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이천으로 내려가기 전 새벽송을 듣고 가겠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전달하자 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으레 그렇듯 올해 연말에도 휘황찬란한 조명과 캐럴 소리가 시내를 뒤덮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 청계청 광장, 강남역 등 도심지는 젊은 남녀들로 북적여 성탄절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고난함께) 사무총장 진광수 목사는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다른 세계가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한쪽에서는 수십 일에서 수백 일 동안 천막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당 해고, 비정규직 차별,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사회적 차별, 진실 은폐 등 그들이 천막생활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고난함께와 평화교회연구소는 올해 성탄에도 '갑'의 횡포에 맞서는 이들을 찾았다. '2015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새벽송'은 올해로 4년 차다. 15명가량이 모여 서울 각지에 있는 농성 현장을 찾았다.

4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문제가 해결됐다. 재능교육, 코오롱, 스타케미칼, 쌍용자동차 등지에서 사 측의 부당 행위에 맞서던 이들은 투쟁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풀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꼬인 문제들도 많았다. 올해에도 농성장이 여러 군데 생겨났다. 동양시멘트, 기아자동차, 풀무원,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기나긴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올해 새벽송 참가자들은 하이디스 농성장에서 시작해, 장애인 농성장, 세월호 분향소, 삼표그룹 동양시멘트 농성장, 기아자동차 고공 농성장, 풀무원 고공 농성장, 삼성 반올림 농성장 등 7곳을 방문했다.

새벽송을 돌며 참가자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과 '저 들 밖에 한밤중에'를 불렀다. 옛 추억을 담아 과자 봉지를 만들어 전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등에는 기업의 부당 행위를 규탄하는 현수막을 단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방문에 고마워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함께 캐럴을 불렀다.

▲ 광화문역 안에 있는 장애인 농성장, 진광수 목사가 농성 중인 이들에게 달력을 전달하고 있다. 장애해방열사'단' 박승하 씨는 1,200일 넘게 싸우는 동안 벌써 많은 장애인 동지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교회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말에 사람들은 하나둘 입을 열었다. 저마다 사연은 기구했다. 잘나가던 LCD 제조회사 하이디스는 대만 자본에 넘어갔다. 기술만 뺏기고, 노동자들은 버림받았다. 다음 달이면 정리 해고를 당한 지 300일이 된다.

광화문역 내에 있는 장애인 농성장은 1,222일 차 싸움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활동 보조인이 없는 상태에서 화재로 숨진 장애인이나 등급 심사에서 탈락해 수급 자격을 박탈당한 장애인 등 제도적 차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장애인을 등급별로 나누어 차별하고, 장애인 가족이 장애인을 무조건 책임지라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를 철폐하라고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무관심뿐이었다.

광화문역 지하에서 올라와 세월호 천막을 찾았다. 세월호 가족들에게는 두 번째 성탄이었다. 유가족 유경근 씨는 2년 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새벽송을 돌았던 딸 예은이를 떠올렸다. 얼마 전 있었던 청문회 이야기도 안 할 수가 없었다.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철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경근 씨는 "힘들긴 했어도 우리가 품었던 많은 의혹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문회를 계기로 진실을 밝히는 데 더욱 앞장서겠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희생자들 영정과 유가족 앞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바랐다.

 

