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년 사이 '작은 교회 운동'이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단지 규모가 작은 게 아니라, 교회의 참모습을 구현하려 노력하는 교회들이 연대해 운동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뉴스앤조이>가 이런 작은 교회 운동을 취재했습니다. 각각의 교회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 목회자의 입장에서, 교인의 입장에서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가나안 성도의 입장에서 본 '작은 교회 박람회'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나는 '가나안 성도'다. 교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안 나가는 것도 아닌 조금 어정쩡한 상황에 있지만, 누가 "너 같은 사람을 가나안 성도라고 하는 거야"라고 하면 굳이 따져 가며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명색이 교계 기자가 가나안 성도라니…. 교회도 모르는 사람이 교회 기사를 쓴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가나안 성도가 된 것은 교회를 애정한 결과다. 다니던 교회를 떠나기까지 고뇌하고 마음 아파하며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뉴스앤조이> 기자가 되어 여러 교회와 교단을 취재하면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답을 찾은 건 아니다. 오답을 하나씩 지워 나가고, 대안을 조심스럽게 그리는 중이다.

이 글은 기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가나안 교인으로서, 지난 10월 9일 열린 생명평화마당의 '작은 교회 박람회'를 참관한 수기다. 작은 교회 박람회는 생명과 평화를 추구하는 작은 교회들의 연대의 장이기도 하지만, 기존 교회 생태계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는 곳이다. 본격적으로 작은 교회 박람회 현장을 기록하기 전에, 내가 왜 가나안 성도가 되었는지 얘기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왜 가나안이 되었나

▲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가나안 성도다.

내 나이 서른둘. 그중 스물아홉 해를 한 교회만 다녔다. 말 그대로 모교회다.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이신 권사이고, 어머니가 나를 잉태했을 때부터 나는 그 교회에 속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교회 가기를 즐거워했다. 중고등부는 물론 청년부에 올라가서도 임원·리더를 몇 번씩 했다. 성경 고사, 성경 퀴즈 대회 등등 교회 행사에도 꾸준히 나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 교인이 1,500명 이상 되는 교회였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모교회는 어느 동네나 하나씩 있는 평범한, 조금 큰 교회였다. 문제 있는 교회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교회는 지역에서 '말씀이 좋은 교회'로 유명했다.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며 27년간 교회를 담임했던 원로목사의 공이 컸다. 내가 교회를 떠나기 1년 전 청빙된 새 담임목사도 성품이 훌륭했다. 목회자가 헌금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인들이 직분에 목을 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교회를 떠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큰 배경이 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게 정말 예수가 만들려 했던 공동체인가.' 출석 인원 150명의 청년부. 관계는 나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우리를 '공동체'라 하기에는 뭔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가끔씩 수련회 가서 은혜받았을 때(?) 서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때조차도 정작 경제적인 문제나 민감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교회 안에서 나오는 '지체', '사랑'과 같은 단어들이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 하면 언젠가 유무상통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나와 정말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중에 몇 명이나 될까. 20명? 10명? 교회에 사람이 너무 많아 보였다. 하지만 보통의 교회에서 '전도'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왜 전도해야 하는지, 그렇게 모인 사람들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 한 가지는 교회의 모든 에너지가 결국 '교회 안'으로 귀결된다는 점이었다. 교회가 사회봉사와 선교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온통 '주일에 집중된' 교회의 모습이다. 교인들은 주일에 반드시 예배당에 모여야 하고 주일 예배를 위해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리더 그룹은 주일날 예배당에 오지 않거나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들을 예배당에 유치하려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계속 교회 안으로 몰았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교회에서 리더급으로 일하며 위와 같은 일에 헌신하는 삶이었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은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당 안에서 온몸과 마음을 쏟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면 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직장·학교에서는 교회에서만큼 열심히 살지 않았다. 자연히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때는 이명박 정부 말기, 얼마나 많은 일이 터졌고 얼마나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나. 부끄럽지만 잘 몰랐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시스템 속에서 그런 사이클을 돌며 살았다. 어느 순간 교회를 위한다는 노력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예수께서 세우려 하셨던 공동체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흔한 교회 용어로 '시험에 들었다'.

교회를 바꿔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뜻이 맞는 친구들을 모아 책도 읽고 학술 모임도 만들었다.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갔다. 난생 처음 교회 친구들과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건, 우리의 활동이 목회자와 장로들의 귀에 들어가기 전까지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리 모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의 사상을 의심·걱정했다. 이후 청년들의 모든 모임을 당회가 통제하려 했다. 나와 친구들이 즐겨 읽던 톰 라이트의 책은 금서(禁書)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교회의 방침에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교회를 빠지지 않았다. 비록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 같은 삶을 살 때에도 교회를 떠난 적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진짜 신앙을 찾기 위해 교회를 박차고 나왔다.

