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소녀가 흙을 빚어 손바닥만 한 화분을 만들었다. 주변에는 아직 굽기 전의 회색빛 화분이 늘어서 있다. 벌써 수십 개째다.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모든 화분 중앙에는 노란 리본 모양을 만들어 달았다. 소녀는 어머니, 고모, 도예 선생님과 함께 계속 화분을 빚었다. 만들 때마다 화분 하나하나에 1부터 숫자를 찍었다. 소녀는 마침내 304번째 도장을 찍었다. '304명… 정말 많구나.' 숫자로만 들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무거움이 가슴에 와 닿았다.

▲ 김지인 양이 세월호 가족들을 위한 미니 화분을 만드는 모습. (사진 제공 나들목교회)

소녀는 나들목교회 김형국 목사의 딸 김지인 양이다. 지인 양은 나들목교회 사회변혁센터가 진행하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나들목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 304개의 작은 화분을 만드는 일이다. 교인들은 이 화분에 다육식물을 심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에게 하나씩 주고 싶었지만, 가족들이 지금 화분을 돌볼 여력이 없을 것 같아 하나씩 사진을 찍었다. 돌보는 건 교인들이 대신하기로 했다.

나들목교회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나들목의 기도 편지>라는 작은 책자도 304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김형국 목사가 4월 30일 광화문광장 기도회에서 한 설교문과, 지난 4월 15일 나들목교회가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 예배를 드릴 때 만들었던 공동 기도문, 교인들이 직접 작성한 기도문 200편 중 50편을 추려 넣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예배에 참석해 쓴 기도문도, 20년 전 성수대교 붕괴로 당시 17살이었던 친구들을 잃은 사람이 쓴 기도문도 있다.

여러 교인이 수작업으로 카드 304개를 만들었다. 이 카드를 나들목교회 교인들이 한 개당 1만 원을 주고 샀다. 예산은 그렇게 충당했다. 카드를 구입한 교인들은 세월호 가족들을 생각하며 손글씨로 편지를 썼다. 교회는 이 카드와 화분 사진을 소책자에 끼웠다. 이렇게 세월호 가족을 위한 304개의 세트가 마련됐다.

나들목교회는 지난 4월 19일부터 두 달간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교회는 이를 조용히 전달하려고 했다. 김형국 목사와 세월호특별조사위원이자 나들목교회 사회선교사인 박종운 변호사가 6월 18일, 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그러나 유 위원장은 교회가 가족협의회 총회에 와서 직접 취지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게 더 좋겠다고 했다. 그게 가족들에게 더 위로가 될 것 같아서다.

▲ 나들목교회가 준비한 화분(사진 위), 편지(사진 중간). 소책자 안에 하나씩 들어가 한 세트가 된다. 교회는 304세트를 세월호 가족들에게 나눠 주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가족협의회 총회는 6월 21일 주일 저녁, 안산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렸다. 세월호 참사 정부 합동 분향소가 있는 안산 화랑유원지, 넓은 주차장 끄트머리에 있는 분향소를 지나면 경기도미술관이 나온다. 미술관 1층 문 앞에는 '4·16가족협의회'라는 노란색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1층 복도를 죽 걸어가 왼쪽으로 돌면 가족협의회 사무실이 나온다. 총회는 미술관 1층 강당에서 열렸다.

가족들의 총회는 미수습자 9명과 희생자 295명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됐다. 여러 안건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 가족들은 새로 제작된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다큐를 보던 중 한 어머니가 흐느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머니의 우는 소리가 썰렁한 미술관 복도에 울렸다. 강당 밖에 나와 있던 가족 몇이 그를 달랬고, 몇은 한쪽에 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무거운 공기가 깔린 미술관 복도에는 김형국 목사와 지인 양, 박종운 변호사, 황병구 사회변혁센터장 등 교인 7명이 다큐가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김 목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위로가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온 교인의 마음이 녹아 있는 거니까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모금을 할까도 싶었지만, 세월호 가족들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는 의견이 모아졌어요. 기도 편지와 화분을 만든 건, 한 번의 구호나 이슈 파이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잊지 않고 기도하고 행동하겠다는 뜻이에요. 교인들은 집에 있는 화분을 보면서 매일 세월호를 기억하겠죠."

▲ 원래 가족들에게 화분을 나눠 주고 싶었지만, 가족들이 화분을 키울 여력이 없을 것 같아 사진만 전달했다. 화분은 교인들이 대신 키우며 세월호를 기억하기로 했다. (사진 제공 나들목교회)

김 목사와 교인들은 사실 이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자랑할 일도 아닌데 자랑처럼 보일 것 같아서다. 모두가 세월호에 집중하는 4월을 일부러 피한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유경근 집행위원장의 요청을 받고,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뚝 끊긴 현재 상황을 보면서 <뉴스앤조이>에 연락했다. 이런 일이 교계에 알려져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큐 상영이 끝나고 나들목교회의 순서가 왔다. 먼저 가족들과 친숙한 박종운 변호사가, 그동안 나들목교회가 세월호 참사를 위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브리핑했다. 이후 김형국 목사와 지인 양이 단상에 올랐다. 지인 양이 가족협의회 전명선 운영위원장에게 책자를 전달하고 전 위원장을 안아 주었다. 그만 한 아이를 잃은 세월호 가족들은 붉어진 눈으로 박수 쳤다. 전명선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너무 고맙습니다. 저희를 위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까지 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들을 향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어요? 우리 아이는 잃게 됐지만, 이 아이의 친구들이 안전한 사회에 살 수 있게 진실을 밝히고 제도를 바꿔야겠죠. 저희도 부모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 다큐 상영이 끝나고 나들목교회가 가족들 앞에서 잠깐 취지를 설명했다. 지인 양이 직접 전명선 위원장에게 한 세트를 전달하고 포옹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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