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몇 해 전 대선 후보로 나선 한 정치인의 정치 구호다. 비록 대권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저 구호만큼은 많은 이에게 호응을 얻었다. 그 이유는 가혹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노동강도에 있다. OECD가 내놓은 '2015년 구조 개혁 평가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두 번째로 긴 나라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2014년 기준 47.2시간이며, 임금노동자의 17.2%는 심지어 근로기준법이 정한 최장 노동시간인 52시간을 넘기며 일을 한다. 독일의 경우에는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대략 33시간에 불과하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한국보다 주당 노동시간이 14시간 적은 나라에서 <피로사회>라는 책을 썼다. 그가 한국에 살았다면 어떤 책을 썼을까. 

▲ <안식일은 저항이다> / 월터 브루그만 지음 /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 172쪽 / 1만 원

미국의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emann)의 책, <안식일은 저항이다(Sabbath as Resistance)> 를 보면 이러한 '쉼 없음'은 비단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현대사회 대부분이 불안과 경쟁의 지배 아래 진정한 쉼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아니, 그의 진짜 의도는 '쉼 없음'이란 단순히 현대적 병폐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 실존 상황이라 할 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쉼 없음'을 인간의 기본 조건으로 두고 '안식'을 진정한 해방으로 설정하기 위해 브루그만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 가운데 '작은 이야기' 하나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다른 이야기들의 근원이기에 '그 이야기'라고 불려야 한다고 톰 라이트가 주장한 이야기로, 그러니까 출애굽 이야기로 돌아간다(톰 라이트, <로마서>). 

출애굽 당시 이집트 제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착취 피라미드였다. 제국의 국력은 더 많은 잉여 생산물을 축적하는 데 빠짐없이 동원되었고, 최하위층 노예들은 끝없는 노동과 폭력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신은 피라미드 정점에서 착취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존재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스템 한복판에 균열을 낸다. "나의 백성을 보내라."(출애굽기 5:1) 이는 히브리 민중을 착취 기계로서의 국가 바깥으로, 진정한 안식으로 해방하겠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 표명이었다. 브루그만이 보기에 십계명은 그 절정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출 20: 2-7)  

십계명은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이라는 자기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계명들은 이러한 자기 선언 아래에서, 이집트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청취되어야 한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숭배하지 말고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요구는 이집트에서 겪은 고단한 삶이 아직 생생한 히브리 민중에게 이렇게 들리지 않았을까? 더는 파라오와 이집트의 신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신들은 우상일 뿐이다. 너희는 파라오 앞이 아니라 내 앞에서 살아야 하며, 이집트의 법은 나의 계명으로 바뀌었다. 이제 내 말을 따라라. 자신을 향한 충성을 다짐하도록 한 뒤, 하나님은 네 번째 계명을 통해 자신과 파라오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출 20:8) 히브리 민중은 이제 왕과 신의 이름으로 강요된 착취와 폭력에서 해방되었다. 끝없는 노동 대신 하나님은 자신의 쉼을 그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다. 

하지만 "안식일은 단순히 멈춤이 아니다."(95쪽) 안식은 '무위(無爲)의 영역'에 들어서는 일이다(12쪽). 무위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아닌가? 노자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무위를 통해 인위(人爲)를 거스르고 자연을 따르는 것, 그러니까 인위적인 것으로서의 노모스(nomos)를 의심하고 본래적 피시스(physis)를 따르는 성찰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무위는 체계, 제도, 문화, 전통, 권력관계, 학습된 욕망 등 우리를 에워싼 일체의 인위적인 것의 힘을 끊고 그 영향력 바깥으로 탈출하는 적극적인 실천이다. 이렇듯 무위에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 내재해 있다. 그렇기에 안식일이 무위라면, 그것은 반드시 저항이다. 안식은 쉼을 앗아 가는 모든 것에 저항한다. 그것이 욕망이든, 욕망을 교묘하게 재생산하는 문화든, 가혹한 노동을 강제하는 구조와 권력이든 말이다. 무위의 영역에 들어서는 건 저항의 광장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 

그 저항의 광장은 대안적 사회로 가는 길목에 있다. 구약성서는 안식일을 뚜렷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신 5:14) 

