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후 학자금 대출(등록금+생활비) 현황을 살펴보면, 우선 대출 인원이 2010년 46만 명, 2011년 48만 명, 2012년 52만 명, 2013년 55만 8,000명으로 3년 만에 10만 명가량(21.2%) 늘었습니다. 대출액은 2010년 1조 7,000억 원, 2011년 1조 8,000억 원으로 늘어난 이후, 2012년 1조 7,000억 원으로 다소 감소했다가 2013년 1조 9,000억 원으로 다시 증가했습니다. (자료 출처 대학교육연구소)

이번 회는 2030세대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인 학자금 대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김파전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2030세대들의 말 못 할 고민을 김파전이 자신의 삶을 대신해 솔직히 나눕니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내 옆의 2030세대들이 마음에 꼭 숨겨 둔 고민을 나눈다 생각하고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 편집자 주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라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라 

_ 에밀리 디킨슨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장례식 내내 우셨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방에 쭈그려 앉아 계속 우셨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주야, 잘 살아야 한다. 우리 어렵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슬프기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슬픔 속에는 어떻게 나와 동생, 그리고 시어머니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는 일을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처음 시작한 일은 티끌 모아 태산 같은 봉투 더미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집어넣고 붙이고 하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집에서 부업을 하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인가 새벽 일찍 일을 하러 나가셨다. 왜 그래야 하는지, 철없는 6학년은 알 턱이 없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는 것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밥을 굶는 것도 아니었고, 학원도 꾸준히 다녔고, 옷도 신발도 사 주셨으니까. 돌이켜 보면, 아버지 없이 자라는 것을 티 안 나게 하고 싶어 어머니 홀로 어려움을 감내하시며 나에게 좋은 것을 많이 해 주셨던 것이다. 

▲ 아버지와 나. 나는 그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슬프기만 했다. 어머니의 슬픔 속에는 어떻게 나와 동생, 그리고 시어머니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이 담겨 있었다. (사진 제공 김정주)

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중학교 때까지 우리 동네 친구들은 우리 집이나 니네 집이나 형편이 모두 거기서 거기였다. 이 자식들이 잘사는지 못사는지,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와 같은 노래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축구공 하나에 난 외롭지 않은 축구왕 슛돌이를 꿈꿨고, 함께 모이면 축구만 죽어라고 하던 그런 친구들이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우물 안 개구리로 살던 내가 여의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빈부 격차를 느꼈다. 내가 신은 신발은 동대문에서 구입한 짝퉁 나이키이었고 나의 바지통은 잘 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놀지도 않는다는 것을 어필하는 데 적절한 6.5통이었다. 근데 그곳 친구들은 진퉁 나이키 신발, 그것도 태어나서 처음 본 면상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입고 다니는 옷도 딱 보기에 우리 동네 스타일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바지에다가 똥을 싼 것같이 뭔가 질펀한 바지통이었고, 셔츠는 줄리엔 강이 물려준 것 같은 펑퍼짐한 핏 그리고 가슴 부근에는 말 타고 토르 망치를 들고 있는 상표가 찍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공이나 차며 뛰놀던 나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잘사는 애들과 못사는 애들이 있고, 나는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그렇다고 뭐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우리 동네 친구들은 여전히 내 옆에 있었고, 우리 엄마는 때때로 용돈을 주셨고, 난 축구공만 있으면 행복했으니. 그리고 여의도의 친구들도 참 착했던 것 같다. 내가 좀 가난해 보인다고 해서 특별히 불편하게 한 녀석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기죽거나 하지 않고 소박하게 잘 살았다. 특별히 더 좋아지길 바라지도 않고 나름 만족하고 살았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턱 막힌 듯

대학교 입학이 확정되자 어머니는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하셨다. 아들 대학 보내려고 힘든 중에 모아 놓은 돈에 조금의 대출을 받아서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셨다. 한 학기가 끝나고 어머니는 이제 등록금을 대줄 여력이 없다고 하셨다. 자연스럽게 학자금 대출을 받게 되었다. 학자금 대출 받는 웹 사이트 들어가서 몇 번 클릭하고 이상한 플래시 애니메이션 하나 보고 승인을 누르면, 며칠 후 등록금이 해결되었다. "참 쉽죵~!" 정말 말 그대로 쉬웠다. 그 후로도 딱 한 학기만 교회에서 받은 소정의 장학금과 어머니가 받은 대출로 학비를 해결하고는, 나머지 학기는 모두 학자금 대출을 이용했다. 취업 후 상환이 뭔지, 원리 균등 상환이 뭔지, 든든학자금이 뭔지 정말 잘 몰랐다. 그저 학교는 다녀야 했고 그 방법이 쉽고 편하니까 학자금 대출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요즘 대학생과 졸업생들이 그러하듯 학자금 대출의 길에 들어섰다. 워낙 넉넉지 않은 삶을 살아온 터라 이렇게 대출을 받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장학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학자금 대출이자가 오랫동안 연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출을 받으며 등록해 놓은 계좌에는 잔액이 없어 이자 정산이 어려우니, 설정해 주는 가상 계좌에 입금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출 신청을 위해 가입한 이후 실로 오랜만에(?)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내 계정에 들어가 학자금 대출 금액을 확인해 보니 무려 1,500만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가 찍혀 있었다. 두꺼운 전공 개론서로 대가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턱 막힌 듯 답답했다. 받을 때는 몰랐는데 그 현실과 직면하고 나니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현실이었다. 이제 내 나이 이십대 중반, 사업하다 망한 것도 아니고, 집안이 망한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한 것도 아닌, 고작 대학교 졸업장 하나 받았는데 1,500만 원이 넘는 빚을 진 빚쟁이가 되어 있었다. 

