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1.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목적이 무엇일까요? 여러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들이 반대와 집필 불참을 선언하고 있는데, 일부 보수 장로교단에서는 국정화에 찬성을 표명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간사한 마음이 듭니다. 내친김에 역사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구약 성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과거 말씀 속에 계신 죽은 신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살아 계십니다(히 13:8). 성경은 오늘의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한 가이드라인입니다. 과거의 죽은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산 역사 속에 계신, 죽은 신이 아니라 산 하나님의 말씀을 일깨우는 구원의 역사, 그것을 '구속사(救贖史)'라 부릅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구속사에는 전(全)인류를 향한 보편 법칙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을 때 그 자연(自然, 스스로 그렇게 됨)은 산천초목을 말하는 게 아니겠지요? 오로지 자연이라는 하나의 법칙 앞에 만인은 평등한 대접을 받고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인생(의식과 현실)은 이 법칙에 돌아가는 간이 정류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 인간을 향한 것일지라도 그 전체란 추상적 집단으로서 전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의식과 현실이라는 정류장를 통과한 전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놓여 있는 생활이나 현실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신적 택함(선택)과 버려짐(유기)의 교차점이겠지요? 곧 누군가 한 말처럼 "모든 생명은 공허에 불과할지라도 하나의 기적"입니다. 종교적 자각이란 자기 인생의 공허로부터 이 기적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개개 민족의 역사도 전체 인류를 향한 의미의 일부분으로, 개인보다는 좀 더 큰 공허와 기적의 정류장이 될 겁니다. 마침내 공허는 그 나온 본질의 공허로 돌아가고(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기적도 그 나온 기적으로("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전 12:7) 돌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지상(시공간)의 정류장이란 잠시 머무는 곳이지 영구히 거주할 곳이 아닙니다. 바벨탑에 매달릴 일이 아니겠지요? <성서>는 "인생은 가벼운 것이고 인간은 나그네와 같다"고 가르칩니다. 나그네에게는 나그네가 사는 방식이 있겠지요? 그러나 권력은 나그네를 붙잡아 바벨탑을 쌓게 합니다. 아브라함 일족(一族)은 그러한 권력자의 문명으로부터 광야로 부르심을 받은 나그네('히브리'의 의미는 유랑자)였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나그네 정신이 곧 기독교 정신입니다. 발이 땅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자자손손 지상에 건설할 제국이 아니라 돌아갈 본향을 생각합니다. 모든 폭력과 압제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합니다.

2.

<성서> 속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라 부릅니다. 그러나 현재 중동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같은 세속사와는 차원이 다른 역사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시겠지요? <성서>의 구속사는 일회적인 역사, 그리스도를 통하여 점진적 구속의 완결을 보여 준 '계시적 역사(특별 계시)'입니다. 이런 성서의 관점을 좀 더 심화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로 볼 수 있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그 시대의 실제 이스라엘 역사는 마찬가지로 세속사이기도 합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구속사에 들지 않은 우리의 역사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이 없었던 게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각되어 하나님을 알게 된 겁니다.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후일에 <뜻으로 본 한국 역사>로 고침)가 그런 역사 읽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구속사의 뜻을 착각하게 되면 그만 기독교가 삼천포로 빠지게 됩니다. '신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유대인) 자체를 신성시(신화화)하는 유대인 선민사상으로 변질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거기 빠져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알아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었고 오늘까지 그 상태입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무수히 들어 보셨을 테지만, '유대인의 자녀 교육'이라든가, '유대인의 성공 비법'이라든가, 유대인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신화가 교회 안에 공공연합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성서>에서 나왔겠지요? 그러나 성서적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이 타민족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본질은 못 보고 외피만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3-9)

자기 자신을 유대인 중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자칭했던 사도 바울은 전통적 유대주의를 허망한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것(딤전 1:4)이라 보았습니다. 이를 배설물 같이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자신들이 중세(中世)로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당해 온 온갖 폭력을 지금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똑같이 저지르고 있는 패권 국가 이스라엘을 성서상의 이스라엘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아직까지도 선택받은 민족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선민(選民)이 아닌 민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의 편애로 유별나게 탁월하게 태어나는 민족이 따로 있겠습니까? 탁월하다면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악한 짓마저도 탁월함의 증거가 되는 걸까요? 하긴 요즘 같으면 자기모순에 대한 뻔뻔함과 악행에 대한 담대함이 탁월함의 증거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탁월하고 뛰어난 민족만이 살아남고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도들이 과거에 그토록 반대하던 '사회적 다위니즘'이나 '정글의 법칙'에 불과할 겁니다. 아돌프 히틀러도 아리안족(族)의 우수성을 내세워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했었지요? 결국 선민주의는 각개 민족과 사회집단 내에서, 다시 혈연집단이나 출신지, 계층, 계급, 가문 등등의 하위로 뻗어 나가는 겁니다.