구약성서는 공동체의 안과 밖, 권리 있는 이와 권리 없는 자를 가르는 여러 배제의 원리를 가로질러 안식을 완벽하게 평등한 권리로 설정한다.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나이·성별·계급·인종 등 오늘날에도 여전한 차별의 원인들은 안식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나아가 신명기 15장에 이르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7년마다 서로의 빚을 탕감해 줘야 한다. "매 칠 년 끝에는 빚을 면제하여 주십시오."(신 15:1) 또한 노예로 팔린 이들을 자유롭게, 그것도 재산을 주어 풀어 줘야 한다. "일곱째 해에는 그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십시오. 자유를 주어서 내보낼 때에, 빈손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대로 … 그에게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합니다."(신 15:12-14) 그들이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출애굽 사건에 있다. "당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한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이러한 것을 당신들에게 명하는 것입니다." (신 5:15) 

안식에 관한 고전 <안식(The Sabbath)>에서 아브라함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유대교의 오랜 가르침을 따라 안식을 창조의 완성으로 이해한다.  

"분명히 고대 랍비들은 일곱째 날에 또 하나의 창조 행위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엿새 동안 천지가 창조되었듯이, 일곱째 날에 메누하(안식)가 창조되었다. '엿새 동안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 우주에 무엇이 없었는가? 메누하가 없었다. 안식일이 되자 메누하가 왔다. 그리하여 우주가 완전해졌다.' … '일곱째 날에는 무엇이 창조되었는가? 평온, 고요, 평화 그리고 휴식.'" (<안식>, 복있는사람) 

안식은 창조 후의 쉼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으로서의 쉼이다. 그러한 쉼이 없이는 창조도, 우리의 삶도 완성되지 않는다. 있어야 할, 하지만 아직은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진보라면, 사회적 안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꿈꿔야 하는 진보의 모습이다. 고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공동체는 탐욕과 경쟁을 멈추고 가난한 이를 돌보고 사회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정돈하는 사회적 안식의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져야 한다. 안식일은 지친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타인과 더불어 자유하라는 공동체적 요청이며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신앙의 실천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창조의 원점으로 회복하는 일이다. 

누구나 넉넉한 저녁을 즐기고 더 이상 피로사회를 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이 필요할까? 당연하게도 브루그만의 책은 그 답을 주지 않는다. 어렴풋한 방향만 제시할 뿐이다. 

"안식일이 저항인 이유는, 이 안식일이 상품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 행위에는, 만족을 모르는 시장의 끝없는 강요가 가정부터 국가 예산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와 교묘하게 온갖 압력을 가할지라도 흔들임 없는 굳건한 각오와 공동체의 격려가 필요하다."(16쪽) 

안식일이라는 저항을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가득 찬 단단한 내면과 공동체의 품이 필요하다. 책의 내용을 통해 추론하건대, 저 단단한 내면은 아마도 성서 읽기를 통해 가능할 테다. <안식일은 저항이다>는 성서에 대한 깊은 통찰과 설득력 있는 논변을 통해 안식을 향한 확고한 신념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신념은 우릴 더 좋은 공동체를 향한 열정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어떻게 사회 정치적 함의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 그러한 작업이 얼마나 '신학적'인가 묻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정치적 신학이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과 대안 설정의 빈곤함을 채우기 위해 철학이나 사회학에 의지하다 어느덧 아예 사회과학이 돼 버리지는 않는가? 혹은 정반대로 현실과의 정교하고 구체적인 접합점을 찾지 못한 채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식으로 광장에 서의 시위 구호로 납작해져 버리진 않는가?

<안식일은 저항이다>는, 훌륭한 성서 해석은 그 자체로 뛰어난 정치적 담론의 뿌리라는 걸 보여 주는 하나의 탁월한 예다. 브루그만 덕에 우린 십계명을 현 문명에 강력히 저항하는 상황 문서로 읽게 된다. 그리고 성서 안에서 지금 우리를 향한 분명한 음성을 듣게 한다. 안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다름 아닌 우리를 향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 언약을 …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신 5:3) 

김영수 /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본회퍼를 읽고 몇 편의 논문을 썼으며, 본회퍼의 저작을 현대 정치철학의 맥락 속에서 독해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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