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방인성 목사(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실행위원장·희년함께 공동대표‧함께여는교회) 이름 뒤에는 항상 교회 개혁과 관련한 단어가 뒤따른다. 일찍이 한국교회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던 그는 투명한 재정 관리와 세습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도 관심이 많았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 현장에 나왔고, 용산 참사 당시에는 길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광화문광장에서 40일간 금식을 하기도 했다. 모두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방 목사는 서울구치소에 다녀왔다. 2008년 시위 당시 도로를 불법점거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50만 원만 내면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자진 노역을 선택했다. 자발적으로 구치소에 들어가면 하루당 벌금 10만 원이 차감된다. 방 목사의 이런 행동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외치는 소리를 억압하려는 정권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11월 8일 자진 노역을 택한 방 목사는 12일, 구치소에서 5일을 보내고 나왔다. 11월 17일 <뉴스앤조이> 사무실에서 방인성 목사를 만났다. 유치장은 많이 다녔지만 감옥에 갇힌 건 처음이었다는 그에게 구치소 안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 방인성 목사는 2008년 미국산 소고기 반대 시위에서 도로를 불법점거하고 교통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시위 참여자에게 무분별하게 벌금을 부과하는 정부의 방침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진 노역을 택했다. 1일에 10만 원씩, 구치소에서 5일을 채우고 나온 방 목사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방인성 목사는 서울 종로경찰서와 검찰을 거쳐 구치소로 들어갔다. 이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죄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다. 그는 경찰서, 검찰, 구치소를 지나면서 공권력을 이행하는 사람이 얼마만큼 비인간적이고 무례해질 수 있는지를 겪었다.

목사, 전과 1범이 되다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검찰청으로 향했습니다. 서울구치소로 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가족과 동료 목사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바로 아래층에 있는 유치장으로 이동할 때였는데요. 두 명의 경찰이 다가와 한 층을 이동하더라도 수갑을 차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수갑을 채운 걸로도 모자라 몸을 포박하기 위해 포승줄을 들고 왔더라고요. 아무리 반발을 해도 결국 하얀 포승줄로 결박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종로경찰서에서 구치소로 가기 전, 검찰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검찰 직원도 무례했습니다. 아침 10시에 도착했는데 오후 3시까지 방 안에 가둬 놓고 꼼짝 말고 앉아만 있으라고 하더군요. 기다리는 동안 너무 몸이 안 좋아져서(그는 신장 하나가 없다) '언제 구치소로 갈 수 있느냐'고 계속 물었지만, 대답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직업 때문인지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와도 그냥 무시하면서 이야기하더라고요.

열이 나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정신없던 찰나 한 중년 남성이 들어왔어요.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더군요.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치료조차 하지 않고 구치소로 데려가는 비인간성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는 저와 함께 수갑을 나눠 차고 구치소로 향했어요. 구치소 동기가 된 셈이죠."

구치소에 도착하자, 아직 끝나지 않은 행정절차가 방인성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이 과정을 거치면 그는 더는 '방인성 목사'로 불리지 않는다.

"'전과 1범'이 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벗어 버리고 구치소에서 주는 물건만 소지할 수 있습니다. 옷 한 벌, 플라스틱으로 만든 수저와 젓가락, 공기 세 개, 수건 한 장, 치약, 칫솔. 이게 제가 가질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피를 뽑고, 몸을 샅샅이 검사한 후에야 '821번 방인성 씨'라고 불리고 진정한 죄인이 되죠. 검사실에서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교도관이 지시하고 통제하는 방향으로만 걸어야 했습니다. 그제야 제가 죄인이 됐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더군요."

서울구치소에는 방 목사가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40일 동안 단식했다는 사실을 알고 말을 건 교도관도 있었다. 기독교인인 교도관은 재소자를 사랑으로 대하고 싶다는 고민을 방 목사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교도관 대부분은 앞서 만난 경찰, 검찰 직원처럼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했다. 범죄자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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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가 있는 1번 방, 무기징역수가 있는 2번 방을 지나 방 목사는 11번 방에 배정됐다. 그는 두 평 남짓한 방에서 생활했다. 방 한쪽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고 방 끝에는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싱크대가 있었다.

사회에서 무엇을 하고 왔든지 그곳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방을 쓰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비슷한 것도, 죄목이 유사한 것도 아니었다. 전혀 다른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우연찮게 한 방에 배정되었다. 때로는 수감자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교도소는 24시간 불을 켜 놓았다.

방인성 목사는 6명의 죄수와 함께 지냈다. 둘러앉으면 무릎과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방 목사는 죄수들이 자신을 편안하게 대했다고 했다.