내 안에, 네 안에 있는 수동성

이제 3~4년이 지난 그 일은 모교회에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나를 비롯해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 열댓 명이 한꺼번에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에 젊은이들이 쑥 빠져 나간 것은 교회에도 상처였을 것이다. 뭔가 더 지혜로운 방법이 있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목회자들과 가족들, 다른 교회 친구들은 우리의 방황(?)을 걱정했다.

주변의 시선은 상관없었다. 우리 마음도 까맣게 탄 상태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유함을 얻었다. 이제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 가는 일만 남았다. 조금은 들뜬 상태로 '교회'를 시작했다. 장밋빛 길을 상상했만 실제는 가시밭길이었다.

교회를 만들어 가면서 느낀 건 20년 이상 철저하게 수동화한 우리의 신앙생활이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그동안 우리는 목회자가 떠 먹여 주는 것만 먹었고, 누군가 계속 그렇게 해 주기를 원했다. 교회는 왜 존재해야 하며 교회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좋은 설교를 듣고 싶다', '은혜롭게 찬양을 부르고 싶다', '새로운 성경 해석을 알고 싶다'는 바람만 내놓았다. 설교와 찬양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체험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서로 그런 불안함을 잘 들어 주고 그 심정을 이해하는 방법도 몰랐다.

고작 열댓 명 되는 모임이었지만 마음을 맞춰 가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하나씩 풀어 가는 것은 힘든 과정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와 함께하던 목회자의 도덕적 실추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2년 만에 해산하기로 합의했다. 기존 교회의 한계를 느끼고 모교회를 떠나 대안을 만들고자 했지만, 그 대안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만의 사역, 우리만의 신앙고백

▲ 작은 교회 박람회는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탈성장·탈성직·탈성별을 추구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생명평화마당의 '작은 교회 박람회'는 이런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취재했다. 이 땅에서 목회자·주일 중심의 기존 교회 생태계를 벗어난 교회들은 어떤 모습일까. 목회자들은, 그리고 교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떻게 그 생각들을 구체화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관련 기사: "작은 교회 운동, 시대 요청이자 부름")

박람회장은 활기찼다. 제각각 특성이 있는 교회들이 부스를 채웠다. 지역 주민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카페 등을 운영하는 교회, 교인들과 지역 주민을 위해 인문학 강좌를 여는 교회, 청년들의 주거·출산·육아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는 교회, 국가권력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교회, 목회자가 없는 평신도 교회 등등, 규모는 작지만 창의적인 모습의 교회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사역도 사역이지만,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것은 각 교회의 '신앙고백문'이었다. 참가한 교회 중에는 자신들만의 신앙고백을 글로 정리한 곳이 많았다. 글 자체가 수려했다기보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이 신앙고백문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은 공동체원이 함께 써 내려간 신앙의 고백이었다. 자신들이 이 교회 공동체(의 사역이나 예전 등)를 왜 하고 있는지,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교회들은 신자를 받을 때 반드시 교회의 신앙고백문을 가르친다고 한다.

사람의 얼굴처럼 각기 다른 신앙고백이었지만, 공통점은 이들이 추구하는 목적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 성장을 빙자한 '영혼 구원'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교회 안보다는 교회 밖, 주일보다는 평일 - 일상생활과 정치·경제 등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땅의 현장에서 작은 예수로 살 것을 선언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예배당에 많이 유치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웠다.

작은 교회들에서는 조금 느슨한, 유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교회는 애초에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다. 교회가 구제·전도·선교·주일학교·양육 등을 모두 다 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역량이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역은 대부분 교인들의 합의의 결과다. 지역사회의 필요에 따라 사역이 시작되다 보니 창의적이다. 교인들이 사역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헌신한다. 작은 덩치의 장점이었다.

작은 교회 박람회는 이런 교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었다. 서로 인사하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위로와 도전을 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교회에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아직 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통로였고, 나와 같은 가나안 성도에게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실제적인 대안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부스와 부스 사이가 좁고 너무 부산스런 분위기라, 진지하게 집중하며 대화할 수 없었다는 게 흠이기는 했다. 바깥에서 사물놀이나 음악회를 하는 경우에는, 큰소리로 얘기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존 한국교회 생태계를 벗어나

물론 작은 교회 박람회에 참여한 교회라고 해도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교인이 많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불협화음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좋은 취지만큼 사역이 빛을 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존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시도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의미 있어 보였다. 기성 교회의 위기는 목회자의 스캔들이나 어떤 엄청난 사건이 아니다. 세상을 변혁하는 참된 시민을 배출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목회자·주일·성장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교인들 스스로 주체적인 신앙을 가지고 예수께서 세우려 하셨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 이런 교회라면 나도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언젠가 이런 교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몇 년 사이 대형 교회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좋지 않은 현상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짜 교회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지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깊숙이 몸담고 있던 곳을 떠나면서 얻게 되는 통찰은 책이나 다른 사람의 조언에서 얻을 수 없는 값진 것이라고 본다. 다음 기사에서는 대형 교회를 떠나 작은 교회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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