막막하고 먹먹했다. 갚을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직시하기에는 그 부담이 너무 커서 의식적으로 외면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는 내게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심장에는 빚쟁이라는 주홍글씨가 찍혀 있었다. 매달 학자금 대출이자 납입에 대한 문자가 올 때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리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사실 큰 욕심도 없이 현실을 잘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부족하다고 원망한 적도 없고 어려운 중에도 잘 챙겨 주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그저 웃으며 넘길 일이 아니었다. 돈이 무섭다는 것을 제대로 맛본 것이다. 

학자금 대출 주홍글씨를 안고 결혼을 하니 그때부터 돈은 깡패가 되었다. 여러 가지 두려움이 생겼다. 학자금 대출 빚도 해결 못 했는데 월세가 밀리면 어떻게 하지, 급하게 쓸 돈이 필요한데 돈이 하나도 없으면, 쌀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서 굶는다면…. 별의별, 별에서 온 그대 같은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나만의 비자금(?)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결혼식 축의금으로 비자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결혼식에 오기로 한, 싸이월드 1촌과 같이 친한 지인들에게는 나에게 직접 축의금을 전달해 주시거나 계좌로 입금해 주시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동생에게 부탁해 결혼식 당일에 개인적으로 축의금을 전달해 주실 분들을 거룩하게 구별해 놓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집에 와서 계수해 보니 약 170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여 있었다. 내가 소유해 본 돈 가운데 가장 큰돈이었다. 도와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했다. 마음이 참 평안했다. 이 정도라면 넉넉하지는 않지만 반년 정도는 소박하게 버텨 나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모바일 뱅킹에 접속해 수시로 잔액을 확인하면서 좋아했다.

▲ 내 계정에 들어가 학자금 대출 금액을 확인해 보니 무려 1,500만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가 찍혀 있었다. 두꺼운 전공 개론서로 대가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사진 제공 김정주)

하나님이 채워 주시겠지… 

그리고 얼마 후, 섬기는 교회에서 미얀마 단기 선교를 떠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선교 여행 경비가 약 170만 원이었다. 머리가 심히 복잡해지며 정신없이 계산기가 돌아갔다. 답이 나왔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되며, 생각도 해서는 안 되고, 결단코 가지 말아야 했다. 이 돈으로 다녀오면 통장 잔고가 0원이 되는데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 게다가 나는 이 통장의 잔고를 잘 유지하면서 사우나 알바를 그만두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결혼 전 집에서 살 때는 여의도까지 자전거 타고 15분이면 가능했지만, 신혼집에서 여의도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1시간 30분가량이 걸렸다. 특별히 새벽 근무에 배정되면 새벽 3시 40분에 일어나서 4시 첫 차를 타고 헐레벌떡 가도, 출근 시간인 5시 반까지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하루빨리 이 고된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사우나 알바를 그만두기 위해서라도 그 돈 170만 원은 절대로 네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단기 선교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아무도 나한테 압박을 하거나 강요하지 않음에도 지 혼자 압박(?)에 심히 시달려야 했다. '전도사니까 가야 하지 않을까? 믿음 없는, 돈 꼬봉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담임목사님 눈빛이 예전 같지가 않아[담임목사님은 사실 이 일에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다]….' 오만 생각이 교차하는 중에 "전도사님, 이번에 단기 선교 같이 가실 거죠?"라는 성도들의 물음이 최종 병기 활처럼 나에게 꽂히곤 했다. 170만 원에 내가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결국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 이번에 안 가면 뒤진다고 협박하시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별별 상상을 하다가 아내와 함께 단기 선교를 가게 되었다. 내 몫의 금액은 통장에 있는 170만 원을 탈탈 털어 쏟아부었고(…ㅆ), 아내는 부모님께서 후원해 주셨다. 아내는 잘 몰랐겠지만 나는 엄청 기쁘고 평안한 마음으로 가지를 못했다. 돌아와서의 생활이 심히 걱정이 되어 선교지에서도 자주 그것을 놓고 고민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고민을 잠식시켜 줄 진통제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내 것을 다 드려서 선교까지 왔는데 '하나님이 채워' 주시겠지….'

