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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가 평화의 소녀상을 보았다면

일사각오 신앙, 과거를 기념할 것인가 미래로 계승할 것인가

김종희   기사승인 2016.01.11  10: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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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살림 없는 살림 노름판에서 다 거덜 내고, 허구한 날 알코올에 쩌들어 동네 골목을 갈지자로 누비는 남자가 있다. 자기 눈에 거슬리면 지나가는 애먼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결국은 피를 보고야 만다. 아무개 하면 그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인간 망종(人間 亡種)으로 낙인찍혔다. 다들 그와 눈치 마주치면 슬슬 피하고 눈에서 사라지면 침을 퉤하니 뱉는다. 처자식은 몸도 마음도 바짝바짝 말라 간다. 언제나 마르지 않는 게 있다면 눈물뿐이다. 창피해서 이 동네에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한숨을 쉬지만, 그렇다고 다른 데로 옮길 여력도 없다.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2015년 12월 25일 성탄절 밤이다. 어디선가 몇 번 본 듯하지만 우리 가족이랑 무관한 남자가 찾아왔다. 자기가 누군지 밝히자 아내와 아이는 너무 놀라 몸을 떨었다. 늘 눈칫밥에 절어 지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깨를 폈다. KBS가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만든 다큐멘터리 '일사각오 주기철'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눈치 보며 살던 개신교인들에게 "사실은 이분이 진짜 아버지였어" 하는 자부심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선물이었다.

   
▲ 주기철 목사(1897~1944). 1937년 12월,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됐다가 풀려난 뒤에 찍은 사진.

KBS도 시청자들의 예상치 못한 호응에 흥분한 듯 홍보했다. "지난 12월 25일 밤 10시 KBS 1TV <다큐1>을 통해 방송된 성탄 특집 '일사각오 주기철'이 색다른 구성과 완성도 높은 작품성으로 호평을 모으는 가운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략) 방송이 나간 25일 밤 10시부터 12시 사이 '일사각오 주기철'은 각종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1위로 급상승하며, '2015 싸이 콘서트'를 앞질렀다. 시청률 또한 종교 인물을 다룬 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수도권 8.6, 서울 9.7을 기록하며, 동일 시간대 KBS '다큐1' 정규 프로그램으로서는 올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략)" (KBS 보도 자료)

방송사도 시청자도 달뜬 기분으로 세밑을 보내고 세초를 맞았다. 개신교 시청자들은 감동과 감탄을 연발하며 SNS에서 영상을 공유했다. 이런 호응에 고무되어서일까. KBS는 2탄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극장판으로 만들어서 올해 3월에 영화관에 올릴 계획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개신교가 이 정도 대박 선물을 받은 적이 있던가.

공교롭게도 다큐멘터리 방영 사흘 뒤인 28일, 조선의 10대 소녀들을 상대로 일본이 자행한 성노예 범죄 문제에 한국과 일본의 두 외교장관이 합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70년 전 한 목회자는 목숨을 걸고 일제의 탄압에 맞섰는데, 오늘 대한민국 지도자는 일본 앞에 알아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기철 목사는 하늘에서 이 장면을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주기철 목사 이야기를 간단히 훑어보자.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는 천황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살도록 강요했다. 천황이 사는 궁궐을 향해서 절을 하는 궁성요배와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거기에 절을 하는 신사참배는 그러한 정책 중 일부였다.

일제의 탄압 앞에서 한국교회 주류는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명분은 그럴듯했다. 교회를 보호하고 기독교 학교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지 종교의식이 아니므로 배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와 학교를 하나님 손에 맡기지 않고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말이다. 일본 제국에서 천황과 이집트 제국에서 바로 왕은 반인반신, 신의 대리자였다. 국가 의식과 종교의식은 별개라는 논리로 분리하는 것은 우상숭배자의 교묘하면서도 허술한 이분법에 불과하다.

교계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수용하자마자 단체로 신사로 가서 절을 하는 등 몸소 실천했고, 교인들에게도 신사참배에 동참하라고 독려했다. 개신교는 너무나도 일찌감치 변절을 몸에 익혔고, 7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변절의 진상을 완벽하게 재연했다.

   
▲ 감옥에 들락거리며 신사참배에 맞서 투쟁했던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했다. 1940년 9월 20일, 주 목사가 5차 검속으로 붙잡혀 끌려가는 도중에 교인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모습을 재현한 장면. (다큐멘터리 '일사각오 주기철' 갈무리)

그렇게 개신교 교단이 집단적으로 일본의 신과 왕에게 절을 할 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데 그치지 않고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7년 동안 감옥을 들락날락했고, 그 안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교회로부터는 버림을 받아 목사직이 파면되었다. 산정현교회는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가 옥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는 겨우 49세였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하지 않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오랜 세월 감옥살이를 했고, 가족이 고생을 했고, 결국 자신은 감옥에서 죽었다. 생명을 걸고 일본에 맞서 싸운 것이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에 맞서 싸우는 동안 전국 곳곳에서는 10대 어린 소녀들이 속아서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대표적인 기독교 인사인 김활란 씨는 조선의 여성들이 정신대로 나서야 한다고 독려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많은 조선의 어린 딸들이 성노예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주 목사는 몰랐을까.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주기철 목사는 요즘 말로 운동권 목사가 아니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조만식 선생을 만나 애국심을 배웠다. 20대 초반에 3·1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철저하게 교회 안의 목회자로 활동했을 뿐 민족의식이 유난하지는 않았다. 남한에서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로 유명세를 날렸고, 마산에서 평양으로 올라가 목회한 산정현교회에는 엘리트 교인들이 많았다. 오늘날로 치면 설교 잘하기로 이름난 이 아무개 목사가 엘리트 많이 모인 강남의 교회에서 목회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주기철 목사는 우상숭배를 거부했고 지금은 거부하지 않는다는 정도겠다. 일본의 사악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에 정면으로 맞설 정도의 의식을 갖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자신을 일본의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자발적이지 않았다 해도 창씨개명을 했다. 개인 돈이면 몰라도 하나님께 헌금한 교회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았으면 그는 일본의 통치를 순순히 인정하면서 목회에만 전념했을지 모른다.