사극 '육룡(六龍)이 나르샤'가 유아인 덕에 저희 집에서 인기입니다. 육룡이 누구입니까?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를 비롯한 그의 조상 5대를 '해동육룡'이라고 치켜세운 겁니다. 그러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본래 고려를 배반한 원나라 군인이었고 이성계 자신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가계는 사실 근본이 여진인지 고려인지도 알 수 없는 변방 호족이었습니다. 덕분에 '용비어천가'란 지금까지 아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후손이 출세하면 조상을 붓으로 키운다"는 말처럼 거짓으로라도 과거를 비범하게 미화하고 싶은 거겠지요? 가짜일지라도 불멸의 이름을 꾸며서 갖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남의 논의 물을 끌어들이듯 역사의 본줄기에 슬쩍 자기 가계를 끌어다 붙이는 도둑질입니다. 북한의 김일성 왕가에서 보듯 이런 패착에 희망은 없습니다. 독재가 독재자에게, 이단이 교주에게 집중되듯 역사의 패착에서는 종교와 하나님마저, 가정 제사에 봉사하는 가족 신이나 부족 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3.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 개체는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자의식은 자각되지 않은 것, 아직 전체의 의식에 일치되지 않은 겁니다. 그것을 일치하게 하는 동력은 개인의 자의식에 속하지 않은 겁니다. 따라서 자기밖에 모르는 단순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전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곧 역사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고, 오히려 전체 집단의 반대편인 셈입니다. 계속 그대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할 수 없는 자연(自然)의 심판(보상)에 의해 끊임없는 자기 수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전체와의 접촉에 의한 끝없는 자기 수정에 의해, 보상과 심판에 의해 사람은 관계 속에서 계속 반대편이 되든 일치해 나가든 전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깨우치는 것, '자각'이야말로 택함과 버려짐의 중대한 기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이든 전체이든, 이런 자의식에 대한 자연(自然), 곧 심판과 보상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하자면 숨겨져 있는 본질적인 목적입니다. 곧 모든 육체(肉體)에 숨겨져 있는 것,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의식적 자각입니다. 자각을 통해 개인의 의식은 자연이라는 의지와 통일과 통합, 화해와 동화를 목표로 성숙해집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9-10)

자연이란 결국 하나 되게 하는 것이고, 모든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 되는 것 속에 수렴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은 이런 통일 속에서 심판(소멸)받아 그 적절한 보상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보면 살아 있는 성인으로 추앙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자 곧바로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신부들은 서둘러 교회의 모든 문들을 닫아겁니다. 그를 추앙하던 민중들이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경외감이 사라질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우습지만 상징적이지요? 이는 그리스도의 몸처럼 성스러운 것은 썩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인데, 작가는 여기서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것의 착각과 진정 성스러운 게 무엇일지 반성하게 해 줍니다. 언제나 그런 착각이 있겠지요? 설령 조시마 장로같이 존경받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죽음과 동시에 냄새를 피우며 그 육체가 썩는 겁니다. 그의 인격의 훌륭함이 거룩한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신성함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아닌 것들은 전부 다 그 신성의 세계로 흡수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들은 이 본질적 신성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끝없는 '신화 만들기'와 '영웅 만들기'에 몰두할까요? 향을 피우고 안 보이게 가려서 거짓 신성을 꾸미려 할까요? 왜 떳떳치 못한 과거를 지닌 아버지를 치장하고 역사에까지 새마을 사업을 하려 할까요?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행적을 남긴 선조를 둔 권력자들만의 행사가 아닙니다. 그런 것을 긍정이라고 하고, 이를 올바른 생의 방식이라 주장하고 있는 우리 시대 교회의 보편적인 설교들도 거기서 멀지 않습니다. "염불에는 맘이 없고 젯밥에만 맘이 있다"는 말처럼 본질에는 둔감하고 거기 반(反)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몰두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이 또한 인간 의식의 한 조건일 텐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본질을 전체에게 빨리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모든 국민이 즉각적으로 자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전체 기독교도들에게 성령께서 단번에 일깨워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법칙을 인간의 의식적 기대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알려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연(自然)입니다. 숨겨진 상태로, 부단히, 조건 없이, 공짜로 알려집니다. 이해를 하든 말든 상관치 않습니다. 아니지요. 이해하기를 바라시면서 부단히 알려주시는 것인데, 그 방식조차 자연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본래 그러할 뿐이고 거기에는 반드시 '신적 정의(하나님의 선하심)'라는 심판과 보상의 본질적 의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누군가 이러한 하나님의 현존하는 말씀 곧 심판과 보상의 진리를 가르치고 일깨워 주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좋을까요? 종교가 아니라면, 교회가 아니라면, 성도가 아니라면 누가 하나님을 대신해 이 숨은 말씀을 삶으로 번역해 들려줄까요. 교회에서는 누가 할까요? 오늘날 긍정과 욕망과 돈의 신전인 대형교회들이 그렇게 할까요? 주일마다 그 욕망의 대열에 자리를 채워 주는 무자각한 성도들이 할까요? 그들의 신학을 이루는 물적 토대가 그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엑소더스(Exodus)', 탈출에 성공한 나그네만이 이집트에서 자기가 누구였는지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아무도 없는 게 광야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4.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출 12:29-30)

