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김지철 목사(소망교회)가 2015년 8월 20일(목)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남선교회전국연합회 창립 91주년 전국 대회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 편집자 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As he approached Jerusalem and saw the city, he wept over it)."(눅 19:41)

▲ 김지철 목사. (목회멘토링사역원 자료 사진)

1.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다. 짧은 선교 기간, 130여 년 만에 이만큼 축복을 경험한 교회가 세계 선교 역사 가운데 어디 있을까, 우리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무엇이 이런 복을 가져다주었는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잘 무장된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기초해서 세워진 교회였다. 민족이 지녔던 역사 현장의 슬픔과 아픔에 동참했던 교회였다.

한국교회는 새벽 기도회, 십일조 헌금, 주일성수에 엄격했다. 이웃에게는 봉사와 섬김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고, 나라를 사랑했던 순교자의 피에 기초한 교회였다. 일본제국의 억압을 이겨 낼 수 있었고,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물리칠 수 있었다. 군사독재의 사슬을 풀어내고 민주화로 가는 길에 한국교회는 큰 몫을 감당했다. 우리 일상에도 여러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술에 취하는 것과 도박, 나태한 습성들을 끊어 냈고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여 생산적인 경제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가난했던 백성은 한강의 기적, 경제적인 풍요를 경험하게 되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각 분야에 진출하여 자기 역할을 했다. 지금도 수많은 기독교인이 대한민국의 사회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자랑이며 기쁨이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현실을 더 깊이 살펴보면, 결코 낙관적일 수 없는 자리까지 와 있다. 부정적인 일과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목사'와 '장로'가 있다. 때때로 신문과 TV에 등장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추문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이래서는 안 되지!'라고 하며 잘못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교회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어쩌면 가장 변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변화되기 어려운 집단이 교회 공동체가 아닌가라는 자조적인 탄식이 나오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하나님의 심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언뜻 보면 외부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내부가 썩어 곪아 터졌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일 뿐이다. 사회 기강과 가치관이 무너지고, 갈등과 미움이 증폭되고, 편 가르기가 난무하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영적인 위기가 극에 달했다는 표지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위기를 만들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그러했다. 당대의 정치(로마제국 속국이면서 대 헤롯의 잔인한 통치), 경제(있는 자와 없는 자의 이분법적 극대화), 사회(주인과 종이라는 이중적인 계층구조와 갈등), 문화적(그레코로만의 문화적인 위압)인 갈등과 위기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심각한 종교 갈등과 위기가 있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대로였다. 유대 신앙은 형식화한 종교,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종교로 몰락하고 있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언은 곧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가장 엄정한 비판을 받은 것은 당대의 정치인, 경제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 지도자로 알려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고, 외형적인 직분에 연연하며 자기 자랑과 교만이 가득 찬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더 이상의 자기 갱신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화석같이 굳어진 종교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몰락의 길로 내몰았다.

3. 예수님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슬픔, 그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상황을 인식하고, 그동안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달아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셨다. 그러나 그런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면서 탄식의 눈물을 흘리셨다. 이런 예수님의 탄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시대를 비판했던 예언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로다."(사 1:21)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렘 15:5-6)

하나님은 회개를 원하신다. 마음을 돌이키기 원하신다. '돌이킨다'는 말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회개한다는 말이 된다. "내가 한두 번 내 마음을 돌이켰느냐? 이제는 나도 힘들다"는 하나님의 탄식이자 하소연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것 자체가 죄악이고 범죄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범죄한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마 23:37)

예수님은 살아 있는 인격체처럼 예루살렘을 부르신다.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심장이자 거룩한 도시이며 '평화의 도시'를 의미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와 거룩함, 공의를 저버렸다.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는 심각했다. '예루살렘'은 그 성읍에 사는 사람들 전체를 지칭하지만, 예수님은 무엇보다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에 사는 종교 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겨냥하신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에는 이들을 향한 통한이 담겨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을 저버렸다. 그들은 회개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예수님은 애통하게 부르짖으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셨다.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셨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죽였다. 하나님의 거듭된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것은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반역이었다.

4. "회개와 용서, 화해케 하소서"(창 50:20-21)

올해 창립 91주년을 맞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의 주제가 무엇보다 눈에 띈다. '회개하게 하소서'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옳은 주제 표어다. 왜냐하면 용서도, 화해도 회개를 했을 때 따라오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요셉과 형들이 서로 화해하는 장면이 나오는 창세기 50장을 주제 말씀으로 택했다. 이 장면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요셉이 큰 관용으로 용서와 화해를 하기 전에 형들의 회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는가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동생 요셉의 모습은 창세기 42-45장을 참조하라). 형들이 잘못을 뉘우친 뒤에야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화해를 선언한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거짓된 용서만 남게 된다. 뼈를 깎는 회개가 없으면, 화해의 제스처만 드러날 뿐이다.

5. 진정한 회개 없는 한국교회

예수님이 왜 당시의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며 독설을 퍼부으셨을까? 그들 안에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영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조훈현이 쓴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인플루엔셜)을 보면 복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복기란, 대국이 다 끝난 후 바둑판에 대국 때 두었던 대로 돌을 다시 놓아 보는 것이다. 복기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다. 그의 말이다.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기를 잘해 두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좋은 수를 더 깊이 연구하여 다음 대국에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 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 준다."

