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목회자·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가 2016년 3월 7일부터 9일까지 경기도 가평 필그림하우스에서 열립니다. 이재철·이찬수 목사와 한완상 박사가 전체 집회를 인도하고, 김종일·양진일·이은경 목사, 정신실 작가가 선택 강좌를 엽니다. 컨퍼런스 개최에 앞서 목회멘토링사역원 소식지를 발간했습니다. 소식지에 실린 글들을 하나씩 게재해 <뉴스앤조이> 독자들과 나눕니다. - 편집자 주

천형(天刑)이 된 시선

금수저나 은수저는 몰라도 나는 성경책을 옆에 끼고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태어나 보니 아버지는 목사였고, 내 이름은 교회 냄새 물씬 나는 '신실'이었다. "신실아" 부르는 소리는 '목사 딸'이라는 보통명사처럼 들렸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 우체국 안에 있던 전화국에 놀러 갔다. 처음 보는 교환원이 나를 보고는 "교회 집 딸이구나. 79번 집!"이라고 말했다. 딱 부러지는 인상의 교환원 언니 입에서 79번이란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 게다가 나를 알고 있어.' 무언가가 어린 나를 긴장시켰다. 아버지는 사사로운 일로 전화나 전기 등을 못 쓰게 했다. '교회 돈'이 나간다는 이유였다. 교환원 언니 입에서 '79번'이 나왔을 때 어린 내가 왜 움찔했으며, 그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몰래 전화를 써도 교환원 언니는 다 알고 있다는 것."너는 목사의 딸로서 전화를 아껴서 쓰고 있는가. 전기는? 똑바로 해라. 지켜보고 있다."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중요한 목소리다.

▲ 음악치료사이자 늦깎이 목사의 아내인 정신실 작가는 제5회 목회자·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둘째 날 '목회자 부부의 탈진과 정서적 돌봄'을 주제로 특강과 워크숍을 진행한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자료 사진)

어린 눈에 아버지는 훌륭해 보였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좋은 목사님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일찍부터 아버지 딸로 살았으며 자부심도 컸다. 부모님의 '목사 딸 교육법'으로 나는 나쁘지 않은 아이로 컸다. 속이 쓰려도 겉으로 미소 지으며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다. 문제는 목사 딸 교육법이 드리운 그림자다. 착한 행실 뒤에 사랑보다 두려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나는 목사 딸로 살면서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사는 법을 터득했다. 천국에서 모든 짐을 벗고 자유로우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할 마음은 없다. 누군들 위선적으로 살고 싶겠는가. 목사와 목사 가족 역할에 충실하려면 신도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던 아버지는 목사로서 신도들에게 책잡힐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내가 '목사의 딸'이라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랑의 법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살지 못하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칠 수 없는 법. 교인들의 기대와 시선을 천형처럼 진 부모님은 누구보다 자신을 옥죄며 평생을 사셨다. 우리 부모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뒤늦게 목사의 아내가 된 내 이야기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은 목회자만이 아니다. 남 눈치를 보며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고, 뒤돌아서 자신을 혐오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딜레마다. 칼 융(Carl G. Jung)은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얼굴, 인격의 가장 겉 부분을 '페르소나(Persona)'라 명명하였다. 목사·장로·선생·엄마·아들 등의 직함이나 역할은 사회적 얼굴이다. 페르소나는 타자의 시선(기대)에 의해 형성되며 소속된 집단에 충실하면서 강화된다. 페르소나는 벗어 버려야 할 불온한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페르소나를 '진짜 나'로 여기는 동일시가 인격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동일시가 극도에 다다라 페르소나와 내가 구별되지 않으면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이 일어나 흔히 말하는 신경증에 걸리게 된다. 목사는 역할 특성상 더 쉽게 페르소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위험한 위치에 있다. 융의 '투사(projection) 이론'이 이런 메커니즘을 잘 설명해 준다. 

'투사(projection)'란 말 그대로 프로젝터(projector)를 통해 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보고, 그것이 컴퓨터 아닌 스크린에 있다고 믿는 심리 현상이다. 나쁜 것은 자기 마음(컴퓨터)에 있는데, 그걸 모르고 밖의 타인(스크린)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는다. 공연히 미워하거나, 나도 모르게 격렬히 비판하게 되는 등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투사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의 어둠뿐 아니라 좋은 부분까지 밖으로 투사하기도 한다. 목사님들을 향한 과도한 존경과 기대가 그 예다. 내가 살아 내야 할 거룩한 삶을 대신 살아 주기 바라는 책임 전가와 같다. 융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Robert A. Johnson)은 이것을 '황금 투사'라 한다. 자기 속 금과 같이 소중한 것을 투사해 더 고귀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 버린다. 이 투사는 목회자의 부정적인 면을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과도한 존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받는 대상 또한 문제이다.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예수님 같은 분입니다" 같은 칭찬과 기대로 표현되는 황금 투사를 넙죽넙죽 내면화하는 목회자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황금 목걸이를 목에 거는 것과 같다.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는 자아 팽창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투사의 드라마에 갇혀 있으면 신도들은 성장하기 어렵고 목회자들은 자기 자신이 되어 살기 어렵다. 이것이 오늘 목회자와 목회자 아내들의 비극이다. 사모는 활달해야 하고 동시에 차분해야 하며, 적당히 세련되어야 하지만 외모가 화려하면 안 된다는 둥. 목회자와 그 아내에 대한 기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춤출 수 없다! 그것은 '장단'이 아니다. 실체가 아닌 스크린에 비춘 그들의 마음일 뿐이다. 그것을 분별하는 눈과 황금 투사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79번 집 딸이구나!" 이 한마디의 위력에서 벗어나는데 수십 년의 시간과 기도가 들었다. 여전히, 아직도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 제5회 목회자·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참가 안내 및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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