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불교에서 내부 개혁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 일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이웃 종교의 사정도 녹록지 않나 봅니다. <뉴스앤조이>가 가톨릭과 불교의 내부 사정을 취재했습니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을 만나,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앞으로 네 편의 기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 가려 합니다. 마지막 기사에서는 각 종교의 가르침을 근거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개혁 운동의 정당성 및 당위성을 조명합니다. - 편집자 주
▲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의 편이었다. 개신교 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가르침 및 삶을 운동의 정신으로 삼는다.

개신교는 태생이 개혁이다. 이른바 '개혁주의'라는 말이, 16세기 종교개혁자의 신학을 고집하는 용어로, 다른 사람을 이단 취급하는 데 자기 입맛대로 갖다 붙이는 용어로 변질된 면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 개혁주의, 개신교회의 가장 적합한 의미일 것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개혁해야 하는가. 당연히 성경 말씀이다. 교회 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야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삶을 신학적 토대로 한다. 앞선 기사에서 언급한 개혁 과제 - 재정 투명성, 교권 탈피, 사회적 약자 보호 등은 굳이 성경까지 갈 필요도 없는 상식적인 것들이지만,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도 잘 통하지 않는 게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상식적인 이야기가 먹히지 않는 건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이번 기사에서는 불교와 가톨릭의 가르침을 통해, 개혁 운동의 사상적 정당성을 살펴본다.

불교, '깨달음'보다는 '깨어 있음'

▲ 불교 쇄신의 당위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중생의 안녕과 행복을 궁극 목표로 하고 있는 불교, 일부 불자들은 '깨어 있음'에 대한 성찰이 없기 때문에 반쪽짜리 불교가 되었다고 말한다.

불교에는 수많은 경전이 있다. 반야심경·금강경·법화경·화엄경 등 '대승 경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고, 법구경·열반경·숫타니파타 등 '원시 불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다. 내용이 방대하고 복잡하니 각 경전을 여기서 풀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조계종 총무원 화쟁위원회 위원장 도법 스님은 "모든 경전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결국 '온 생명이 행복하고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불교포커스> 정성운 편집주간도 "중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불교"라고 했다. 나와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공존과 조화를 이뤄야만 이 세상이 원만히 돌아간다는 것, 너와 내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대가 아닌 대화와 화해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불교의 정신이다.

총무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사부 대중 100인 대중공사'도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에 그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자주 사람들과 정법을 논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부처님도 한 사람의 대중으로 참여한 마당에, 승려와 신도 사이에 위아래가 있을 수 없다.

특히 종단의 개혁을 바라는 재가 불자들은, 한국 불교가 '깨달음'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꼬집는다.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는 그의 글 '도인불교(道人佛敎)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불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인이란 흔히 세상의 이치를 추구하지만 세상과 저만치 떨어져 관조할 뿐 속된 세상과 섞이지 않는 인물을 말한다. 지금의 한국 불교는 한마디로 '도인불교'라고 할 수 있다. 세속을 떠난 가치의 추구가 곧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를 '좀 안다고 생각'하는 불자들은 스스로 도인이 되고자 하거나 아니면 도인을 찾아다니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략)

도인불교를 지향해 온 결과, 지금의 한국 불교는 지혜만을 추구할 뿐 실천은 없는 불교가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으로서의 불교'만 있을 뿐 '실천으로서의 불교'는 없다. (중략) 일반 불자들의 의식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거나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중략)

도인의 원조로 여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실은 '도인'이 아니라 행동가였다. (중략) 부처님은 세속을 떠난 분이 아니었다. 한때 출가를 하셨지만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명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속을 떠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세속의 그릇된 가치관과 집착을 떠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세속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부처님에게 '세속'은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불교적 가치를 실현해야 할 곳이었다."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우희종 교수(서울대 수의학과)도 단체를 창립하며 이와 비슷한 논조로 이야기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불교의 주류는 '직지인심견성성불'(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좌선으로 마음을 직관해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함 - 편집자 주)을 말하면서 언제나 깨달음(悟·오)을 강조한다. (중략) 이렇게 깨달음이라는 피안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신도들에게 심어 놓았기에, 소위 한국 불교의 주된 가르침에서 깨달음 외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하심이라는 명분 속에 스님 권위에 대한 굴종과 눈먼 신앙생활 외에는 찾을 것이 없는 현실이다.

경전의 독화살 비유에 있듯이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삶이 지닌 고통의 문제로부터 시작하고, 이에 대한 깨어 있음(覺·각)에 근거한다. 연기 실상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이제 깨어 있는 붓다(覺者)로서 우리에게 깨어 있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폈고, 스스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 실천을 통해 보여 주었다. 그러나 한국의 승가는 재가 신도뿐만 아니라 출가자 스스로도 깨어 있는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깨달음만으로 삶을 소진하는 것이 전부인 양 가르친다. 승속을 떠나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도 그저 산 속에 들어앉아 방과 할로 세월을 보낸다. 크게 깨달아 깨어 있음으로 간다는 대오각성이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음은 사라지고 단지 깨달음이 목표가 된 미완의 한국 불교 모습이다.

