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의 한계를 토로한 양승훈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에 이어 최근에는 우종학 교수(서울대 물리천문학)가 공개적으로 빅뱅설, 진화론 등 과학적 성과를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양승훈 교수는 기독학술동역회 출신으로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을 만들 정도로 창조과학에 헌신했던 인물입니다. 다중격변설이라던지 새로운 이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 진화학계와 대립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랬던 양 교수가 10여년 만에 자신이 추구한 연구의 한계, 창조과학계의 문제점(전문가의 부재, 구호성 종교 운동)을 솔직히 토로했습니다.

우종학 교수는 더 적극적입니다. 우종학 교수는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IVP)를 출간하고 강연회·페이스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과학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인식 대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모두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크리스천이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두 분의 이야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이를 통해 한국 교회에 의미 있는 변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상황은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양승훈 교수는 본인이 주도해서 만들었던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우종학 교수는 학문적 비판이나 진지한 학술 토론이 아닌 동어반복적이며 수준 낮은 이론적 비판에 시달리고, 가히 인신공격 수준의 비난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창조과학에 한계 느끼며 '지적설계론' 대두…창조와 진화 문제 간단치 않아

저는 과학자는 아닌 관계로 이 문제에 대한 깊숙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관심으로 진화와 창조 문제에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20년 전부터 창조과학회가 번역한 수많은 책들을 읽어 보았고 최근에도 꾸준히 관련 이슈들을 책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전문 과학인이 아니더라도 '창조와 진화', '과학과 종교'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는 책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창조과학의 한계를 느끼며 '지적설계론'이 대두가 되었습니다. 해당 분야의 중요 저작은 이미 국내에 번역돼 있습니다. <지적설계>(윌리엄 뎀스키, IVP), <심판대의 다윈>(필립 E 존슨, 까치) 등은 지적설계론의 대표 저작입니다. 이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뎀스키의 현란한 수학적 변증이나 존슨의 화석학에 대한 치밀한 비판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근대과학을 '프리 모더니티'적 사고로 극복하려는 뎀스키와 법학 교수로서 치밀한 논리적 체계화를 통해 진화론의 허와 실을 분석한 존슨의 주장을 어느 정도는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창조과학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날짜를 역산해서 지구의 역사가 5천년 정도이며, 하나님의 창조도 단 6일 만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과학적 무리를 범합니다. 반면 지적설계론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즉 자연계를 탐구하다 보면 신의 설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자연과학적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연구입니다.

이에 대한 일반 과학계의 반론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리처드 도킨스 외, 바다)에 나와 있습니다. <신의 언어>(프랜시스 S. 콜린스, 김영사)라는 책도 볼만합니다. 콜린스는 분자생물학자이자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를 주도했던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입니다. 그는 분자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진화의 과정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물리학적 설계를 통해 느낄 수밖에 없는 유신론적 증명, C. S. 루이스가 주창했던 도덕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을 수용하며 기독교 신앙과 과학이 공존한다는 점에 대해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합니다.

신학자들이 쓴 책으로는 <자연신학>(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한국신학연구소)나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한스 큉, 분도출판사)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성령 장'을 주장하며 영적 세계의 과학적 사고를 시도했으며,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명성은 신학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을 격렬히 비판한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저작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세계적인 신학자가 된 인물입니다. 그의 책 <과학신학>·<정교하게 조율된 우주>(Ivp)를 읽어 보면 많은 성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게나마 이렇게 여러 책을 나열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과학과 종교의 문제, 진화나 빅뱅 그리고 창조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극 드라마 한 편을 보고 역사에 대해 쉽게 말한다면 누가 인정해 줄까요. 과학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쉽사리 경계하고 비판하는 것은 졸렬한 태도입니다.

젊은지구론은 일반 학문 상식으로 봐도 말이 안 돼

'젊은지구론'은 과학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신학적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하겠습니다. 우선 일반 학문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구석기·신석기시대는 어찌할 것입니까? 아무리 탄소측정법이 문제라고 해도(실제로 문제인데도 95% 이상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문명의 발전 속도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가 돌을 사용해서 생존을 도모하고, 다시 농경을 발명하고 거기에서 다시 금속을 추출해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시간 말입니다. 통상 구석기 시대를 70만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는 1만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요. 청동기 시대는 (만주·한반도의 경우) 기원전 1,500년경입니다. 공룡 화석이 문제가 아니라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빗살무늬 토기 등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은 언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까?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평가받는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문명은 통상 기원전 3,5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5,5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6일 만에 창조하고 바로 문명이 시작됐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피라미드나 도시국가의 유적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요? 단순한 집 하나를 제작해도 주춧돌과 기둥, 사각형에 대한 관념, 주거 공간과 저장 공간의 분리, 배산임수 구조 등 많은 것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신석기인의 움집에서 청동기시대의 다양한 집터로 오는 데까지 1만년 정도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결코 간과할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메소포타미아문명이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고는 하나 이집트문명 역시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문명의 수준과 상관없이 이미 기원전 3,500~2,000년경에는 지구 곳곳에 군집 집단들의 흔적이 보이고, 그들만의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인더스문명과 황하문명도 등장하고요. 성경에 나온 내용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죠.

