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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비판할 시점에만 '정교분리', 조찬기도회 가서는 '정교 유착'"

이만열 교수, 현대사에서 한국교회의 공과(功過) 강의

구권효 기자   기사승인 2015.12.08  13: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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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가 12월 7일 좋은교사운동 역사교사모임이 마련한 세미나에서 한국 현대사와 개신교에 대해 강의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유신 정권과 신군부, 1990년대 통일 운동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약 두 시간 반 동안 숨 가쁘게 훑었다. 현대사에서 개신교의 공과 과를 짚는 시간이었다.

이 세미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계기로 마련됐다. 국정교과서로 회귀한 시대에 기독교인 교사들이 먼저 한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날은 4주간 진행된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현직 교사와 교사 지망생 등 30명이 모여 이만열 교수의 강연에 집중했다. 강의와 질의응답으로 예정된 시간을 30분 넘겨서야 끝이 났다.

   
▲ 이만열 교수가 좋은교사운동 역사교사모임이 마련한 강좌에서,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에 대해 강의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황교안 총리의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발언은…"

이만열 교수는 해방 후 우리 민족이 세 가지 과제, △일제 잔재 청산 △분단 상황 극복 △민주주의 토대 설립을 모두 실패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듬어야 할 시점에 오히려 토대를 허물어 버렸다고 했다. 1948년 대통령에 입후보할 때부터 정적(政敵)은 입후보하지 못하게 막는 등 비리를 저질렀고, 1952년에는 '발췌 개헌'을 통해 재선했다. 이때 국회 선출 방식이었던 대통령 선거제를 직선제로 바꾼 것도, 민주주의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재선이 불투명하니 선택한 것이었다. 이 교수는 "한국의 첫 대통령 직선제는 '독재적 발상'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교회와 교단이 이승만을 지지했다. 이들의 논리는 "기독교 장로를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공공연하게 자신이 개신교인임을 드러냈으며,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할 때도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선서했다. 이에 많은 개신교인이 이승만의 부정에 가담했다고 이만열 교수는 말했다.

이 부분에서 이 교수는 최근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 건국 연도'를 짚고 넘어갔다. 그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1948년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으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기술된 역사 교과서가 있다. 대한민국은 국가가 아니라 정부 단체가 조직된 것처럼 의미를 축소하고, 북한은 국가 수립으로 건국의 의미를 크게 부여해 오히려 북한에 국가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왜곡 전달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했다.

"한마디로 북한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교육부에서도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으로 가르치라는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9년 건국은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1948년 헌법을 만들 때,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 대통령이 헌법 전문(前文)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여'라는 문장을 넣자고 강하게 주장했다.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한반도를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시기였다. 대한민국 땅에서는 정부를 세울 수 없었다. 한반도 밖에서 정부를 수립했다. 우리 땅이 아니니 정식 정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정부라고 한 것이다. 1948년,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 땅으로 돌아와 정식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연도는 1919년이다. 북한은 1948년에 건국했다고 한다. 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더 격이 높은 것 아닌가? 황교안 총리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갈라진 한국교회 보수와 진보

5·16 군사 쿠데타와 함께 시작된 군부는 민주주의의 역행과 인권유린을 가져왔다. 1960년대 한국의 개신교는 인권·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만열 교수는 "60~70년대 기독교는 민주화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가 살아 있었다"고 평가했다.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3월 2일부터 기독교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삼일운동 50주년 기념식을 열고 투쟁에 들어갔다. 8월 15일에는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장공 김재준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김재준 목사는 '전국의 신앙 동지 여러분'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해 박 정권의 3선 개헌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9월 4일, 김윤찬·박형룡·조용기·김준곤·김장환 목사 등 목회자 242명은 '개헌 문제와 양심 자유 선언'을 발표하며 공개적으로 3선 개헌을 지지했다. 이들은 김재준 목사의 호소문을 "순진하고 선량한 뭇 성도들의 양심에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때부터 한국 개신교는 사회참여 부분에서 확연히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고 이만열 교수는 설명했다. 물론 그전부터 보수와 진보 신학의 색채는 있었지만, 3선 개헌 문제로 보수와 진보는 정반대 편에 섰다.

유신 시대에는 보수와 진보 진영의 길이 더 확실하게 나뉘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등 진보 진영은 인권·민주화 운동과 사회참여에 헌신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을 비판하고 민주주의 회복과 언론 자유를 주장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되는 목사들이 속출했고 고문과 죽음이 이어졌다. 이만열 교수는 이 대목에서 듣는 이들을 좌우로 훑어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할 자유라도 얻은 것이다. 여러분은 역사에 무임승차하면 안 된다."