삶 속 깨어 있음이 누락된 채 강조되는 깨달음의 공허함으로 인해, 고요한 시비 분별이 끊어진 자리에 간들, 그 다음이 없으니 승속을 막론하고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게 된다. 돈점 논란으로 세월 보내고 깨달음 강조로 스스로 반쪽 불교로 자리 잡은 종단에서 깨달음 이후의 일은 분명 상실되어 있다. 승단의 경직된 체제와 성차별은 물론, 종단 출가자들의 낯부끄러운 파벌 싸움과 사회 물의를 일으키는 그들의 부정부패는 그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진정한 가르침의 부재가 원인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없고 그 자리에 스타 스님이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소욕지족의 청정승들은 사라지고 많은 권승들이 재가자들의 흡혈귀가 되어 신도들의 고혈로 주지육림 속에 빠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바른 불교의 확산을 막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49년간 길에서 설법의 생을 보냈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이후 부처님의 삶을 잊었다. 실천은 없고 산 속에 틀어박혀 '참선'만 강조하는 불교를 보자니, 행동은 없고 골방에서 '기도'만 강조하는 어느 종교와 다를 바 없다.

교황,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적일 수는 없습니다"

▲ 가톨릭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의 메시지에 반응하고 미온한 한국 가톨릭에 쓴소리하는 신도들이 있다.

가톨릭은 개신교와 다를 바 없이 성서에서 드러난 야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정의를 믿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이 가톨릭 내부 개혁 운동의 뼈대가 된다.

가톨릭이 개신교와 다른 점을 하나만 꼽자면 교황 제도일 것이다. 교황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겠다고 하신 성서의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님이 지상 교회를 위임한 사람이 베드로이고, 교황은 이 베드로의 전통을 잇는 사람이다.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다.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교회법을 새로 도입하거나 변경, 폐지할 수 있고, 교회법에 대한 질문에 교황이 답변하면 그 자체로 교회법의 효력을 지닌다. 교황이 성서를 반할 수는 없지만, 교황의 말은 모든 가톨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가톨릭교회의 지향점은 가난한 사람과 친구가 되는 '가난한 교회'다.

세계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에 열광하고 있다. 종교를 불문하고, 무신론자도 교황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말뿐이 아니다. 가방을 직접 들거나 크지 않은 차를 타는 그의 소박함, 장애인과 노숙인, 어린아이에게 입 맞추고 기도하는 그의 행동에 사람들은 반한다. '종교인이라면 저래야 한다'는, 참된 종교인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의 어록을 몇 가지 소개한다.

"늙고 집 없는 사람이 노숙하다가 죽는 것은 뉴스가 되지 않지만 주가지수가 2% 떨어진 것은 뉴스가 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가난한 자는 힘든 일을 하면서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정의를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갈채를 받습니다."

"정치는 고귀한 활동입니다. 정치인은 공동선을 위해 순교자 같은 헌신을 해야 합니다. 정치는 이 같은 소명감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의 참모습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작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슬픔을 당한 세월호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 위로했다.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도, 노란 리본을 끝까지 가슴에 달았다.

"제 위로가 죽은 생명을 살릴 수는 없지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유가족에게 힘을 줍니다. 여기에 연대가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동참한다는 표시로 이 리본을 달았는데, 누군가 '리본을 떼는 게 좋겠다'고, '당신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올해 3월, 교황청을 방문한 한국 주교단에게 가장 먼저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가톨릭뉴스지금여기> 한상봉 주필은 이렇게 썼다.

"아직도 어느 주교가 어떻게 답변했는지 알 수 없다. 한국 주교회의의 보도 자료에는 어떤 언급도 없다. 방한 이후 교황은 세월호와 한국교회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교회는 세월호를 잊은 것일까? 적절한 답변이 있었다면 당연히 보도했을 법한 내용이 없는 것은, 짐작건대 주교들이 시원한 답변을 못했고, 그저 프란치스코 효과로 신자가 늘었다는 엉뚱한 이야기만 전했을 것이다. 추기경조차도 교황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다.

교황은 세월호를 묻지만, 추기경에겐 교황의 질문이 뜬금없다. 교황청에서 교회 이야기를 해야지, 웬 정치 타령이냐고. 교황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한국민의 고통과 '정의'에 대해 물었지만, 주교들에게 세월호는 조·중·동의 논조대로 '정치'에 불과하다."

<가톨릭프레스> 편집인 김근수 소장(해방신학연구소)은 기자와의 대화에서, "100여 년 만에 개혁적인 교황이 나왔다. 지금이 정체된 가톨릭교회를 개혁할 기회다. 그런데 한국 주교들은 눈치만 보고 있고, 실제로 개혁의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진짜 종교인', 개혁은 언제나 소수로부터

각 종교의 가르침 어디를 봐도 돈 욕심, 권력 욕심은 없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비우고) 다른 사람을 살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 3대 종교의 지도부를 보고 있자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됐다. 자신과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종교, 그런 것은 참된 종교가 아니며,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상 진짜 종교는 없었다는 한 스님의 말이 생각났다. 더러 참된 '종교인'이 있었을지 모르나 참된 집단으로서의 '종교'는 없었다는 말이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모두 각 종교의 참된 가르침에 순복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런 사람은 언제나 비주류였고 소수였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종교는 완전히 썩지 않으며, 그들 때문에 희망을 품고 있다. 그리고 개혁자들의 바람은 종교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묵묵히 이 길을 가는 중에 마주치는 한 사람이라도 참된 종교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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