둘째, 성경은 역사적 문헌입니다. 역사적 문헌이라는 것이 너무 구체적으로 증명됐습니다. 우선 창세기 원역사로 분류되는 1장에서 10장까지 구조는 독자성과 독특함을 갖고 있는데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유사한 점도 많습니다.

그 이전에 종교학자 마르치아 엘리아데가 지적하듯 창조, 타락, 제의, 갱신, 심판 등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주제들이 사실 창세기만의 독자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수준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요소들이라는 거죠.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어마어마한 실증적 증거를 바탕으로 그의 저서 <신의 가면>(서양신화·동양신화)(까치)에서 이를 구체화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소'(쉽게 말해, 세계 신화의 공통점을 요소화하는 것)라는 개념을 통해 '신화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종교학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엘리아데도 <신화와 현실>·<종교 형태론>(한길사), <성과 속>(학민사) 등에서 여러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분류하고 설명했고요.

'함무라비법전'이나 '길가메시서사시'에 나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합니다. 모세 율법의 기초 원칙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이미 함무라비법전에서 제시한 보복 원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사실 보복주의는 고대 근동 사회의 일반적인 요소입니다. 고대 인류 전체의 보편적 태도이기도 하구요. 예전에는 함무라비법전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이라고 했지만 '우르 남무 법전'의 발견 등으로 성문법의 연대가 올라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아시리아 왕궁도서관에서 발굴한 길가메시서사시의 내용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거의 동일한 이야기가 써있고, 성경이 형성되는 시기가 훨씬 후대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화학, 고고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 분과는 과학 못지않게 발달했습니다. 그들의 연구 성과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학문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젊은지구론이 기독교 신앙의 보루라고 생각하는 창조과학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이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 지성의 문제입니다.

의심은 믿음으로 이끄는 안내자, "믿다가 의심하고, 의심하며 믿는 것"

그러면 신앙을 포기하자는 말이냐? 단연코 아닙니다. 이쯤하면 사람들 반응이 예상됩니다. 아마 양승훈 교수도, 우종학 교수도 바로 이 지점에 직면해 있을 테니까요. 두려움입니다. 그간 우리 기독교 신앙은 지성의 도움, 인문학적 사고의 도움 없이 상당한 맹목성을 강요받으며 성장해 왔습니다. 복음의 신비는 믿음의 영역이다. 지식이 많으면 번뇌가 크다. 그간 믿어야만 옳은 것이고 의심은 죄라고 규정했으니까요.

더 이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믿음의 영역은 믿음의 영역, 지식의 영역은 지식의 영역, 교회 생활은 교회 생활, 사회생활은 사회생활. 이렇게 나누는 것은 정말 나쁜 태도입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면 그 진리가 현대사회의 학문적 도전이나 인류 문명의 진보 가운데 여전히 유효한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심은 믿음으로 이끄는 안내자입니다. 고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처럼 "믿다가 의심하고, 의심하며 믿는 것"입니다.

일반 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에 문제가 된다?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역사적 문헌이라는 것은 그만큼 성경이 오랜 역사적 상황에서 단련된 문서라는 뜻이고, 다양한 역사 공간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신화적 사고를 했다면 그 신화적 사고라는 것이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일반 상황, 그리고 가장 원형적이고 근본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본질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겠죠.

창세기가 그저 그렇게 신화적 사고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신화적 사고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창세기의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본질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이 성경에 담겨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일반적이면서도 독창적이고 독특한 것입니다. 그만큼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원칙이 모세의 율법에 들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세는 보복의 원칙을 답습하기보다 율법 사회와 유대 공동체를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정 국가가 대세일 때도 사무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공동체는 왕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가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했고, 왕정 국가가 됐을 때 예상되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길가메시서사시는 근본적으로 현세 지향적입니다. 결국 삶은 허탈하기 때문에 누릴 만큼 누리고 떠나는 게 답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서사시의 결론입니다. 이런 태도는 전도서를 비롯한 구약의 시가 문학에도 상당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현세적인 삶의 가치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으로 재해석한 것이 구약의 입장입니다.

인간 일반의 현상이 담겨져 있고, 그것에 대한 판단이 담겨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또한 성경 이전에 성경이 만들어지는 바탕이 되는 신앙과 공동체와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학문을 통해 이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과 배척이 되는 것일까요? 오히려 일반 학문의 연구 성과가 하나님의 계시와 기독교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요. 바울이 그리스인을 상대할 때 '당신들이 기다렸던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종학 교수의 여러 주장에 대해 제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고, 또한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갔을 때 찬반이 갈릴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지금 이런 논쟁과 분위기가 결코 신앙 대 비신앙, 복음 대 비복음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지와 맹목, 관습과 관행에 근거한 신앙과 그것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에서 발생하는 긴장입니다.

어디로 나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 그리고 복음이 진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이 믿음이 충분히 수많은 학문적 연구와 세속적 현실 가운데 증명되고 입증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정당한 과정이 아닐까요? 오히려 한국교회에서 우종학 교수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물적 투자까지 하면서 지원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저는 우종학 교수를 적극 지지합니다.

심용환 / '깊은계단&5분인문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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