유신을 정면으로 겨냥한 진보적인 목사들과는 달리, 보수 개신교계는 '정교 유착'의 길을 걸었다. 1966년 2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가 '크리스천국회의원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이후 대통령조찬기도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기도회는 68년부터 74년까지 계속된다. 76년에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김준곤·한경직 목사 등 보수 개신교 목회자들은 대통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정권의 정책을 지지했다. 이는 신군부를 지나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만열 교수는 이 부분에서 '정교분리'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정교분리가 가능한가. 말로만 들으면 당연한 듯 들리지만, '정치'의 영역을 어디까지 정할 것인지에 따라 까다로운 문제가 된다.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보수 측에 있는 사람들이 정교분리를 주장한다. 정교분리가 타당한가 아닌가를 떠나, 중요한 건 이들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보수 개신교는 꼭 정치를 비판해야 할 시점에 정교분리를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 국가(대통령)조찬기도회에 가서는 지지·축복해 주고, 선거할 때는 박수쳐 준다. 나는 그동안 '비판할 용기가 없으면 지지도 하지 마라'고 얘기해 왔다."

'통일' 논의를 민중에게로

   
▲ 이만열 교수는 한국의 개신교가 어떻게 통일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1970~1980년대를 지나며 한국교회는 통일 운동에 눈떴다. 유신과 신군부 시대에 '인권'은 언제나 '국가의 안보'가 다음이었다. 위정자들의 논리는, 한반도가 휴전인 상태에서 과연 서구적인 인권을 말하는 게 타당한가라는 식이었다. 인권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고민했다. 안보의 원인은 분단에 있었다. 인권 운동은 분단의 해소, 통일 운동으로 번졌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통일'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시대였다. 통일은 남한과 북한 정권 차원의 어젠다였다. 일반 국민은 국가 안보 중심의 사회에서 감히 통일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에 불을 지핀 건 해외의 기독교였다. 미국의 교회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통일은 한국교회의 과제'라는 화두를 던졌다. 1984년 일본 도산소 회의와 1986·1988·1990년 세 번에 걸친 스위스 글리온 회의는, WCC가 주최해 남북한 기독교 대표들이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진보 개신교가 민족 통일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교회협이 1988년 2월 29일 연동교회에서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 선언'은 역사적으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고 이만열 교수는 설명했다. 이 선언에서 비로소 교회는 분단의 상황을 문제 삼지 않고 북한을 증오했던 것을 죄로 고백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나온 통일의 세 가지 원칙,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을 넘어, △인도주의 △민주주의 원칙을 추가했다. 이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 선언의 마중물이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북한의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때 남한의 교회는 북한 돕기 운동을 시작했다. 1992년 당시 교회협 총무였던 권호경 목사는 방북 중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한의 현실을 직접 듣게 된다. 권 목사는 남한으로 돌아와 보수 개신교계 인사들을 만나 북한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든다. 1993년 '남북나눔운동' 설립은, 1969년 이후 갈라진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 진영이 통일을 위해 손잡은 결과이자, 통일 운동을 한국교회 전체의 과제로 부각시킨 사건이었다.

이만열 교수는 통일 운동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공이 크다고 말했다.

"가장 큰 의의는 역시, 정권 차원에서 진행되던 통일에 대한 논의를, 통일을 누려야 할 민중에게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전에 '통일'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단어였지만, 90년대 이후 통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수십 개의 시민단체가 생겼다."

"북한의 교회가 가짜라고 얘기할 수 있나"

강의가 끝난 후에는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한 참석자는 북한의 교회에 대해 물었다. 북한 교회의 목회자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데, 과연 그들을 진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평양 봉수교회·칠골교회에서 북한의 목사들이 "예수의 부활은 없다"거나 "하나님은 김일성이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이렇게 질문했다. 그런 교회는 가짜이고, 지하 교회만이 진짜가 아니냐고 했다.

이만열 교수는 북한의 교회가 가짜라고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며 운을 뗐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등의 발언은 정통 신앙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잣대로 북한 교회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입장을 바꿔서, 그들이 남한의 교회가 가짜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어떨까. 몇몇 대형 교회 목사가 교회 돈 수백 억을 횡령하고,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고, (한국교회에서)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당신들의 교회는 가짜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진짜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은 먼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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