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인은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종교개혁을 통해 갈라져 나왔고 종교전쟁을 겪을 만큼 격렬하게 싸우지 않았던가. 또한 지난 수백 년, 너무나 다른 종교적 정체성을 발전시켜 왔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많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냉정히 따져 보자.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에 대해 얼마나 알까.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류는 사실상 없다. 문화적 교류도 없고 종파 간 개종은 극히 드물다. 솔직히 말해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교회밖에 모르고, 성당을 다닌 사람들은 성당밖에 모른다. 더구나 한국교회가 얼마나 신학적이고 얼마나 체계적인 교육을 하는가. 천주교 평신도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에 적극적이던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도 안된다.

그럼에도 호전적인 개신교인들의 천주교 비판은 쉽게 접할 수 있다. 

1. 천주교는 마리아를 숭배한다.
2. 천주교의 교황 제도는 성경적이지 않다.
2. 천주교는 예배가 아니라 미사를 드린다. 미사는 제사이지 예배가 아니다.
3. 천주교는 세례 과정이 복잡하고 문제가 많다.
4. 천주교는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뉴에이지적이다. 하느님은 하늘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 더 추가한다면 개신교는 '만인사제론'을 이야기하며 천주교의 '사제주의'를 비판한다. '이신칭의'를 들먹이면서 천주교가 '믿음과 선행'을 동시에 강조하기 때문에 '행위의 종교'이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근거와 내용을 갖고 얘기하기보다는 단편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수준이다.

한국 개신교인의 가톨릭 비판은 타당한가

천주교가 마리아를 숭배한다는 주장은 애매모호하다. 물론 문화적인 측면에서 천주교는 마리아 찬양이 일반적이다. 바로 여기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혐오감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굳이 성모승천설을 주장한다든지, 숭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꼭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간다든지 등등. 이런 것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것이 얼마큼 성경과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실재로 천주교 계열의 성경 강해서를 보면 몇 번 나오지도 않는 '마리아' 관련 구절에 과도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는 정확히 하자. 마리아의 무염시태(마리아가 예수를 원죄 없이 잉태했다는 교의)는 1854년 교황 비오 9세 때 발표한 내용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진행된 근대 학문의 발전과 급진적인 세속화 경향에 대한 극히 보수적인 반응이었다. 또한 당시 비서구 지역의 광범위한 토착 신앙과 타협을 모색해 보는 노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당시에는 교황은 무조건 옳다는 교황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등 천주교 역사에서 상당히 퇴행적인 경향을 보이던 때다. 주장의 올바름을 떠나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천주교의 고유성을 마리아한테서 찾으려는 분파의 힘은 강하다. 실제로 2차 바티칸 공의회(1959)에서 마리아를 구원의 중개자라며 교회론에 포함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격렬한 논쟁 이후 최종 투표 당시 1,114표를 얻은 반대파(50.9%)의 승리로 좌절한 적도 있었다. 즉, 문화적으로 마리아가 천주교에 뿌리박혀있고 또한 마리아에 대한 극단적 숭배를 추진하는 세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 대한 분명한 반대 노선이 존재한다. 교리상으로 보아도 마리아를 예수님과 동등한 선상에 놓았다는 주장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천주교에서 출간한 성경 공부 교재라든지 신학 서적을 읽어 보면 의외로 마리아에 대한 얘기가 극히 적다. 제목을 감추고, 몇몇 표현상의 문제만 제거한다면 개신교인지, 천주교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서적도 상당히 많다.

천주교 역사가 어떤가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할 의도는 아니다. 천주교를 마리아 숭배교라고 비판하고 있는 수많은 개신교인 중에서 천주교 역사를 알고, 그들의 교리가 성립한 과정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앵무새처럼 천주교를 욕하는 개신교인 중에 얼마나 자신이 내뱉는 말에 책임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개신교와 천주교, 같은 서방 교회 전통 계승

얼마 전 예장합동 총회에서 김종주 목사가 "가톨릭은 이단(異端)도 아니고 이교(異敎)"라고 발언했다. (관련기사: [합동13] "가톨릭은 이단도 아니고 이교")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개신교 역시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가 주일날 반복적으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서방교회의 전통, 즉 천주교에서 공인한 신조이다. 동방정교회까지 포괄하는 공통의 신조는 니케아신조나 콘스탄티노플신조이지 사도신경이 아니다. 막상 읽어보면 고대의 여러 신조 간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말이다.

또한 개신교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루터와 칼뱅을 넘어서 초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야기가 흘러가고는 한다. 루터와 칼뱅이 자신의 신학적 타당성을 로마 말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내내 천주교 신학자와 개신교 신학자 사이에는 누가 제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이해했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지금도 개신교 신학을 공부하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만나게 되며, 상당수의 신학자나 목회자가 '초대교회-아우구스티누스-루터·칼뱅'식의 계보를 제시하고는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의 설계자'라고 불릴 정도로 중세 교회의 신학과 신앙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여전히 천주교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다. 서점에 가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개신교보다 천주교에서 훨씬 많이 출간하고 있다.