다른 목사들은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주 목사는 정반대였다. 국가 의식이 아니고 종교의식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거부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냐 국가 의식이냐 하고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는 사안인가. 둘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는데, 주 목사는 그러한 인식에 미치지 못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이원론에 지배되어 있었다. 주 목사에게 위안부 문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신앙적인 차원의 사안이 아니다. 그러니 위안부로 끌려가는 소녀 이야기를 들었어도 크게 귀를 기울이거나 마음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임원들이 신사참배하는 모습. (다큐멘터리 '일사각오 주기철' 갈무리)

해방 직후,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주기철 목사 동상을 만들려고 했다. 주 목사의 부인 오정모 씨는 동상 건립을 반대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을 염려했다. 주기철 목사가 무엇 때문에 순교했는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우상도 숭배하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포기했다. 그런 자가 자기 형상을 떠서 동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시도에 동의할 리가 없다. 아내는 남편을 기념하는 어떠한 일도 거부했고, 가족이 마땅히 받을 만한 혜택과 배려도 거절했다.

주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 아내도 암으로 뒤를 따랐다. 주기철 목사가 목회했던 평양 산정현교회 출신들이 남하해 교회를 세웠다. 차츰 늘어서 평양의 산정현교회를 이어받은 남한의 산정현교회가 4군데다. 산정현교회들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은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그동안 여러 사업을 벌였다. 주로 예장통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목사직을 면직했던 노회는 복권하고,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출판, 세미나, 뮤지컬 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2015년, 예장합동 교단도 주기철 목사를 복권하기로 결의했다.

국가적인 예우도 이어졌다. 국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68년 국립묘지에 안장했으며, 2007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2015년 3월에는 그의 고향 진해에 기념관과 박물관을 건립했다. 총 50억 원이 들었는데, 국고(國庫)가 많이 들어갔다. 이처럼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을 기념하는 흐름이 이렇게 곳곳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두 가지 의구심이 든다.

기념관 건물 외벽에 '항일 독립운동가'라는 글귀가 커다랗게 써 있다. 왠지 어색하다.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이며 실천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항일, 독립, 운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행적이 너무 왜소하다.

그리고 한국교회도 그의 순교 신앙을 소비하는 데 머물 뿐 재생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그의 신앙을 기념하려고만 하지 더 넓고 깊게 계승하려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이 개인의 과거에 머물러 있을 뿐 한국교회와 사회의 미래를 향하고 있지는 않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목사가 다큐멘터리에 나와 발언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한계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닌 예장합동이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을 본받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만큼 만만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목사들이 주기철을 숭상하면서 동시에 위안부 합의를 지지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다큐멘터리에 스미요시 에이지 목사가 등장한다. 그는 한때 도쿄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했다. 2007년, 스미요시 목사는 1943년 교회 초창기 주보를 발견했다. 주보를 보면, 예배를 드리기 전에 천황부터 경배하고 기미가요를 제창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 사람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는 한국에 참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인들의 분노를 사서 교회에서 쫓겨났다.

   
▲ 스미요시 에이지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신앙'을 접하면서 목회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됐다. 그는 주 목사의 신앙을 본받아 후쿠시마에서 이재민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일사각오 주기철' 갈무리)

스미요시 목사 부부는 후쿠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2011년,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원전이 폭발해 방사능 피해자가 속출했다. 다들 거처를 잃었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스미요시 목사 부부는 두 자녀가 공부하는 도쿄로 돌아가지 않았다. 폐허가 된 그곳에 남아 이재민을 돌보며 지금껏 목회하고 있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신앙을 알게 되면서 목회 방향을 180도 바꾸었다. 이재민을 돌보는 것이 예수는 따르는 것이며, 그것이 곧 일사각오 신앙이라고 확신했다.

스미요시 목사의 행적을 검색해 보면, 사회의식이나 신앙의 공공성이 깊거나 넓지 않다는 한계가 보인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의 이원론적이지만 순수한 믿음과 실천하는 신앙은, 가해자 국가의 목사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스미요시 목사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더 넓고 깊게 실천하는 목회자를 꼽으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떠오르지 않는다.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을 치워야 한다, 지켜야 한다,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70년 전 주기철 목사는, 자기의 동상을 세우는 것에 절대 반대했을지 몰라도 꽃같이 고운 소년들이 성노예로 끌려가는 참혹한 현실에는 특별한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70년 후 지금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계승하겠다는 우리는, 위인 한 사람의 동상을 만들어서 신화 속의 영웅처럼 떠받드는 방식을 멈추고, 더 많은 소녀상을 더 많은 곳에 세워서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널리 퍼뜨리자고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을 더 깊고 더 넓게 계승하는 모습이고, 모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멋진 성탄 선물에 답례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12월 29일, 주한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가수 이광석 씨가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을 부르며 위안부 합의에 항의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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