모세와 출애굽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관통하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겁니다. 첫째, 하나님은 왜 이집트인들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행동하셨는가? 택한 민족을 위해 버린(?) 민족을 가차 없이 살육하는 하나님을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둘째,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혹은 십계명을 받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고 출애굽 1세대가 다 죽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는 이야기들은 사실인가. 셋째, 이 모든 기록(!)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전(全)인류적 구속에 있어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인가?

왜 이 세 가지를 질문하는가 하면, 지금까지 들어온 모세 이야기의 해설(설교 혹은 예술작품들)에 대개 이 세 질문의 대답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고, 영화를 보고 나도 출애굽의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의 뜻이 속 시원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결국 모세라는 개인의 스펙터클한 영웅 이야기나, 유대인의 해방을 위해 이집트인에게 격렬한 복수를 퍼붓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데 그칩니다. 원리주의적이고 정복주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원리주의와 정복주의가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전인류적 '사랑'과 모순된다는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부족 신으로, <구약성경>이 누군가의 비아냥거림처럼 '이스라엘 삼국지' 쯤으로 제한된다는 겁니다. 이런 제한은 하나님이나 <성경>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취약함으로 나타나겠지요? 즉 구속사가 인류 공통의 보편적 원리인 사랑의 말씀으로 전파되는 게 아니라 편파적 말씀, 또 하나의 폭력적 언어로 전파되는 겁니다. 실제로 주변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그렇다고 모순을 인식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사랑을 받고, 안 믿으면 저주를 받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이집트인들에게 혹독하게 하셨을까요? 열 가지 재앙은 진짜로 일어난 사건일까요? 가장 최근에 개봉된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Exodus: Gods and Kings)>(2014)를 보면 10대 재앙에 대한 이집트 관료의 브리핑 장면이 나옵니다. 흡사 오늘날 무능력한 정부가 대국민 발표를 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관료의 말에 따르면, 이 재앙들이 특별히 모세나 그의 신에 의해 기획된 재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일 강에 진흙이 쌓여 수위가 얕아지고, 활동 무대가 좁아진 악어들이 어부들을 죽였고, 피에 도취한 악어들이 서로를 물어뜯어 강을 피로 물들였고, 썩고 악취가 나는 물에서 물고기가 떼죽음했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물에 사는 개구리들이 살기 위해 물 밖으로 뛰쳐나왔고, 개구리가 죽으니까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우박은? 그것은 나일 강의 진흙이 기상적 조건의 이상을 불러… 이것은 당시 관료의 해명이기도 하지만 출애굽기에 대한 창조과학적 해명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묻습니다. "그러면 파리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관료가 대답합니다. "음… 파리가 죽겠죠?"

