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평신도 교회인 새길교회에서 신학위원으로 있는 한완상 박사가 12월 6일 주일예배 때 나눈 설교문입니다. 30주년을 앞둔 새길교회의 시작을 돌아보고 공동체가 나아갈 길에 대해 적었습니다. 이 설교는 비단 새길교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설교문 제목처럼 더 예수답게 살아가려는 모든 한국교회에 속한 이야기입니다. <뉴스앤조이>는 새길교회의 허락을 받고 설교문을 게재합니다. 세 번에 걸쳐 올리려고 했던 설교문의 마지막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눅 23:46-47)

새길공동체를 더 예수다운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려면

우선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세상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개독교로 욕먹게 된 까닭을 새길공동체는 한국의 역사 현실에서 찾아보며 그것을 거울삼아 우리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 일을 우리 공동체가 앞장서야 합니다. 지난 70년간의 분단 상황에서 남북 사이의 증오와 갈등을 불러일으켜 그것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고, 냉전 대결을 부추기면서, 정치‧경제민주화를 훼손시키는 주도 세력이 친일 냉전 세력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력 중심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적 냉전 이데올로기가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과 교합하게 되면 무서운 독선적 권력 횡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냉전 근본주의 기독교 문화가 분단된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심각하게 훼손시켜 왔습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의 복음을 왜곡시켜 왔음을 우리는 매 주일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들은 복음의 공공성보다는 사사로운 개인의 출세와 육체의 건강에 더 관심이 있고, 예수 복음의 변혁적 동력보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세속적 번영에 더 관심을 쏟습니다. 참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토록 세속적 권력과 번영을 탐닉하면서도 신앙은 지극히 초월적이고 이원론적인 개인 영성을 강조합니다. 세속적 권력 앞에서 짐짓 초탈한 신앙 입장을 취합니다. 이들은 성육신 신앙을 개인의 속죄 신앙으로 직결시키면서 역사 예수의 하나님나라 세우기에는 무관심합니다. 값싼 '이신칭의' 신앙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부패한 삶을 살아도 주일에 교회 와 십자가의 속량으로 주기적으로 세탁하듯 한번 씻어 내면 또 가뿐한 느낌으로 한 주일 더 죄 지으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반(反)예수적 삶이 우리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우리는 매 주일 자성해야 합니다. 예수답지 못한 우리의 부족한 모습, 못난 모습을 항상 공동체적으로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에 앞서, 아니 그런 기도와 함께 우리 자신의 나태와 교만을 항상 성찰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더 예수답게 되기 위해 몇 가지 대안적 프로그램을 적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전복적 발상을 오늘 우리 상황에서 어떻게 번역하여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공동체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 위의 말씀에서 "옛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대안적 삶의 지침을 구체적으로 예시해 주셨습니다. 이를테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 하는 말을 들었으나, 너희는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돌려대라"고 새로운 지침을 주셨습니다. 이 대안적 대응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갖는 급진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권고는 폭력에 무저항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폭력에 대해 철저히 비폭력으로 대응하되, 보다 당당하고 여유 있게, 그리고 용기 있게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뜻입니다. 

폭력자들은 약자를 능멸하면서 교묘하게 폭력을 행사해 약자를 굴종시킵니다. 여기에 비폭력적 방법으로 맞서려면, 용기 있게 왼뺨을 들이대며 당당히 맞으라는 뜻입니다. 폭행자를 부끄럽게 만들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예수의 깊은 뜻은 악행자에 맞대응하면서 가해자의 악한 방법을 활용하여 보복하지 말라는 데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갈릴리 예수의 첫 설교를 신학자들은 나사렛 선언(Nazareth manifesto)이라 명명하기도 합니다. 이 선언의 감추어진 주요 메시지는 신의 보복 행위를 예수께서 짐짓 텍스트에서 빠뜨렸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앙갚음의 신의 보복적 지배가 아닙니다.

이 점은 최근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잘 부각시키며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에는 보복적인 것(retributive justice)도 있지만,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도 있음을 크로산은 지적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나눔의 정의, 곧 비움과 지움의 정의실천이 규범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그리스도인이 되는가>(한국기독교연구소)라는 책에서 장엄하고 분명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예수의 말씀과 삶,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모든 메시지에는 상호 모순적 요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요한 점은 모든 성서 해석의 규범은 역사의 예수라고 하면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크리스천 경전의 규범과 기준은 성서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성서의 그리스도의 규범과 기준은 역사적 예수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서는 예수다운 공동체, 나아가 더 예수다운 공동체를 일구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의 전복적 발상법을 우리 공동체에서 더 깊이 공부하고 따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으나 예수와 면대면 소통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2000여 년 후를 살고 있는 저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흔히 역사적 예수에 무관심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20절을 보면 예수의 원수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더 설득력 있게 촉구합니다. 저는 그의 편지 글귀에서 갈릴리 예수의 목소리를 더 실감나게 듣게 됩니다. "원수가 주리면 먹을 것을 주고, 목이 마르면 마실 것을 주라"는 권고로, 바울은 원수들 간의 발악적 악순환을 발선(發善)의 선순환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그래야만 악을 이겨낼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롬 12:21).