더구나 동방정교회에서 유독 비판하고 부정했던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다. 공교롭게도 서방 교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가 동방정교회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 하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결국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같은 신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고, 같은 신조를 암송하고 있다. 심지어 중세 서유럽이라는 공통의 지리적·문화적·역사적 배경 가운데 갈라져 나왔는데 천주교가 이단이나 이교라면 대체 개신교는 어떤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이런 비합리주의와 몰상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천주교도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정확한 규정을 두고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부정하며 '성경의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단을 판단한다. 다른 구세주를 내세우거나, 성경을 왜곡 해석하거나, 성경 외에 다른 경전을 받아들일 때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천주교가 '이단'일까? 성인 숭배와 면죄부를 비롯한 온갖 잘못된 중세적 전통과 종교적 오염이 있던 바로 그 시대로 돌아가도, 천주교 신학에서 '이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역사신학자들의 중론이다.

더구나 과거 로마가톨릭교의 신앙교리성 장관이자, 이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 요제프 라칭거의 <나자렛 예수>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대표적인 신학 서적만 읽어 봐도 천주교 신앙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심지어 '믿음과 행위'에 대한 논란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너무 다르다. 그리고 사실 우리 개신교 역시 '믿음에 근거한 행위'를 요구하고 강조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격렬한 반발에도 야고보서가 성경에 남아 있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같은 유명한 복음주의자가 야고보서를 주해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에라스무스적인 전통, 즉 성도의 도덕성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문화는 영국에서 종교개혁을 끝까지 반대한 토마스 모어(그는 현재 천주교에서 성인으로 분류되어 있다)뿐 아니라 칼뱅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가. 칼뱅주의자만큼 금욕적 도덕주의자가 세상에 있었던가. 대체 무슨 기준으로 이단이라 하는가, 대체 누가 무엇을 이단이라 하는가. 

천주교가 중세를 넘어온 종교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절대다수가 문맹인 사회, 고딕 성당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시각적으로 교의를 전파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의 의전이 상당히 시각적이고, 제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세례 방식이 절기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인쇄술 발전과 독해력에 기초해서 자리를 잡은 근대 종교인 개신교와 다르다.

교회사 공부 좀 하자. 초기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이 모여서 'GOD'를 어떻게 번역할까를 두고 하느님, 하늘님, 상제 등 각종 안을 제시했다. '상제'라는 말은 '옥황상제', 즉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부르는 절대자에 대한 보편적 호칭이었다. 실제로 '상제'는 유력한 방안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이후 개신교가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 '상제'라고 불렀다면 개신교가 이단이 되는가?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전통에서 차이가 있고, 문화에서 차이가 있고, 맥락에서 차이가 있고, 역사적인 차이가 있다.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고, 비판할 부분도 있다. 막스 베버는 루터파가 아니라 칼뱅파가 천주교의 진정한 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칼뱅파의 신앙적 정체성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완전히 없애고, 세속을 '하나님나라'화(化)하려는 부분에서 천주교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경쟁할 수 있고 서로 비판할 수 있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개신교 평신도들의 역동성과 열정은 천주교 평신도에 비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비판하는 사제주의로 무장한 천주교 성직자에 비해 개신교 목회자의 수준은 모든 면에서 떨어진다. 어떤 목적과 맥락에서 비판하는가, 어떤 부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가. 말하는 본인이 알고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싸잡아서, 무작정, 감정적으로 상대를 규정하는 것것은 ‘욕설’에 불과하다. 상대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태도가 과연 성경적인가?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교리상의 이유? 신조상의 이유? 아니다. 중세 초기에 보여 준 로마가톨릭교의 헌신적인 노력은 중세 안정기로 들어가면서 사라져 버렸다. 세속 권력자와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싼 싸움 가운데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 운동이 한계를 보였고, 이후 중세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한다. 타락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가톨릭에 대해 위클리프, 후스가 비판하다가 이단으로 규정되고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엄청난 문제가 누적되다가 결국 면죄부 문제를 둘러싸고 비텐베르크 성당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지 않았던가.

한국교회는 천주교를 이단이나 이교라고 말할 정도의 종교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 오늘날 목사들의 성적 비행은 알렉산더 10세를 비롯한 중세 교황들이 보여 준 면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오늘날 교회 건물에 대한 재정 투입은 가히 성베드로대성당에 비견할 만큼 쓸모없고 사악하다. 성직자의 비행, 종교재판식의 다른 종파에 대한 적대감, 세속 권력에 대한 의존도와 권력 지향성. 이런 것들은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의 문제인가 아니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인가. 구분조차 힘들다. 어떻게 우리가 루터와 칼뱅의 후예인가. 그들이 주장했던 몇 가지 '개념'만 읊조리면 우리가 그들의 계승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한다는 말인가.

심용환 / '깊은계단&5분인문학' 대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