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교회에는 목사가 있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교회 분쟁의 중심에는 목사가 자리 잡고 있다. 목사가 모든 분쟁의 원인 제공자라는 말은 아니다. 목사가 가만히 있거나, 개혁적인데도 교인이 부당한 요구나 문제를 제기하여 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위의 말은 목사가 분쟁의 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목사가 문제든 교인이 문제든 교회 분쟁의 대부분은 목사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물론 목사와 무관한 분쟁도 많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거나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쟁을 '교회 분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냥 인간사 갈등의 한 단면으로 취급할 뿐이다. 교회 내 분쟁이 심각하다고들 한다. 이는 곧 교회 내에서 목사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다는 것이다.

목사가 분쟁의 축이라고 할 때, 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임기제를 채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임제를 채택하는 것이다. 물론 둘 다를 채택할 수도 있다. 어느 단체나 대표자가 분쟁의 축인 경우가 많다. 동창회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정치는 또 어떤가. 결국 대통령을 둘러싼 갈등의 전개 과정이 곧 정치 아닌가? 그래서 동창회의 회장, 기업의 대표이사, 대통령 모두 임기가 있다. 동창회 회장의 경우에는 채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기업의 대표이사와 대통령의 경우에는 불신임제가 채택되어 있다.

즉,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대표이사와 대통령이라고 해도 기업과 국가는 일정한 절차와 사유하에 이들을 불신임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탄핵당했고, 매일매일 수많은 기업의 대표이사가 그런 식으로 해임당하고 있다. 대표자인데도 임기가 없고 탄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왕과 교황이다. 결국 근대화한 모든 단체는 대표자에 대해 임기제나 불신임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해 임기나 불신임을 논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간혹 목사를 제사장에 비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역할과 지위를 존중해서 그러는 것이다.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단 대부분은 '위임목사'에 대한 임기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목사나 임시목사에 대해서만 임기를 인정한다. 불신임제도 제한적으로만 채택하고 있다. 즉, 교인들이 노회에 목사의 사임을 건의하는 '권고 사임' 혹은 '권고 사면'까지만 인정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교단은 헌법 시행 규정에 대놓고 목사를 "신임투표로 사임시킬 수 없다"고 규정한다(제26조 제7항). '위임목사'는 임기도 없고 불신임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위임목사'가 왕과 교황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지 묻게 된다. 그러나 그 대답은 자명하다.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다. 상식적으로도 그렇고, 신앙적으로도 그렇다. 교회법에는 목사에 대한 권징 절차와 위에서 살펴본 '권고 사임'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교회법적으로도 목사가 통제 불가능한 지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정도만 문제가 될 뿐이다. 목사는 교회 내에서 교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로 통제되어야 하는가? 다른 단체의 대표들처럼 임기를 설정하거나 신임 여부를 물을 수 없는 것인가?

최근 전국 여러 법원에서 잇따라 목사에 대한 불신임 절차가 가능하다는 취지의 판결이나 결정을 내놓고 있다. 부산의 A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와 경주의 B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의 교인들은 담임목사(위임목사)와 갈등을 빚던 중(두 교회 모두 예배를 따로 드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목사를 불신임하기 위해 공동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공동의회는 당회장이 소집해야 하는데 목사님이 당회장이어서 공동의회를 소집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위 두 교회는 민법상의 임시총회 소집 허가 절차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 절차는 원래 사단법인의 이사가 임시총회를 소집하지 않을 경우 그 구성원의 5분의 1 이상이 목적 사항을 제시해 이사에게 임시총회를 소집할 것을 청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사가 2주 내에 그 절차를 밟지 않을 때, 법원에 그 소집 허가를 신청하는 것이다(민법 제70조 제2항, 제3항).

