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인 존 패티슨은 새물결플러스에서 번역·출간한 <슬로처치>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소저너스>에 쓴 글의 번역문을 게재합니다. (원문 바로 가기) - 편집자 주

여름은 결혼의 계절이다. 아내와 나는 8월에만 네 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중 한 번은 우리 집 뜰에서 주관했던 처제의 결혼식이다.

나는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직접 준비한 서약문을 읽을 때가 가장 좋다.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어 접힌 종이를 꺼낸다. 옆에 선 이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손으로 꾹꾹 눌러 썼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들이지만, 그 순간 그들이 느끼는 모든 것을 종이에 담아내기에는 사실 역부족일 것이다. 

지난달, 사랑하는 두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커플이 매우 어린 점도 있었지만, 둘 모두가 자신들의 서약서에 '힘겨운 대화'를 충실히 해 나가겠다는 언약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달리 머릿속이 명쾌해지는 듯했다. 믿음을 고백하는 단상에 서면 행복감과 만족감만 있을 거라 여기기 쉽다. 그런데 그 빛나는 순간에도 '보통'의 부부들을 괴롭히는 갈등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존 패티슨. <슬로처치> 공동 저자. (공식 트위터 갈무리)

두 친구는 결혼할 때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언약했다. 언약의 내용으로, 힘겨운 대화라도 잘해 나가겠다는 약속을 빼먹지 않았다. 실제로 언약은 그러한 대화를 신성하게 한다. 언약으로 관계가 맺어지면 불가피하게 힘겨운 대화에 임할 때에도 서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언약 덕분에 그들은 서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고자 힘쓰게 된다. 서로 동의하지 않을 때에도, 심지어 심각하게 의견이 불일치할 때에도 그들의 관계는 언약으로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 의견이 불일치한다고 해서 상대가 어딘가로 가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천국이라도 우리가 모든 것에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은 일에도 서로 다른 의견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중에는 매우 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교회가 너무 자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최근 나는 우리가 불일치하는 일이 너무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더욱 정확하게는, 기독교 공동체라면 공동체 안팎 매일의 삶에서 힘겨운 대화가 일정 정도 필요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다. 물론, 내가 멋지게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은 아니다.  

첫째, 힘겨운 대화를 한다는 것은 관계의 밀접함을 함축한다. 성경은 예수를 따르는 것을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영혼은 일요일 아침 두 시간 동안 그저 교회라는 가족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나는 우리가 매일매일 관대함과 환대, 소박함과 평등, 치유, 위험, 아름다움과 평화로 가득 찬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로 더욱 가깝게 이어지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서로를 성가시게 하고 공격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하지만 불일치가 공동체의 이면이 아니라 공동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라르슈의 창설자인 장 바니에는 하나님이 서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만 함께하도록 불러 모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출신과 관습, 생각하는 방식에서 매우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도록 요청하신다. 

둘째, 힘겨운 대화는 화해의 기회를 제공한다. 산산이 부서질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부서지는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화해의 대사로 부름받았다. '화해'를 뜻하는 'reconciliation'은 '다시 함께하게 함'을 뜻하는 라틴어 말에서 유래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사회에서, 교회는 관계와 영혼, 이웃들, 물이 갈라지는 경계를 하나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비록 내던져져 회복될 수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과 사명을 증거해야 할 예언자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셋째, 대화는 신앙의 정수이자 삶의 정수다. 나는 더더욱, 영적인 삶이란 일련의 계속되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성경과 기독교 전통과 자연 세계, 다른 믿는 자들과 우리 이웃, 문화, 사상, 역사, 그리고 우리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신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사도들이 엠마오로 향해 가는 도중 낮은 음성으로 서로 이야기하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한집에 모였다는 대목이다. 거기서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신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라 '대화'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지친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실제로는 전율을 느끼고는 한다. 어느 면에서 나는 성인이 된 후에도 많은 시절을 어렸을 때 했던 대화들을 다시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커피숍에서, 와플 가게에서, 패스트푸드점, 술집에서 문 닫을 때까지 했던 대화들. 혹은 꼭 캠프파이어에 둘러앉아 친구와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대화를 지금도 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듯하다. 사실 <슬로처치>를 함께 쓴 작가와 나는 대화의 중요성이 참으로 크다고 확신하여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교회 됨을 위한 식탁 교제.'   

기꺼이 힘겨운 대화에 임하겠다는 언약 없이는, 그리고 회복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건강한 탈출구가 없다면 서로 간의 불일치는 끔찍한 것이 될 수 있다. 특히, 교회의 고상한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상황에 처하면 더욱 세상의 마지막에 이른 것처럼 느껴진다. 

불행히도 기독교인들은 회중 가운데서 종종 발생하는 불일치를 좀처럼 잘 다룰 줄 모른다. 우리는 대중 안에서나 특정 교파의 포럼 안에서만 불일치할지 모른다. 단지 우리 목사에게만, 우리가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를 위한 이야기에만 돈을 쓰도록 할지도 모른다. 전혀 아무 말도 안 할 수도 있고, 혹은 서로 찢겨질 수도 있다. 떠나갈 수도, 쫓겨날 수도, 유대를 끊을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직접 보았고, 그러한 모든 경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파벌을 형성할 필요도, 전략적 동맹을 형성할 필요도 없다. 은근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자신을 해체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불일치 가운데에서도 풍성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대화하는 것을 통해 은총이 허락되는 공간, 은혜가 넉넉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언약으로 묶여 있을 때 이러한 일치가 가능하다. 결혼한 내 친구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역 교회와 한 교파의 구성원으로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자신이 형성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욱 강력한 언약으로 우리 모두와 하나님과 묶여 있다. 예수는 이러한 새 언약의 중재자이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이들을 용서하심으로 우리 하나님이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한 것은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것에 동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일치를 희망한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치를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는 일치가 일어날 때까지 서로를 사랑한다. 이 언약 관계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취약해지고, 부드럽게 대해도 잘 변화하며, 서로에게 책임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안전한 장에서만 서로에게 잘 이야기하고 귀 기울이는 것을 배우는 '힘들고 성스러운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 최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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