바둑기사는 바둑이 끝날 때마다 복기를 한다. 아마추어는 복기를 하지 못한다. 자신이 왜 여기에 돌을 두었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다. 복기가 안 되니까 똑같은 수를 놓고도 깨닫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신앙의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마추어적인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신학을 전문으로 배우고, 목회를 전념하는 목회자들마저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은 "너 자신을 향해 질문해 본 적 있는가?"라고 물으신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자기 정체성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그동안 남을 향한 질문을 많이 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질문할 차례다. "나는 누구일까?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내게 이 땅에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인생을 살아갈 때 속도가 중요하다. 그러나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빨리만 가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방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래야 방향을 정할 수 있고, 속도도 낼 수 있다.

'자기를 향한 질문'이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판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다. 이는 자기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 위한 출발점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을 멈춘다면 성숙도 멈추게 된다. 자기를 자랑하는 기득권 속에 매몰된다.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6.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먼저 신학의 자리다. 신학에 무지하고 어설픈 교회 지도자가 많다. 신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보통 로마가톨릭은 '영광의 신학'을 대변하고, 종교개혁자와 그들을 잇는 개신교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은 강조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두 신학은 더불어 가야 한다. 기차가 두 개의 선로 위에 양쪽 바퀴를 걸쳐야 전진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는 양쪽 신학에 모두 힘을 실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이 둘이 서로를 배제하고 적대시하게 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부활 없는 십자가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변증법' 속에 가장 역동적인 복음의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신학의 문제는 '영광의 신학'을 붙잡는다고 하면서, 단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번영의 신학'으로 잘못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신학'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단지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구제하고 봉사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오해한다. 십자가 신학이 '구제'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신학'을 상실하면, 기독교 신앙은 타락한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자기 갱신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첫째가 목사들이다. 둘째가 장로들이다. 셋째가 집사들이다. 오히려 성도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으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려 한다. 이런 모습이 교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악과 불의를 너무 쉽게 용서받는 교회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뻔뻔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교회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영광의 신학'을 상실하면, 기독교 신앙은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생명, 부활, 영원한 천국의 능력을 맛볼 수 없게 된다. 하늘을 잃어버리고 땅만 밟고 산다. 부활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초월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현실의 무능함 속에서 좌초하는 교회와 신앙인이 되고 말 것이다.

두 번째는 목회의 자리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의 변증법을 상실했다는 데 있다. 가난한 자와 함께 있기만 하면,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오만한 착각을 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거룩한 경험이 사라진 것이다. 신앙이 종교로 변질되고 있다. 동시에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영광의 신학'을 경험한 것이라고 오해했다. '번영의 신학'에 매몰되었다. 번영신학이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탐욕을 곁들인 성공신학이다. 현세의 축복만 추구한다. 건강의 복을 받고, 부를 축적하고, 자녀가 출세하고, 성공 신화를 만드는 것이 본질인 양 신앙이 왜곡되고 변질된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기에 기복적인 신앙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요청,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요청, 그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큰 소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는가? 사람들은 영적 우선권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도 드리는데 탐욕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문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구제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자기 실존의 연약함을 절감하지 않았다. 이웃을 구제하고 봉사했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동참했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다시 강조한다. 교회가 '영광의 신학'을 잃어버리면 기독교 신앙은 능력을 잃는다. '십자가의 신학'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타락의 늪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가? 장로를 위해 존재하는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제도적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구원주요, 역사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축복을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곳곳에서 그 반대로 가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이어야 하는데,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 신앙의 근본 동기가 무엇인가?

가족들이 함께 기도를 한다고 하자. "우리 가족 중에서 목사가 나와야 한다. 장로도 배출되어야 한다. 가문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자." 얼마나 고마운 기도인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기도는 신앙의 한 과정이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잘 봉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 동기와 목적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이 가문의 목표라고 한다면, 세속화한 자본주의 세계가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 교회가 더 크다. 우리 교인의 숫자, 헌금이 더 많다"고 자랑한다고 하자. 거기에 교회 지도자들의 사고가 붙잡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욕의 우상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 중요 기관의 장을 맡기 위해 혈안이 되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은 '증경'이라는 말을 듣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이런 '장' 자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가, 그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으로!

마지막으로, 목사로서 죄송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국교회의 수많은 문제가 목회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축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라는 사실이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 앞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 가지다. 목회자들과 함께, 남선교회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을 하며, 또 목회 현장에 있으면서 기억하는 말씀이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하신 말씀이다. 고린도교회는 분열·분파했으며, 도덕적인 부끄러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랑에 취해 있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더 너희의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요청한다.

첫째,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목회자를, 장로들을, 교회의 외형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라.

둘째,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성도들의 것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다 교회에 속한 사람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의 소유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목회자를 존중하는 장로님, 집사님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축복을 받았다. 목회자는 교회를 위한 존재이다.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장로교회라고 해서 장로들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다. 장로님들께 부탁한다. 목회자를 평가할 때 '번영의 신학'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기를 바란다. 50-60대의 장로님들은 30-40대의 성도들과 소통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다 성도들의 것이다.

셋째, 영적 지도자들도, 교회와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인이시다. 진정한 교회 개혁이란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을 거절하는,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우상들(물신적인 기복주의, 교회 내 관료주의, 가족주의, 교회 세습 문제, 지역 분파주의, 교회 사유화, 재정의 불투명성 등)을 배척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이 일에 겸손하게, 그러나 기쁨으로 참여하는 남선교회 회원들 되시기를 기도한다. 이 시대와 교회를 향한 예수님(하나님)의 아픔이 곧 목회자의 아픔, 장로님들의 아픔, 성도님들의 아픔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슬픔으로 탄식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서울아 서울아, 대한민국아 대한민국아, 한국교회야 한국교회야, 그 중심에 있는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사들아 목사들아, 장로들아 장로들아!"

"내가 너희가 내 앞에서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린 적이 얼마나 오래인가?"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픔으로 울부짖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와 영적 지도자들에게 임하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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