쩐의 전쟁

선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책에서나 보던,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채워 주심의 역사가 내 삶에서 은밀하고 위대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개의 뿔도 없었다. 정녕 내 통장의 잔고가 0원이 되기를 영원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부터 쩐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혼 준비, 여름 성경 학교, 단기 선교로 말미암아 내가 봐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을 만큼 엉망으로 사우나 근무를 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한 달에 네 번 출근하고도 잘리지 않는 신의 직장을 만들었다. 그 달에는 월급을 10만 원 정도 받았고, 욕은 지금껏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알차고 차지게 부족함 없을 정도로 먹었다. 말도 안 되는 근무표를 제출한 것은 나 나름대로 다니엘과 같이 뜻을 세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한 것이었고, 그렇게 하면 말씀과 같이 나는 높임을 받게 될 줄 알았다. 근데 현실은 달랐다. 내가 그렇게 하면 직장 생활이 심각하게 꼬이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나는 다니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이 나누고 기도할 수 있는 세 친구도 없었고 소위 말하는 찍힌 사람이 되어, 정말 매일매일 고달픈 알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같은 잘못을 해도 나는 3.5배 정도를 더 욕먹어야 했다. 거기다가 그 유명한 기독인 핍박 멘트 중 베스트 쓰리 안에 꼽히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너 이딴 식으로 일할 거면 선교 같은 건 왜 갔냐?"

매일매일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절로, 아니 교회로 들었다. 직장인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사표를 들고 다닌다는 게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당장 그만두면 우리 가정은 더 이상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입으로는 사례비 70만 원, 지출은 월세 40만 원, 십일조 7만 원, 부부 핸드폰 요금 8만 원, 세금 4만 원, 주택 담보 이자 20만 원, 그리고 두 식구 식재료비, 교통비, 보험금 등등. 답이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아, 이래서 결혼은 현실이다. 결.혼.은.현.실.이.다'라는 말의 체온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혼자 살 때는 조금 불편하게 지내면 해결되었던 것들이 결혼을 하니 불편한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불편의 수위가 너무 지나치니까 불행에까지 다다를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이런 내 사정은 개나 주라는 듯 매달 쌓여 나가는 학자금 대출이자와 심방 전화하듯 걸려오는 돈 갚으라는 독촉 전화로 말미암은 압박은 어마어마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내 인생이 왜 이 지경이 되어 버렸지? 내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돈 앞에서 나는 항상 죄인이었다. 게다가 나야 뭐 내가 저지른(?) 일이니 그렇다손 치지만 아내는 무슨 죄인가? 그게 가장 마음을 어렵게 했다. 결혼 취소하고 몇 년 배타고 다녀와서 학자금 대출 빚을 갚고 다시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쯤에서 짠 하고 나타나서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완벽한 적자가 계속되었다. 적자가 계속되어도 대출이자 갚으라는 전화는 꼬박꼬박 걸려 왔고, 급한 불부터 끄고 나면 학자금 이자는 매번 연체되었다. 그때마다 '내가 단기 선교를 왜 간 거지?' 하면서 후회했다. 하나님이 나를 엿 먹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남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의 채워 주심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새벽에 나가 하루 종일 사우나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심신이 지쳤다.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니까 개인 경건 생활도 와르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읽어야 하는 책들이 '나 좀 한번 펴 주세요, 주인님!' 하고 소리를 질러 대는 것 같았다. 책상에 한 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이 기적같이 되었다. 앉아 있어도 온갖 생각에 머리만 더 아팠다. 다른 일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사우나에서 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고 그에 비해 시급도 괜찮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일하기 때문에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의문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만 이렇게 가난한 건가? 어떻게 이런 상황이 극복이 되지?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줄 것 없는 목회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럼 하나님이 이쯤해서 뭔가 짠 하고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곧 이런 의문이 망상을 만나 트위스트를 추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일하던 사우나는 정말 돈 많고 사회적으로도 유명한 사람들만 회원제로 다니는 곳이었다. 회원들 이름을 포털에서 검색해 보면 인물 정보가 거의 찾아질 정도로 유명한 분들이 다녔다. 그러니 이런 망상이 더했던 것 같다. 

