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아무개 목사는 쿰란출판사에서 네 권의 책을 냈다. 그런데 이 책의 원고는 20년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스승 황 아무개 목사의 설교 노트와 칼럼이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2014년 8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신 아무개 목사는 책 몇 권을 발간했다. 본인의 저서는 아니고, 그가 30여 년 전 모시던 고 황 아무개 목사의 유고(遺稿)를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1989년 49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 자기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없는 황 목사를 위해서였다.

청년 시절, 교회 사무간사로 있으면서 황 목사를 모셨다는 그는 황 목사가 생전에 쓴 설교문과 <월간목회>에 기고한 글, 그리고 '목사횃불회'에서 강의한 것을 녹음해 놓은 테이프 등을 모았다. 정식으로 출판 계약을 맺을 여력이 되지 않아 소량만 제본 형태로 제작했다. 황 목사의 <마태복음 강해 1~3>, <영성신학 강의 1~2> 등 5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설교 노트 빌려가 책 출판…"서문에 이름 쓰면 될 줄 알았다"

책을 낸 지 한 달도 안 된 어느 날, 신 목사는 한 건의 제보를 받았다. <마태복음 강해 1~3>의 내용이 2013년 쿰란출판사에서 나온 <영으로 푸는 마태복음 상·하>와 유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두 책을 대조해 본 신 목사는 충격에 빠졌다. 두 책이 토씨 하나까지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영으로 푸는 마태복음>을 쓴 사람은 황 목사가 시무하던 서울흰돌교회 청년부 출신의 김 아무개 목사였다. 알고 보니 김 목사는 2007년쯤 황 목사의 유족에게 "목사님의 설교 노트를 빌려 달라"며 수십 권의 설교 노트를 가져갔었다. 김 목사는 이 원고 등 황 목사의 자료로 4권의 책을 썼다. <뉴스앤조이>는 황 목사의 책과 김 목사의 책을 입수해 비교·대조해 보았다.

아래 사진에서 빨간 줄을 그은 부분이 김 목사가 글을 가져다 쓴 부분이다.

▲ 위 사진은 제자 김 아무개 목사의 글, 아래 사진은 황 아무개 목사의 글이다. 거의 모든 문장이 일치한다. 신 목사의 분석 결과, 김 목사의 책 내용 80%가 이런 형태로 황 목사의 글을 가져다 쓴 것으로 나타났다.
 

황 목사의 글을 베낀 건 <영으로 푸는 마태복음> 두 권 외에도 <영으로 푸는 창조 세계>, <영으로 푸는 성경> 등 총 네 권이었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김 목사의 책은 황 목사의 글을 순서만 재배열했을 뿐 그대로 옮긴 게 대부분이었다. 신 목사는 김 목사가 쓴 책 네 권의 약 70~80%가 황 목사의 글과 비슷하다면서 "저작권위원회에 문의해 봤는데, 이 정도 분량이면 '표절이 아니라 복제'라 하더라"고 말했다.

두 달여간 표절 자료를 분석한 신 목사는 2014년 11월, 김 목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따졌다. 김 목사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했다. 황 목사의 아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그는 "대한민국 모든 강해 책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는 관행을 따라 그런 것이고, 나는 이 책을 통해 금전적인 이득이나 명예를 얻을 생각이 없었다. 200권 밖에 안 팔린 책들로 무슨 명예나 금전을 취할 수 있겠는가. 난 그저 황 목사의 뜻과 신학을 잇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기자는 지난 9월 초 김 목사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잘못은 인정하지만 고의는 아니었다고 했다. "유가족 생각을 못 한 건 잘못이다. 인정하고 사과할 건 다 했다. 황 목사님 이름을 책에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돌아가신 분 이름을 책에 넣는 걸 어느 출판사가 원하는가. 황 목사님 이름은 서문에 밝혔다. 그 정도 하면 될 줄 알았다"고 했다.

김 목사는 <영으로 푸는 성경> 서문에 "이 책의 내용은 나의 스승인 황 목사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분이 소천하신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아직도 저에게 언제나 살아 있다"라고 썼다. 그러나 다른 책 서문에는 황 목사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저작권 침해로 벌금 500만 원...출판사는 폐기 처분 진통

당사자가 잘못을 인정했지만, 후속 조치는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을 대신해 신 목사가 김 목사와의 합의에 나섰으나 의견은 엇갈렸다. 김 목사는 "내가 받은 인세는 16만 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500만 원을 위자료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신 목사는 인세가 20만 원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김 목사와 합의를 거부했다. 유가족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무성의한 변명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김 목사와의 연락은 끊겼다. 합의할 의사가 없다고 본 신 목사는 올해 1월,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김 목사를 고소했다. 법원은 9월 초, 김 목사에게 500만 원의 벌금형을 내렸다.

김 목사를 형사 고소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책 폐기 문제를 놓고 이번에는 신 목사가 쿰란출판사와 갈등을 빚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황 목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김 목사의 책들이 폐간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이와 달리 출판사는 먼저 저자에게 보상받고 폐기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올해 1월, 신 목사와 쿰란출판사 이 아무개 사장은 후속 조치를 논의했다. 신 목사는 시중에 배포된 4종의 책을 회수하고 폐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쿰란출판사 이 사장도 문제가 있는 책이라는 건 동의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책이 3,000여 권이라며 모두 환수할 때까지 6개월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신 목사는 6개월을 기다렸지만, 그동안 출판사가 무슨 조치를 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가장 먼저 해 주겠다던 홈페이지 상의 도서 정보 삭제가 8월 중순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도 하지 않은 출판사가 얼마나 성의 있게 책을 회수했을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쿰란출판사 이 사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표절 문제를 발견한 즉시 출고를 정지했고, 6개월간 착실히 회수 조치했다고 답했다. 그는 9월 초 <뉴스앤조이> 기자와의 통화에서 "출판사로서 할 건 다 했다. 도서 회수도 다 해서 창고에 넣어 뒀다. 김 목사에게 제작비 일부라도 받고 폐기 처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출판사도 손해를 봐야 해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저자가 1,000만 원, 아니 500만 원이라도 주면 그거라도 받고 다 폐기하려고 한다. 우리로서도 난감하다. 솔직히 출판사가 무슨 죄가 있나"라고 설명했다.

신 목사는 기독교출판협회에도 진정서를 내고, 쿰란출판사가 성실하게 폐기를 이행하게 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후 기독교출판협회는 둘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지만, 감정의 골이 깊어진 양측은 대화도 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나마 출판사에서 일단 폐기부터 하겠다며 입장을 선회했다. 9월 말, 다시 통화한 이 사장은 "할 일도 많은데 이 일을 붙잡고 언제까지 갈 수는 없다. 김 목사가 돈이 없다면서 한 달에 30만 원씩 입금해 준다고 하고 있다. 그 말을 누가 믿겠나. 일단은 그냥 폐기하기로 했다. 곧 신 목사를 만나 서로 쌓인 감정을 풀고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약 2,000만 원의 손해가 발생할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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