Gene Robinson)의 이야기를 다룬다.

로빈슨 주교는 미국성공회(The Ecpiscopal Church) 소속이다. 미국성공회는 1977년부터 독신으로 사는 성 소수자를 사제로 임명했다. 2003년 로빈슨 주교가 교단 소속 첫 동성애자 주교가 됐고 2009년에는 교단 내 모든 성직에 성 소수자가 임명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2015년에는 교단 규례집에 명시한 결혼의 정의를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합에서 '두 사람'으로 변경했다.

미국성공회의 이 같은 행보는 전 세계 성공회의 반발에 부딪혀 왔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지난 1월 11일부터 15일까지 영국에서 진행된 성공회연합(Anglican Communion) 소속 관구장 회의에서 미국성공회가 동성 결혼을 허용하고 친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것을 우려해 앞으로 3년간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성공회연합이 주최하는 에큐메니컬 모임 및 종파 간 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게 됐다. 이는 미국성공회가 성공회연합 대부분의 활동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2016년 1월 11일, 영국에서 성공회연합 소속 38개 관구장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관구장들은 이 자리에서 미국성공회가 앞으로 3년 동안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도록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성공회연합이 주최하는 각종 모임에도 초대받을 수 없게 됐다. (성공회연합 홈페이지 갈무리)

성공회연합은 치리 권한은 없지만 전 세계 성공회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성공회 최고 기구다. 38개국 성공회 교회가 회원이며 전 세계 성공회를 대표하는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회의를 소집·진행한다.

수적 우세 보이는 아프리카 지역 성공회 입김 작용

관구장 회의가 진행되기 전 캔터베리 대성당 앞에는 아프리카와 영국 각지에서 온 인권 운동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우간다·케냐 등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성 소수자 차별 또는 학대를 교회가 외면하지 말아 달라며 피켓 시위를 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성공회 소속 교인 100명은 관구장들에게 공개서한을 띄워 그동안 영국성공회가 성 소수자를 차별한 것을 사과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성공회는 영국에서 독립한 첫 관구인데다 역사가 오래되어 그간 세계 성공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갈수록 교인 수가 줄고 상대적으로 아프리카 같은 제3지역에서 성공회의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다. 미국성공회 교인은 약 150만 명인데 비해 나이지리아성공회 175만 명, 케냐성공회 450만 명, 우간다성공회 870만 명이다. 그 밖에 중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성공회 교인까지 합하면 아프리카 지역의 성공회 교인 수는 1,500만 명 가까이 된다.

▲ 진 로빈슨 주교(오른쪽)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성공회 주교에 임명됐다. 그는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이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알려져 있다. 미국성공회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고 성 소수자도 사제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다. (진 로빈슨 SNS 갈무리)

더 이상 영국성공회가 미국의 편만 들어 줄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프리카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수적인 우세함으로 영국성공회를 압박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 동성 결혼은 물론 일부 국가는 동성애 자체가 불법이다.

이미 아프리카 지역 성공회와 북미의 보수적인 주교를 중심으로 세계성공회미래(GAFCON)를 창설했다. GAFCON은 영국성공회마저 세속화될 것을 우려해 영국이 주도하는 성공회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성공회 단체다. GAFCON은 미국성공회를 제외하기로 한 관구장들의 결정에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고 평했다.

한편, 성공회연합의 결정에도 미국성공회 내부 분열은 없을 예정이다. 유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한 미국성공회 지도자들을 향한 정죄의 목소리도 없다. 미국성공회의 짐 노튼(Jim Naughton) 홍보부장은 "성공회연합의 결정을 은혜와 겸손으로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미국성공회는 동성애가 죄라는 입장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죄가 아닌 것을 회개하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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