나는 전도사다 → 하나님이 나를 갑부들이 다니는 사우나에 두셨다 → 비록 사우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 모드로 정말 성실하고 탁월하게 일한다 → 그런 모습을 어떤 갑부 회원 한 명이 은밀하게 보면서 '저 사람, 참 괜찮군' 하고 생각한다 → 다른 날과 다름없이 열심히 즐겁게 일하고 있는데 그 회원이 갑자기 말을 걸어서 일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한다 → 포털에서 검색해 보니 꽤나 큰 기업의 이사다 →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나에 대해서 물어보고 내가 전도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근데 그 이사님은 신실한 크리스천! 자신의 물질을 통해서 신학생들을 후원하려는 소원이 있었다 → 내 얘기를 듣고 나더니 나를 후원하겠다고 결정한다 → 학자금 대출과 연체이자, 대학원 학비 전액 지원은 물론 생활비와 도서비 지원을 10년 동안 해 주겠다고 한다 →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우나에 보내신 것을 알고 깊이 감사드리며 사표를 팀장에게 집어던지고 마침내 일을 그만둔다 → 할렐루야

긍정의 힘(?)으로 정말 이런 망상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 모드인 척, 어둡고 암울한 현실이지만 행복하게 잘 이겨 내는 척, 주어진 자리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일하는 강한 내면의 소유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신혼여행을 예약할 때 큰 도움을 주신 회원분이 점심에 식사나 함께하자고 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구나 하고 함께 밥을 먹고 공원을 걷는데 나한테 줄 게 있다고 하셨다. '긍정의 힘은 진짜구나. 겁나게 욕해서 미안하다. 쪼엘 오스틴!' 하는 순간, 그 회원님이 주신 것은 빵과 우유였다. 자기가 참 좋아하는 빵집에서 샀다고 하면서 해맑게 웃으셨다. 나는 그날 언젠가는 반드시 '부정의 힘'(?)이라는 책을 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절벽에서 떨어져 만신창이가 되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며 가을에게 '드루와 드루와'를 외치고 있을 무렵, 신혼의 달콤함과 현실의 쓰디씀이 공존했다. 그러다 보니 이게 정말 쓴맛인지 단맛인지 구분도 안 갈 지경이었다. "결혼하니까 좋지? 행복하지?"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머리와 가슴이 화해한 상태에서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행복한데 행복하지 않았다. 근무가 오후조로 바뀌니 낮 12시에 출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밤 12시가 다 되었다. 한 달 반 넘게 낮에 햇빛을 보지 못했다.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불빛들이 '너만 그렇게 잘못된 거야'라고 나를 정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주 하나님이 미워졌다. 지하철을 타고 오고 가면서 기도에다가 솔직하게 간구 반 쌍욕 반을 섞어서 한참을 속으로 쏟아 내다가 한 정거장쯤 남았을 때는 "이런 기도를 한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황급히 기도를 마치고 하나님과 혼자 화해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말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다간 나의 몸과 정신은 물론 영적인 상태까지 완전히 망가질 것 같은 그 순간에 아내와 상의를 한 후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었다. 하나님께서 절벽 끝으로 하도 오라고 부르시기에 '그래, 저 여기 왔습니다'라고 생색을 내면서 절벽 앞에 섰다. 아찔했지만 생각보다 경치가 좋았다. '뛰어내리라고 하실 거죠?'라고 물었다. 아무 말이 없으셨다. '안 뛰어도 되면 말고요' 하는데 발을 잘못 디뎌서 절벽에서 떨어졌다. '이런 씨지브이 같은…'의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다가 '아, 이제 그 유명한, 내 등에 날개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나는 훨훨 날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날개는커녕 개같이 밑으로 떨어졌다.

한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절벽에 대가리가 찍히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온몸이 찢겼다. 마침내 바닥에 쿵 하고 몸이 떨어졌을 때 그 고통 속에서 허탈하게 웃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돈 앞에 장사 없다고 전도사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세미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그 후에…

*다음 주에 '학자금 대출' 두 번째 편이 연재됩니다.

이현숙) 

글쓴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에서 '파전'(파트타임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년배 직장인으로 치면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84년생 서른두 살의 김파전. 비록 전도사님이라 불리지만 세상살이는 '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김파전이 자신의 세대인 2030들이 위로받아야 할 교회에서조차 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신학과 이론으로 내린 정답과 같은 '제자도'가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 크리스천들이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제자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제자도'란 말은 멋지지만 사실 실제 삶은 김파전의 '파전행전'일 수밖에 없지만요. 

김파전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이 겪고 있는 리얼한 삶입니다. 어렵고 힘든 미생의 삶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복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제목은 파트타임 전도사(파전)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행전)라는 뜻으로, '파전행전'이라 지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한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 편집자 주  

*김파전의 페이스북 www.facebook.com/mukhyan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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