"저랑 같이 있던 사람들은 제가 목사여서 그런지 꽤 인간적으로 대해 줬습니다. 경찰이나 검찰 직원에게 느꼈던 무례함을 범죄자들에게는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하루는 노숙자가 우리 방에 배정을 받았는데요. 이 사람이 씻고 들어왔는데도 냄새가 너무 나는 거예요. 악취가 몸에 배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그렇게 냄새가 나는데도 (같은 방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싫은 내색을 안 해요. 오히려 이 냄새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서로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그는 재소자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이 모르고 살았던 세계를 배웠다고 했다.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은 온갖 주제의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개중에는 딱한 사정으로 구치소에 온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몸이 좀 불편한 70대 노인이 있었는데요. 알고 보니 자기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하고 싸워서 들어왔어요. 목사를 물었대요. 그분 말로는 목사가 너무 교인들을 이용하는 게 보기 안좋아서 싸우다가 결국 그렇게 됐다더군요.

또 어떤 사람은 한두 번 구치소에 들어와 본 게 아니었어요. 이 사람은 또 무슨 사연이 있나 들어 봤는데 정말 딱했어요.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식물인간처럼 살게 된 거에요. 돈을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다 그 아이의 병원비로 들어가게 된 거죠. 우리나라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중증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것도 아니고… 늘어나는 병원비에 아이 간호까지 하느라 아내도 너무 힘들어했고, 결국 이혼을 했대요. 괴로우면 술 마시고, 술 취해서 싸우다가 폭행죄로 걸리고. 아이는 지금 부모님이 봐주신다고 해요.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분명히 있습니다."

방인성 목사는 목사가 아닌 죄인으로서 같은 방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시간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감옥에서는 하루 세 끼 방 안으로 식사를 배급했다. 국·밥·김치·반찬이 기본이었다.

"지난주 설교를 준비하며 본문으로 택한 말씀이 마태복음 9장이었어요. 교회에서 그 설교까지 하고 구치소에 갈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일정이 변경돼 퇴소 후에 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와 밥을 먹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어찌 죄인이랑 함께 식사할 수 있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장면이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데 이 말씀이 떠올라 기분이 묘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식탁은 권력자와 부자가 끼리끼리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잔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말씀이 떠오르더라고요. 죄인들끼리 먹는 식사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직접 죄인이 되어 보니 제가 이 사람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죄인으로서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경험을 하니까, '예수님이 죄인과 친구가 됐다는 의미가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수님은 일대일로 동등한 인격체의 입장에서, 사람대접을 해주신 것이죠. 세리를 부르는 장면은 예수님이 그를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 이웃을 사랑하자'고 설교 시간에 많이 이야기했죠. 하지만 정말 낮은 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식사를 나누고 살을 부대끼면서, 발 냄새를 맡으면서 이곳이 평화가 임하는 낮은 자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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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또 생겨도 같은 선택할 것

구치소에 있으면서 놀라웠던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같은 방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 번씩은 다 교회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안산의 한 대형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도 벌써 몇 번째 구치소 신세를 졌어요.

서울구치소에는 한 교회가 와서 인도하는 찬양 집회가 있었는데, 저도 참석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한 번 참석해 보니까 교회가 이 사람들, 죄지은 사람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갔을 때는 강남의 큰 교회에서 온 팀이 찬양하고 설교했는데요. 죄인이 된 입장에서 들어 보니까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당신이 어떤 실수를 했더라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실 것이다. 열 번 잘못하면 열 번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요. 듣는 사람이 왜 열 번이나 잘못을 저질러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방인성 목사는 경찰서부터 구치소에 들어가서까지 만났던, 직업인을 가장한 무례한 사람들이 한국교회 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했다. 권력·학벌·재력 등으로 완전히 계급화된 사회의 모습이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사회의 축소판인 한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봤다.

"사회는 저를 죄인으로 낙인찍어 구치소로 보냈지만, 안에 있으면서 저는 제가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 안에도 분명 말할 수 없는 흉악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니까요. 

사회는 둘째 치고 지금 속한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 약한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고 친구가 되려는 훈련이 한국교회에 필요합니다."

그는 앞으로도 구치소에 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주저하지 않고 갇힌 몸이 되겠다고 했다. 크거나 강력하지 않은 몸짓이지만 결과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구치소에 있을 때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저항의 의미로 구치소행을 택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요. 교도관들도 마찬가지였지요. '낙수 효과'라는 것이 있어요.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면 단단한 바위를 깹니다.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절단하는 것은 강력한 힘이 아닌 센 물살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께서도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셨는데, 구원이 온 세상에 이르렀잖아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무슨 의미가 있을까'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목사로서 가야 하는 길이니까 계속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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