이 절차는 비법인사단에 해당하는 교회도 활용할 수 있다. 교회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단 헌법에 교인의 3분의 1 이상이 공동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신청 요건은 교인의 3분의 1 이상이다. 즉, 교인의 3분의 1 이상이 당회장인 목사에게 공동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는데도 목사가 2주 내에 그에 응하지 않으면 교인들은 법원에 '공동의회 소집 허가 신청'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위 두 교회가 이런 신청을 하자, 목사 측은 공히 우리 교단 헌법상 목사 불신임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위와 같은 공동의회 소집 허가 신청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법원은 위임목사의 해임을 위한 안건이 공동의회의 의결 사항에 해당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목사의 해임을 회의 목적 사항으로 하는 공동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결정을 했다(부산지방법원 2015. 9. 3. 자 2015비합41 결정,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 2015. 9. 21. 자 2015비합3000 결정). 그중 예장통합 교단에 속한 교회에 대해 법원이 내린 결정의 주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이 사건 교회와 같은 지교회는 교단과 분리된 별도의 비법인사단에 해당하고, 비법인사단은 관련 법령 또는 규약에 따라 대표자의 선임 및 해임을 할 수 있다. △특히 이 사건 교회와 같은 지교회는 지교회의 독립성이나 종교적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교단 헌법에 구속된다(대법원 2006. 4. 20. 선고 2004다37775 전원 합의체 판결 등 참조). 비법인사단의 대표자인 목사의 청빙 내지 불신임에 관한 사항은 교회의 독립성 및 종교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목사를 신임투표로 사임시킬 수 없다는 이 사건 헌법 시행 규정 제26조 제4항은 사건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비법인사단의 대표자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그 대표자와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 관계가 파탄에까지 이르고 있다면, 그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비법인사단 총회인 공동의회의 소집을 허가해 충분한 논의를 통하여 해결 방법 등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비법인사단의 성격에 부합한다. 이처럼 법원은 교단 헌법에 목사 불신임 제도가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나아가 그것을 금하는 취지의 규정이 있다고 해도 교회 내에서 교인들이 목사 불신임 안건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성남의 다른 한 교회. 이 교회도 예장통합 교단에 속해 있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작년에 위와 같은 '임시 공동의회 소집 허가 신청' 절차를 통해(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14. 10. 27. 자 2014비합40) 임시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위임목사인 담임목사를 불신임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교회를 상대로 '공동의회 결의 무효 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자신을 불신임한 공동의회에서의 결의가 무효라는 것이다. 그 논거는 위와 같았다. 즉, 우리 교단 헌법상 목사를 불신임하는 제도는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비법인사단인 피고 교회는 사원총회에 해당하는 공동의회의 결의로서 그 대표자인 위임목사를 해임할 수 있고, 이 사건 헌법 정치편 제28조 제2항이 이 사건 교단 소속 교회의 목사는 당회의 결의와 교회 공동의회의 출석 회원 3분의 2 이상의 청빙 찬성투표를 받아 취임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비록 교회 구성원의 결의로써 위임목사를 불신임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근거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목사의 청빙을 결의한 교회의 공동의회는 당초 이루어진 목사 청빙 결의를 철회하는 불신임 결의를 할 수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15. 9. 21. 선고 2015가합966 판결)

수원지방법원 역시 명시적으로 목사에 대한 불신임 결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위 판결과 결정이 우리 교회와 교단에 던지는 메시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교회 내 분쟁은 심각한 수준이고 그 대부분이 목사와 관련한 것이다. 문제를 교회 내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립하는지가 결정된다. 교회에서 생긴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려면 대표자의 갱신 절차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대표자에 대한 임기를 설정하든지 대표자를 불신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갈등의 끝에서는 이 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목사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다. 목사를 불신임하려면 출석 교인의 2/3의 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이런 제도를 마련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한번 위임목사가 되면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그 지위가 무조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어느 단체의 대표가 그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 대표자에게 막강한 권한과 권위를 누리게 하면서도 그 지위를 정년까지 보장하고 있는 단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교단은 권징 절차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는데, 교단이 주관하는 사법 제도인 권징 절차와 교인들이 주도하는 민주적 제도인 불신임 절차는 엄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교단이 목사에 대해 행하는 권징을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시행한다고 믿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근로자의 경우 고용을 보장하는 정규직이 올바른 대안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종속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그러나 대표이사는 결코 정규직이 될 수 없다. 대표자는 책임지는 사람이지 안정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책임을 묻는 방식이 거칠고 인과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걸 감내하는 것이 대표의 숙명이다.

목사가 지금처럼 위임목사의 지위만 내세운다면 곧 '철밥통'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마땅히 '순례자'로 불려야 한다. '부르심을 입은 자'와 철밥통은 어울리지 않는다. 본토 아비 집을 언제든 떠나는 것이 목사의 자세여야 한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움막 셋을 짓고 여기에 머물겠다고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곳이 교회라 해도 말이다. 그런 식으로 순례를 해서 얻는 대가가 이 땅에서는 사회적 존경이고 나중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교회에서 자주 고백하는 대로 하면, 위 판결은 하나님께서 법원을 이용해 목사를 선교 현장으로 내모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 갱신의 불 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법원의 입장은 이제 확고해졌다. 전국 각지의 법원에서 동일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위임목사의 지위만 내세운다면, 아, 정말 답이 없게 된다. 조금 더 시련이 필요한 것으로 믿는 수밖에는.

강문대 / 변호사, 강문대법률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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