<성서>은 비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설명이 곤란한 난제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진 않지만, 창조과학은 이런 것을 좀 더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노력일 겁니다. 가령 아홉 가지 재앙을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연쇄적인 문제라 설명한다고 해도 마지막 재앙, 곧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첫 태생(아들)들의 선별적 떼죽음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집니다. 종교인이 되려면 확실한 종교인이 되어야 할 겁니다. 우리도 우리의 의구심에 대해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지요? 그래도 상관없는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곤란한 고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둘 중 하나겠지요? 그들이 다 거짓말쟁이들이었거나, 문자 그대로 진짜로 벌어진 일이었거나. 그러나 한 가지 가능성이 더 남아있습니다. 이 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과학으로, 문학으로, 신화로. 또 우리가 배워온 바 일점일획의 가감도 용납되지 않고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그렇게 믿을 수 있나 없나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조건 믿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이고 역사입니다. 그것도 특별한 이야기이고 특별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그 특별함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곧 영적인(본질을 꿰뚫는) 상상력과 이해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순 없이 정말로 문자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다분히 주관적 입장에서 읽으면 이스라엘에게는 통쾌할 것이고 이집트에게는 화가 날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이 있지만 이집트인도 있고 팔레스타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서를 어떻게 읽을까요? 그들에게는 어떻게 전파할까요? 그러나 이집트에는 일찍이 콥트교회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이자, 테러 단체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파타(Fatah)의 지도자였던 그 유명한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의 아내도 기독교인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성서>는 과연 분쟁의 소지를 남겨 주는 것일까요? 하나님 말씀은 인류를 분열하는 걸까요?

열 가지 재앙은 전체적 입장, 즉 붙들려 압제받는 히브리 곧 나그네 집단과 지상 문명의 건설자요 제국의 통치자로 반(反)하나님적인 가문과 가계와 민족의 영구 통치를 꾀하는 왕들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집트와 유대인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열 번의 재앙을 감수하는 파라오의 모습은 끝까지 자신의 탐심과 폭력성에 그 공허를 인정치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 세계의 정치가나 권력자들의 오만으로 바뀌어 보일 겁니다. 열 가지 재앙의 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상의 권력자가 언제까지 버팁니까? 자기 아들이 죽기까지입니다. 왜 자기가 아니고 아들이 죽어야 끝날까요? 자신의 존재적 공허를 무력한 자들에 대한 폭력으로 치장하려는 불멸의 탐욕도 계승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 홍해가 갈라졌다고 믿어야만 하는지, 이집트 군대가 다 홍해에 수장되었다고 믿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건 이미 믿고 안 믿고 따위의 문제가 아니지요? 의식의 혁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문에 '홍해(紅海)'가 아닌 '갈대바다'라고 되어 있다고 변명을 합니다. 갈대바다라 한들 바다가 아니고 갈대가 날 정도로 얕은 물이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 앝은 물에 빠져 죽은 군대는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스스로 죽은 것이 됩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특별 계시로, 구속사의 숨겨진 심판과 보상의 원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조건 믿으라거나, 믿는다거나, 자기가 다 믿을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하는 것은 정말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믿고 싶으면 믿으라지요. 믿을 수 있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

5.

이해가 없이는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도 과녁을 벗어난 화살이 됩니다. 누군가에 의해 이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4-15)

그러나 돕는 자가 없이 어찌 전파할까요? 저 같은 광야의 목사들에게 힘을 보태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성입니다. 이 지성이 없을 때는 어떻게 될까요? 모세의 재앙이 반복됩니다. 가짜 신상과 가짜 역사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해 억울한 자들을 압제하며 대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권력자는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파라오는 끝까지 죽지 않습니다. 람세스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죽었나요? 누가 희생되었나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세월호를 보십시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심판(보상)에는 자각이 따라야 합니다. 자각이 따라야 보상은 심판이 아닌 구원이 됩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낙심했을지라도 자각에 따르는 보상이라면 결국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대형 교회라 불리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고합니다. 깨어나십시오. 정신을 차리십시오. 거대한 예배당과 웅장한 코러스가 여러분의 믿음을 보증해 주는 게 아닙니다. 그것들은 속이는 도구요 가짜 역사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신학이 어떤 것일지 가늠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었을까요? 왜 예언자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오는 걸까요? 여러분 개개인의 삶의 고민은 무엇입니까? 이제부터는 교회를 만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러 광야로 나가십시오. 광야가 어디입니까? 세상과 문명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자연이자 광야입니다. 종교의 핵심은 자신 안에서 자연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계신 거기서는 떨기나무의 불타오르는 말씀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믿을 수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말장난에 속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을 무턱대고 믿는 게 아니라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겁니다. 보고도 못 보았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권력의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가짜 역사를 꿰뚫어 보고 인간 심혼(心魂)의 광야로부터 오는 구속의 역사를 통찰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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