멀지 않은 곳에 동양시멘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주한미국 대사관 뒤편에 있는 삼표그룹 본사 앞. 마침 이들은 개사한 캐럴을 크게 틀고 자못 흥에 겨워 있었다. 이들은 오늘로 부당 해고 300일째다. 강원도 삼척 작업장에서 석회석을 깨고, 실어 나르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정규직이 먹은 도시락을 치우고 정리하는 등 차별받아 온 이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모두 해고됐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 해고'라 판정했지만, 회사는 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싸움이 이어지는 사이 동양시멘트는 삼표그룹에 넘어갔다. 지난 8월, 노동자들은 천막과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 장소는 국가인권위원회 앞. 10분여를 걸어 시청 앞에 도착하니 옥상 전광판에 사람의 움직임이 보였다. 기아자동차 고공 농성 상황실장 최종원 씨는 "가만히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 마침 지금이 운동 시간이다"고 말했다. 고공 농성에 돌입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정명 씨와 한규협 씨는 27일이면 투쟁 200일을 맞는다. 농성 중 경찰이 물과 음식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40일 동안 밥을 굶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3,4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고 했지만 갈 길이 멀다. 법원이 노조 손을 들어줬지만, 사측은 복지부동이다. 전광판 맨바닥에서 여름에는 찌는 뙤약볕으로, 겨울에는 추위로 쩔쩔매고 있다. 눈과 비도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 최근 한규협 씨는 발가락 3개에 동상이 걸렸다.

▲ 고공 농성 중인 이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켜 새벽송 온 이들을 맞이했다. 농성 중인 기아차와 풀무원 노동자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차를 타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으로 이동했다. 여의2교 앞 광고탑에는 투쟁을 다짐하는 현수막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아래에는 추락사 방지를 위한 에어 매트가 설치돼 있었다. 풀무원 제품을 운송하던 화물노동자 연제복 씨와 유인종 씨는 지난 10월 광고탑에 올랐다. 하루 기본 15시간 운송에 월급은 20년째 동결. 사고가 나면 수리비와 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처지다. 수억 원대 화물 트럭도 본인 부담이다. 문제 제기를 시작하자, 사측은 8월치 운송료와 유류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다리 밑 천막에서 함께하고 있는 풀무원 노동자들은 "올라간 사람 중 한 명은 혈당이 크게 낮아졌고, 다른 한 명은 다리에 마비가 왔다"고 상황을 전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못 내려온다"며 계속 싸우고 있다. 노동자들은 창업주 원혜영 국회의원에게 "사람 목숨보다 소중한 게 뭐냐. 내려올 명분만이라도 달라"고 했지만, 달라진 건 없다.

마지막으로 찾은 강남역 8번 출구에 있는 삼성 본사 앞 반올림 농성장, 이곳은 천막이 설치된 지 80일째다. 대여섯 명이 천막 안에서 나왔다. 반도체 등 전자 산업 분야 노동자들이 화학약품에 노출돼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고 소리쳤다. 돌아오는 건 "개별 보상해 줄 테니 합의 내용은 비밀로 하고, 민형사상 이의 제기하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2007년, 22세의 나이로 급성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삼성뿐만 아니라 전 산업체의 문제다. 죽어 가는 이유도 모른 채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꼭 끝까지 싸워서 안전한 환경을 만들고 싶다"고 의지를 전했다.

처한 상황 때문에 울적할 법 했지만, 현장 사람들은 새벽송을 온 이들을 살갑게 맞아 줬다. 노래를 불러 주고, 과자 봉지가 담긴 선물을 건네자 받는 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렸을 적 같이 새벽송을 돌던 기억이 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있던 풀무원 노동자들은 즉석에서 전을 부쳐 줬다. 기아차 노동자들은 건물 옥상에서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 응답했다.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은 "삼표그룹 회장님이 감리교회 장로님이라던데…"라며 농담을 던졌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새벽송에 참가하려고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대학원생 김 아무개 씨는 "춥고 힘든 상황에서 싸우고 계시는 거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남들의 신앙을 판단할 건 아니지만, 나와 내 가족 위한 신앙생활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말고, 이런 분들과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년째 참가하고 있는 이진경 교수(협성대)는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님들이 이런 곳에 더 가까이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도 바뀐다. 교인들의 세속적 욕망을 충족해 주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들에 관심 둘 수 있도록 앞장서면 좋겠다"고 했다.

전남병 목사는 현장을 찾아, "올해 2,800여 일을 끈 재능교육 문제가 해결됐다. 작년 새벽송 돌 때 우리가 가서 기도해 준 덕분이라고 믿는다. 여기 계신 분들도 내년에는 뵙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외로운 싸움을 하는 이들의 승리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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