이것은 한국교회 안팎에서 벌어지는 온갖 발악적 갈등을 원천적으로 잠재우는 동력을 제공해 주는 예수의 당부이기도 합니다. 이 당부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도 작동시킬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 현실을 보면 아뿔싸, 열한 명의 대통령 중에 교회 장로가 대통령이 된 경우가 세 번 있었습니다.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이 모두 교회 장로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이 세 장로님이 대통령 재임 시에 남북 관계는 최악이었습니다. 남북 간의 발악적 악순환은 더 격심했습니다. 도대체 역사적 예수의 발선 동력은 이분들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어디로 증발해 버렸을까요? 아예 처음부터 그들의 신앙에는 예수의 평화, 하나님의 발선적 평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 영향력 있는 큰 교회의 장로였기 때문이었을까요? 

또 하나, 새길공동체에서 제가 권하고 싶은 예수다운 실천은 예수님의 '발 씻어 주기'의 깊은 뜻을 되새기며 실현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다운 재관식을 치르시기 전, 예수님은 열두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며 참다운 지도력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새길교회에서도 성찬 예식과 더불어 예수님처럼 섬기며 고난당하는 메시아 체험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분이 힘없고 약한 분, 특히 부당하게 아파하는 자매‧형제의 발을 씻어 주는 의식이 필요할 듯합니다. 힘의 관계를 떠나서, 자매‧형제를 아프게 했다고 여기는 분이 솔선해 아파하는 분의 발을 씻기는 일을 예배 속에서 주기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행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다른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시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사회과학적 통찰력을 지닌 지식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화 '벤허'를 볼 때마다 예수다움의 감동을 가슴으로 느낍니다. 복수심에 불탔던 벤허는 십자가 처형 광경을 보고 감동했던 모친과 누이가 병이 낫는 것을 확인하고 비를 맞으며 모친과 오누이를 껴안습니다. 그 순간, 그의 가슴 깊이 응고되어 있던 복수심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기쁨의 감동을 눈물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예수의 비참한 듯한 재관식이 주는 역설적 승리의 환희를 느낍니다.

우리 공동체의 지식인들이 모여 과연 처형된 갈릴리 예수를 보고 진실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 없는 의로운 분이라고 고백했던 로마 장교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를 묻는 작업, 곧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사형집행인의 이후 행적을 추적해 보는 지적‧영적 모험을 하는 것이 새길공동체다운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이 뿐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상상력으로 단숨에 착한 사마리아 드라마 각본을 만들었는데, 여기 쌍놈인 사마리아인의 온전한 돌봄을 받고 온전한 사람이 된 유대인은 그 후에 어떻게 변했을까를 추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요, 의미 있는 일이지요.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을 돌보는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돌아와서 어떻게 그가 더 예수답게 변했는지도, 신앙적인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봄 직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 예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 도마가 직접 예수의 십자가 상흔을 손으로 만져 보았는데도, '도마복음'이 그의 작품이라면 왜 도마복음에는 고난 이야기(passion narrative)가 없고 예수의 왈왈(sayings)만 있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어느 제자들보다 더 실감나게 예수의 십자가 상처를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기에, 그는 베드로보다 최후를 더 고통스럽게, 그러나 더 의미 있게 겪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학적 상상력으로 도마의 삶을 재구성해 볼 수는 없을까요? 이런 지적이고 영적인 협력을 통해 새길공동체가 더욱 예수다운 공동체로 성숙해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비움을 통해 승리한 영광의 사건

무엇보다 28년 전, 새길공동체를 시작했던 저는 새길의 30주년을 앞두고 저의 불찰을 먼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분단의 조국 현실에서 세워 보기 위해 예수의 비전으로 대안 공동체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안적 모습이 오늘에 와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주목하면서 그 부진의 태반은 저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릴리 예수의 운동을 한국의 분단 현실과 한국의 타락된 자본주의 시장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소금의 맛을 이미 잃어버려 어둠의 부끄러운 스캔들로 비난받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예수의 공공적, 감동적, 변혁적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끈질기게 함께 노력하지 못했던 저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28년이 되었는데도 때론 정체성의 논란에 빠지게 된 것에 대해서 저는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예수 이름으로 우리의 갈망을 기도하는지 모르는 자매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보고 한없이 저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교회 밖의 저의 삶은 일종의 험악했던 파란만장의 삶이였지만, 새로운 대안 공동체를 시작해 놓고 그 대안적 예수의 비전을 새길공동체 안에서 육화하는 일에는 게을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회한을 가슴에 안고 몇 가지 우리 공동체가 더 알차게 예수다워지기 위해 명심해야 할 점을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한국의 제도 교회의 온갖 비리와 부정에 식상하고 절망한 신자들이 가나안 신자로 변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저는 예수의 비움을 통한 채움의 선교, 지움을 통한 세움의 운동, 고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동력 체험이 더욱 절박하게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지기 실천, 선제적 원수 사랑으로 발선을 실천하는 일이 너무 힘들기에, 두 가지 가짜 대안이 앞으로 한국교회에서 더욱 극성을 떨 것으로 염려합니다. 하나는 더욱더 천박한, 값싼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교회가 늘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를 버리고 떠나면서 역사의 예수도 함께 버리고 떠나는 경향을 염려합니다. 대체로 지식수준이 높은 이들에게는 가현설적 예수(인간 예수를 무시하는 신앙)나 신플라톤적 신앙과 영지주의적 신학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괴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가 도래하는 경우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고 무력화되기 쉽지요. 역사의 고난 과정 속에서 육화된 비움과 지움의 용단, 악을 근원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십자가 결단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이런 길은 지적으로 매력적일지 모르나, 예수의 '새 길'이 아니라, 안일한 '샛길'이 되기 쉽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처절한 민족 현실과 국가 현실, '헬조선'이라고 인식되며 갑질하는 이 땅의 '국가 엘리트', '시장 엘리트', '문화 사회 엘리트'가 사나운 이리 떼처럼 날뛰며 약자를 더욱 약하게 하고 을들을 더욱 괴롭히는 현실에서, '십자가 고난'을 통한 '사랑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벅찬 일입니다. 이런 때에, 예수의 복음을 요청하는 공공적이고 변혁적 헌신을 처음부터 아예 피하고 싶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비폭력 적극 저항은 실제로 투쟁적 폭력 저항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는 세속적인 폭력적 대응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기독교를 아편으로 힐난하며, 세속적 급진주의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다. 오늘의 이슬람 국가나 알카에다나 또는 엉뚱하게 KKK가 취하는 선택으로 빠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 미국과 유럽의 최근 상황을 보면, 트럼프(Trump)나 르펜(LePen)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신나치즘의 발호를 보는 듯합니다. 우리 상황에서도 비정상적 극우의 흐름이 엿보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적 예수의 선택이 더욱 우리에게 절박하게 요청됩니다.   

그런데 이런 폭력적 대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예수의 십자가 비움을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유혹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 복음에 대한 치매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의 사즉생(死卽生)의 선택을 아예 배제하는 것이지요. 예수님 자신도 자기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보면,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도 인간이기에, 십자가 지기를 주저했겠지요. 예수의 인간적 측면을 보면 십자가에 비참하게 달려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으면서 메시아가 되고 싶진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때, 막달라마리아는 그녀가 평생 모았던 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부어 그의 메시아됨을 확인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됨은 치욕스럽게 죽어야 된다는 것을 이 여인은 남성 제자들과 달리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저했을 예수께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소중한 옥합을 깬 것 같습니다. 주저하는 예수에게 죽음의 장례식이 참 영광의 재관식임을 상기시켜 주었지요. 그것을 잊고 싶었던 예수에게 아프게 상기시켰지요.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다시금 그의 십자가 지기를 결심하고, 이 여인의 십자가 신앙을 높이 칭찬하시며 이 여인의 높은 실천적 신앙 행위를 기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결단코 망각되어야 할 비참한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의 문을 활짝 열어 주는 열쇠로 작용하는 사건입니다. 비움과 지움을 통한 사랑의 승리를 보장하는 영광의 사건입니다. 이 여인의 일을 기억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저에게는 우리가 십자가 사랑을 망각하는 치매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으로 들립니다. 교회는 그래서 변혁적인 기억 공동체입니다. 예수의 그 공공적, 감동적, 변혁적 십자가 복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어둠의 역사 현실에서 더욱 그것을 기억하며, 분단 70년을 맞는 이 비극의 땅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공의의 새 질서를 세워 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의 '새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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